봄비가 내린다. 비는 눈에 보이는 풍경들을 멀리서부터 원근을 지우고 있다. 소실점이 사라진 풍경이다. 푸석한 땅들은 작년에 떨어진 씨앗들을 품고 있다가 내리는 비를 반갑게 받겠지. 씨앗들은 자기 속으로 들어온 양분으로 튼튼한 잎들을 만들어 밀어 올리겠지. 형태를 짐작할 수 없는 것들도 무언가 익숙한 형태를 만들어 낼 것이다. 언젠가부터 봄이 되면 꽃들은 차례대로 피지 않고 일제히 피었다가 일제히 사라졌다. 세상의 질서를 무너뜨리는 지구 온난화로 달라진 기온 때문이라고 사람들은 말을 하였다. 하기야 내가 어릴 적엔 봄의 전령사인 영춘화, 개나리, 진달래, 벚꽃, 산수유 등 여러 가지 봄꽃들이 한꺼번에 피어오르지는 않았다. 그래서 차례대로 피어나는 꽃들을 천천히 감상할 수 있었다. 오랫동안 봄을 느낄 수 없는 세월의 변화가 아쉽기는 하지만 내리는 봄비를 보면서 천천히 산책한다. 봄을 느낀다는 어떤 의미일까. 어떤 특별한 감정이 없으면서 막연하게 설렌다는 것이 봄을 느끼는 마음인가.
[시사의창 2025년 5월호=이두섭 작가] 자연이라는 존재는 사람들에게 힘과 용기, 그리고 감동을 준다. 숨죽이고 웅크리고 있던 것들이 씩씩하게 잎들을 내밀거나 아름다운 꽃잎을 드러낼 때는 생명이라는 것의 경이로움은 실로 놀랍기만 하다. 가슴이 두근거리는 환희. 그러므로 그것을 사랑할 수밖에 없는 감정까지 연결되어 궁극적으로 그것의 마지막 지점엔 희망과 넉넉한 너그러움까지 함께하는 시간이 된다.
숲길을 걸었다. 오롯이 작은 길이 있고 숲속이라서 인공적인 어떤 것들도 눈에 띄지 않는 길이다. 파란 하늘이 나뭇잎 틈새로 보인다. 아직은 잎들이 완전하게 모습을 드러내지 않아 숲속의 나뭇잎 위에 반짝이는 것으로 여기저기 햇빛이 앉아있다. 사랑스러운 풍경이다. 자연의 색이 좋은 점은 편안한 감정을 전달하기 때문인 것 같다. 그 편한 감정들이 마음의 때를 씻어주는 힐링의 시간이 되는 것이겠지. 그런 환하고도 안락한 곳에서 자연스럽게 그림에 대하여 생각해 본다.
영국에서 시작된 산업혁명은 1760년에서 1820년까지 비약적인 대량생산의 길과 기술의 발달을 이루어내었다. 기술의 발달로 미술계에서도 혜택을 보게 되었는데 중요한 것은 화가들이 사용하는 물감을 휴대하게 만들어졌다는 사실이다. 도제의 방법으로 제작되는 상황에서는 물감을 일일이 만들어 써야 하는 상황에 밖으로 나가 직접 그림을 그린다는 것은 여간 불편한 일이 아니었다. 그런 편리한 미술 재료를 가지고 밝은 그림을 그리기 시작한 인상파 화가들은 밖으로 나가 야외에서 실제 사생하였다.
시각적인 모든 것들은 바람이 불면 햇빛을 받은 나뭇잎들이 흔들리면서 반짝이는 투명한 빛을 관찰하여 작업을 했을 테니 당연히 그림이 밝아졌겠지. 이후 예술가들은 점점 더 자극적이고 화려한 색을 사용하기 시작하였다. 문화라는 것이 실은 자극이라는 것을 기반으로 하는 분야일 수도 있다. 눈에 띄어야 하는 상황을 만들려면 자극은 필요할 텐데. 현대인들은 자극에 익숙해지다 보니 강조되는 색상에 익숙하다.
사람들의 심리는 색이나 환경이 바뀌게 될 때 그에 따른 생각도 바뀐다고 본다. 생각이 바뀐다는 것의 의미는 문화의 발전을 의미할 수도 있다. 화장실에서 쓰는 기성 제품인 변기를 샘(Fountain)이라는 제목을 붙여 작품으로 발표한 마르셀 뒤샹(Henri Robert Marcel Duchamp,1887~1968.) 이후로 그림들은 많은 부분이 아이디어쪽으로 발전되어졌다. 어떻게 하면 더 잘 그릴 수 있을까 하는 기술적 면에서의 탐구가 아닌 좋은 그림, 즉, 좋은 작품의 생산에 신경을 쓰게 된 것이다. 그런 의미에서 화가보다는 작가라는 타이틀이 해당자들에게는 적합한 단어일 수도 있지 않을까.
이 새로운 계절인 봄에 산책하면서 바라보는 것들이 꽃들이나 여린 풀잎들이다. 꽃을 보며 아름답다고 느끼고, 그리고 그 아름답다는 생각을 말로 전달되는 것이 언어적인 부분일까. 하늘에 흘러가는 구름을 보며 인생을 빗대어 이야기하는 것도 언어적 부분일까. 실은 예술가들은 비언어적 대상들을 바라보고 사색하여 많은 생각을 통해 언어화하였다.
그래서 작업의 원형을 자연 속에서 찾을 때가 많다. 언어가 아닌 것에서 정보를 얻어 언어화하는 과정으로서의 미술. 직접적으로 말을 하지 않는 것들을 바라볼 때의 막연함은 비언어적 소통일 수밖에 없다. 충돌하는 감정들이 구체화 되어 화가의 시각으로 언어화 되어 전달될 때 의미, 무의미를 떠나 포용력의 긍정언어는 필요사항이라고 생각한다.
숲속의 작은 길을 따라가다 보니 산 위에 오르게 되었다. 산 위를 오르면서 열린 공간 사이로 가끔 아래에 펼쳐진 풍경을 바라본다. 서서히 내 몸이 떠오르는 듯한 착각이 생긴다. 산 위에서 보는 산 아래의 풍경들. 사람들의 형태는 거의 보이지 않는다. 자세히 볼 필요 없이 전체적인 풍경을 훑어본다. 아래쪽에서도 갈등과 평화가 있겠지. 그러나 높은 곳에서 바라보면 그 갈등이 아무 의미 없어 보인다. 잠시 세상의 하찮음과 결별한다. 내게 있었던 갈등의 요소들이 하찮았음을 생각해 보는 소중한 시간이 된다. 위에서 아래를 내려다본다는 것의 의미는 진정한 자신의 발견이라는 소중한 한 면을 갖고 있다.
세상의 모든 사람은 자신에 대해 말하는 어법들이 서로가 다르다. 어법의 차이로 세상과 머리를 맞대기 힘들다. 그 힘듦의 간격을 좁히는 일은 사색과 멀리서 바라봄의 관조(觀照)도 상당히 필요한 부분이라 생각한다. 어떤 일이 생겨 이해받지 못하는 상황이 되었을 때 우리 자신들을 온전히 지켜주는 것들은 관조가 아닐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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