[시사의창=정용일 기자] 2022년 12월 강원도 강릉에서 발생한 차량 급발진 의심 사고로 12세 소년 이도현 군이 목숨을 잃었다. 운전자는 도현 군의 할머니였고, 사고 직후 교통사고처리 특례법상 치사 혐의로 입건되었다. 유가족은 차량에 결함이 있었던 것으로 보고 제조사를 상대로 손해배상 청구 소송을 제기했으나, 2024년 5월 13일 법원은 제조사의 책임을 인정하지 않았다. 소비자가 차량 결함을 입증하지 못했다는 이유였다.
13일 오후 강원 강릉시 난곡동 춘천지법 강릉지원 앞에서 고(故) 이도현 군 아버지 이상훈씨가 재판을 마친 뒤 오열하고 있다.
이날 춘천지법 강릉지원 민사2부(박상준 부장판사)는 도현이 가족 측이 KG모빌리티(이하 KGM·옛 쌍용자동차)를 상대로 제기한 9억2천만원 규모 손해배상 청구 소송에서 원고 패소로 판결했다./연합뉴스
현행 제조물 책임법에 따르면 소비자는 '제품이 정상적으로 사용된 상태에서 손해가 발생했다'는 사실을 입증해야 하며, 이로 인해 결함이 있었던 것으로 추정할 수 있다. 2017년 개정을 통해 입증 부담을 다소 완화했지만, 실제로 급발진과 같은 고도화된 기술이 적용된 차량 사고의 경우 소비자가 결함을 입증하는 데에는 한계가 있다. 특히 차량의 설계도면, 제어 소프트웨어, 각종 운행 정보 등 핵심 증거는 대부분 제조사의 통제 아래 있으며, 영업비밀이라는 이유로 외부 제공이 거부되고 있다. 결국 소송 과정에서 소비자는 완전히 불리한 위치에 설 수밖에 없다.
한국교통안전공단에 따르면 2010년부터 2024년 3월까지 14년간 리콜센터에 접수된 급발진 의심 사고는 791건에 달하지만, 이 중 제조사의 결함을 인정한 사례는 단 한 건도 없다. 손해배상 소송에서도 대법원 확정판결 기준으로 소비자가 승소한 사례는 전무하다. 하급심에서 일부 승소한 판결도 있었지만, 항소심이나 대법원 단계에서 뒤집히는 경우가 대부분이다. 2018년 호남고속도로에서 발생한 BMW 차량의 급발진 의심 사고에서는 항소심에서 제조사의 책임을 일부 인정했지만, 해당 사건도 현재 대법원에서 계류 중이며 아직까지도 확정판결이 나지 않았다.
해외에서는 이와 다른 판례가 존재한다. 대표적으로 2007년 미국 오클라호마주에서 발생한 ‘북아웃 사건’에서는 도요타 캠리 차량이 고속도로에서 급발진하여 사고가 발생했고, 이에 대해 1심 배심원단은 전자식 엔진 제어 시스템(ETCS)의 소프트웨어 결함을 원인으로 판단하고 도요타 측에 약 300만 달러의 손해배상 평결을 내렸다. 이 소송에서는 독립 소프트웨어 감정기관인 바그룹이 도요타의 소프트웨어 설계 결함 가능성을 기술적으로 입증한 것이 핵심적 역할을 했다. 소송이 징벌적 손해배상 판단 단계에 들어서자 도요타는 피해자와 합의에 나섰다.
하지만 한국에서는 이처럼 제조사의 기술자료 접근이나 제3의 독립 감정이 거의 불가능에 가깝다. 도현 군 유가족은 민사소송과 별도로 국내에서 처음으로 차량 급발진 재연 실험을 진행하고 전문 감정을 의뢰했지만, 법원은 이를 결함 입증의 결정적 증거로 보지 않았다. 고도로 복잡한 소프트웨어 제어 기술에 기반한 사고임에도 불구하고 입증 책임은 여전히 소비자에게 전가된 것이다.
2022년 12월 강릉에서 발생한 차량 급발진 의심 사고의 책임 소재를 둘러싼 민사소송의 첫 재판이 열린 2023년 5월 23일 사진은 전국에서 모인 탄원서 1만7천여부 모습./연합뉴스
이런 구조적 불균형을 해결하기 위해 유가족과 시민들은 '도현이법' 제정을 촉구하고 있다. 해당 법안은 제조물 책임법을 개정해 결함 입증 책임을 소비자에서 제조사로 전환하는 내용을 담고 있다. 특히 2023년 유럽연합(EU)에서 확정한 제조물 책임법 지침을 반영해, 제품이 과도하게 기술적으로 복잡해 소비자가 결함과 인과관계를 입증하기 어렵다고 판단될 경우, 결함이 있었다는 점과 사고의 인과관계를 추정할 수 있도록 했다. 아울러 기존의 고도의 개연성(80~90%) 기준을 증거의 우세(50% 이상)로 낮추고, 제조사가 영업비밀을 이유로 자료 제출을 거부할 경우 해당 사실을 인정한 것으로 간주하는 조항도 포함되어 있다.
22대 국회에서는 총 8건의 제조물 책임법 개정안이 발의된 상태지만, 산업계 반발과 법적 공평성 논란 등을 이유로 여전히 상임위 통과조차 어려운 상황이다. 유가족 측은 국회가 국민 생명과 안전보다 산업계의 입장만을 우선하고 있다고 지적한다. 이도현 군의 아버지는 재판 직후 "제조사는 침묵으로 진실을 숨기고, 국가는 외면으로 방조하며, 법은 기업 편에 선다"고 호소했다. 소송을 대리한 하종선 변호사 역시 “국민이 죽어나가도 제조사를 위한 법이 국민 위에 있다면, 그 사회는 정의롭지 않다”며 도현이법의 신속한 제정을 촉구했다.
명확한 책임 소재 위해 '페달 블랙박스' 의무화 필요
해당 사안에 대해 대림대학교 자동차학과 김필수 교수는 14일 시사의창에 "운전자 실수가 아닌 자동차 결함을 유추할 수 있는 여러 상황도 있어서 어느 때보다 싸워볼 만한 정보가 많은 상황이었다. 이번에 담당 변호사가 획일적인 사고기록장치의 기록을 문제 삼아 국과수의 소프트웨어의 조사가 전무한 부분은 중요한 의미가 있다고 할 수 있었다."고 재판결과에 대해 아쉬움을 표했다.
이어 "자동차 급발진사고는 자동차가 이상 작동할 정도로 심각한 만큼 하드웨어의 문제점도 크지만 근본적으로 이를 명령하는 소프트웨어가 더욱 문제점이 크다고 할 수 있기 때문이다. 이 상황에서 사고기록장의 획일적인 불신의 기록으로 상기와 같이 100, 99, OFF로 나오는 이유도 바로 소프트웨어 자체가 문제가 크다고 할 수 있다."고 부연했다.
그러면서 "즉 국과수의 소프트웨어 조사가 그만큼 핵심적인 해결방법이라 할 수 있기 때문이다. 결국 지금의 자동차 급발진 사고는 기존의 내연기관차를 필두로 하이브리드차와 전기차도 계속 발생하고 있다. 근본적인 해결방법이 요구된다는 것이다."고 덧붙였다.
또한 김 교수는 페달 오조작 사고를 방지하고 책임 소재를 명확히 하기 위해 '페달 블랙박스'의 의무화를 제안하면서 "이는 운전자의 페달 조작 데이터를 기록하여 사고 원인 분석에 도움을 줄 수 있는 장치로, 사고 발생 시 정확한 원인 규명에 기여할 수 있다."고 강조했다.
지금도 전국 각지에서는 급발진 의심 사고가 계속해서 발생하고 있으며, 비슷한 상황에 처한 피해자들이 어렵게 법정에 서고 있다. 그러나 기술 정보의 장벽과 현행 법의 한계 앞에서 대부분 소송은 무력하게 끝나고 있다. 도현 군의 죽음이 또 하나의 통계로만 남지 않도록 하기 위해, 입법자들의 책임 있는 대응이 절실하다.
정용일 기자 citypress@naver.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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