충북 청주시 상당구 성안길에 있는 유명한 호떡집. 호떡은 누구나 다 좋아하는 대중적인 서민 음식이다.


[시사의창 2025년 5월호=김영복 칼럼니스트] 요즘 호떡이 대한민국 국민 간식이라 할 만큼 전국 어디서나 계층에 관계없이 인기가 많다. 그런데 호떡[胡餠]은 그 이름에서 알 수 있듯이 중앙아시아와 아랍의 음식으로 중국을 거쳐 한국에 왔다.

중국에서 후삥(胡餠)이라고 부르는 호떡[胡餠]의 ‘호(胡)’는 오랑캐를 뜻한다. 중국인들은 서역(西域), 지금의 중앙아시아와 아랍 사람을 일컬어 호인(胡人)이라고 불렀다. 호떡[胡餠]은 오랑캐인 이들 호인(胡人)들이 만들어 먹던 떡에서 비롯되었다는 것을 짐작할 수 있다.

특히 중앙아시아 지역의 흉노족, 선비족, 돌궐족 등 오랑캐들은 쌀 대신 밀가루를 반죽해 화덕에 굽거나 기름에 튀겨 먹었다.

중국 남북조시대(南北朝時代)에 남조(南朝) 송(宋)의 범엽(范曄)이 편찬한 후한(後漢)의 정사(正史) 『후한서(後漢書)』⌜오행지(五行志)⌟에는 서역의 풍속에 빠져 지낸 영제 이야기가 나온다. 그는 서역의 옷을 입고 호떡을 먹었다고 한다. 호떡의 유행은 당나라 때까지도 이어졌다.

일본 천태종(天台宗)의 제3세 좌주(座主)인 자각대사(慈覺大師) 엔닌(圓仁)이 일본 최후의 견당사(遣唐使)인 승화견당사(承和遣唐使)의 청익승(請益僧)으로서 당(唐)나라에서 구법활동을 수행할 때 쓴 기행문인 『입당구법순례행기(入唐求法巡禮行記)』를 보면 입춘을 기념해 황제가 절에 특별 선물로 호떡을 보냈다는 기록이 나온다. 당(唐)나라 때 안녹산의 난으로 피난길에 오른 양귀비가 죽기 전에 먹었던 마지막 음식도 호떡이었다고 한다.

그런데, 이 호떡은 ‘권전병(捲煎餠)’이라는 음식으로 조선후기의 대표적 실학자이며 문신이었던 풍석(楓石) 서유구(徐有榘 1764~1845)가 쓴 『임원경제지(林園經濟志)』「정조지(鼎俎志)」 2권에 등장한다.

풍석(楓石) 선생은 이 음식을 1591년 명대(明代) 말기에 고렴(高濂)이란 사람이 도가(道家)와 석가(釋迦)의 설을 취한 심신 수양법, 사계의 섭생법, 생활의 모든 시설, 건강법, 음식물, 고기서화 문방구(古器書畫文房具) 등 상완품, 화초, 약재 처방, 역대의 은일자의 사적 등을 체계적으로 정리하여 간행한 『준생팔전(遵生八牋)』13권⌜음찬복식전(飲饌服食箋⌟하(下)‘첨식류(甜食類)’‘권전병방(卷煎餅方)’ 준생팔전교주(遵生八牋校注)》, 471쪽에 나오는 음식을 『임원경제지(林園經濟志)』「정조지(鼎俎志)」에 옮겨 적은 것이다.

원문에는 ‘餠與薄餠同 【[案] 薄餠之制, 《遵生八牋》雖不詳言, 而要當用白麪, 水搜作劑, 捍作薄皮以包餡耳】.餡用猪肉二斤、 猪脂一斤, 或鷄肉亦可, 大槪如饅頭餡, 須多用蔥白或筍乾之類. 裝在餠內, 捲作一條, 兩頭以麪糊粘住, 浮油煎令紅焦色, 或只熯熟, 五辣醋供. 素餡同法. 《遵生八牋》

권전병(卷煎餅)은 박병(薄餠)과 같다 【[안] 박병의 제법은 《준생팔전》에는 비록 상세히 이야기하지 않았지만, 요점은 밀가루를 물로 반죽하여 반죽덩이를 만든 뒤, 이를 펴서 얇은 피를 만들어 소를 감쌌을 뿐이다】.

소[餡]는 돼지고기 2근, 돼지비계 1근을 쓰는데, 혹 닭고기를 써도 좋다. 대개 소는 만두소와 같으니, 총백 혹은 말린 죽순 같은 종류를 많이 써야 한다. 소를 떡 속에 넣은 다음 말아서[捲] 긴 가래 하나를 만든다. 그 뒤 양끝은 밀가루풀로 붙여 막는다. 이를 기름에 튀겨 붉게 그을린 빛을 내게 하거나 불에만 구워서 익힌 다음 오랄초(五辣醋)를 찍어 먹는다. 채소로 만든 소의 경우도 방법은 같다. 《준생팔전》-여기서 오랄초(五辣醋)는 다섯 가지 매운 양념인데, 양념[飪料] ‘오랄초’에서는 식초에 간장 · 백당 · 산초 · 후추 · 생강 · 마늘을 넣어 만들었다.

이 책에는 권전병(卷煎餅) 외에도 회회권전병만들기[回回捲煎餠方]와 칠보권전병만들기[七寶捲煎餠方]가 나온다.

우선 회회권전병만들기[回回捲煎餠方]는 원(元,1271~1368)나라 전반기에 편찬된 저자 미상의 종합생활백과전서『거가필용(居家必用)』에 나오는 음식이다.

여기서 권전병(捲煎餠) 앞에 회회(回回)가 붙은 것은 풍석(楓石) 선생도 기록한 것처럼 아라비아와 페르시아를 비롯한 중앙아시아의 음식이 중국 원나라로 전해진 것을 의미한다.

요(遼)(907년 ~ 1125년)대에 중앙아시아의 민족을 부르는 회회(回回: 중국 발음으로 Hui-Hui)라는 말이 있었는데, 이는 회흘(回紇, [위구르])의 어음이 전화한 것이었다. 기왕의 대식국 사람, 즉 아라비아와 페르시아 사람이나 중앙아시아의 회회(回回) 사람 중에는 공통적으로 이슬람교 신자들이 많았다. 이슬람교의 명칭 역시 회회교(回回敎)로 바뀌었고, 이슬람 사람들도 회회인(回回人), 회회승(回回僧), 회회인들의 달력을 회회력(回回曆)이라 불렀다.

원문을 보자 ‘【[案] 此方來自回回國】 攤薄煎餠. 以胡桃仁、 松仁、 桃仁、 榛子、 嫩蓮肉、 乾柹、 熟藕、 銀杏、 熟栗、 芭、 欖仁, 已上除栗黃片切外, 皆細切. 用蜜、 糖霜和, 加碎羊肉、 薑末、 鹽、 蔥, 調和作餡, 捲入煎餠油煠焦. 《居家必用》

【[안] 이 요리법은 아라비아에서 왔다】 밀가루를 얇게 밀어 떡을 지진다. 호두 · 잣 · 도인(복숭아속씨) · 개암 · 여린 연육(蓮肉, 연꽃의 익은 열매) · 곶감 · 잘 익은 연근 · 은행 · 잘 익은 밤 · 파초 · 남인(欖仁, 올리브)을 쓴다. 이상의 재료에서 황율(밤)을 편으로 써는 것을 제외하고는 모두 가늘게 채 썬다. 꿀과 흰 설탕을 섞고 잘게 다진 양고기 · 생강가루 · 소금 · 파를 더하여 잘 섞은 다음 소를 만든다. 미리 다져놓은 소를 전병에 말아[捲] 넣고 기름에 노릇하게 튀긴다.’라고 나온다. 오늘의 씨앗호떡의 효시인 듯한데, 그 내용은 더 고급지다.

풍석(楓石) 선생은 ‘칠보권전병만들기(七寶捲煎餠方)’ 역시『거가필용(居家必用)』을 인용했다. ‘白麪二斤半, 冷水和成硬劑, 旋旋添水, 調作糊. 銚盤上用油攤薄, 煎餠. 包餡子如捲煎餠樣, 再煎供. 餡用羊肉炒燥子、 蘑菰、 熟蝦肉、 松仁、 胡桃仁、 白糖末、 薑末. 入炒蔥、 乾薑末、 鹽、 醋各少許, 調和滋味得所用. 《居家必用》

밀가루 2.5근을 냉수와 섞어 단단한 반죽을 만든 다음, 그때그때 물을 더하고 섞어 풀처럼 만든다. 번철 위에 기름을 두르고 반죽을 얇게 펴서 떡을 지진다. 권전병모양으로 소를 싼 뒤, 다시 지져서 먹는다. 소에는 볶아 말린 양고기 · 표고버섯 · 익힌 새우살 · 잣 · 호두 · 흰 설탕가루 · 생강가루를 쓴다. 여기에 볶은 파 · 말린 생강가루 · 소금 · 식초를 각각 조금씩 넣고 모두 섞으면 맛이 적당해진다.

여기서 칠보(七寶)라고 이름이 붙여진 이유는 잘 모르겠지만 씨앗이나 채소 외에 양고기와 익힌 새우살이 들어간 것이 차별화된다고 봐야 할 것이다.

권전병(捲煎餠)은 그저 풍석(楓石) 서유구(徐有榘 1764~1845)가 쓴『임원경제지(林園經濟志)』「정조지(鼎俎志)⌟ 기록으로만 남아 있었던 것 같다.

1882년, 임오군란이 일어나자 청나라가 조선에 육군 3,000여 명을 파견했는데, 자국인의 상권을 확보하기 위해서 수십 명의 청나라 상인들도 같이 들어왔다. 이후 청나라가 망한 뒤에도 본토로 돌아가지 않고 남은 상인들이 생계를 위해 음식점을 열고 만두와 호떡 같은 음식을 팔기 시작했다고 한다.

이때부터 호떡이라는 이름이 서서히 알려지기 시작했다.

화교(華僑)들은 점차 우리나라 사람들 입맛에 맞게 호떡 조리법을 변형해서, 호떡 안에 조청이나 꿀, 흑설탕 등을 넣어 팔았다.

인천 제물포에서 처음 만들어 팔기 시작한 한국식 호떡은 화교(華僑)들이 모인 서울 명동 중국 대사관 주변이나 종로 거리에서 전국으로 퍼지기 시작했다.

일제 강점기였던 1920년대 한반도에 대형 건설 현장이 늘어나면서 동원할 값싼 인력이 필요해짐에 따라 중국인 쿨리(苦力, 짐꾼·광부·인력거꾼 등 하급 노동자를 일컫는 말)들이 한국으로 건너왔다. 가난한 노동자에 불과했던 그들에게 호떡은 가장 선호하는 음식이었다. 당시 쿨리가 많은 곳에는 어디나 호떡집이 있었고, 값이 싸고 쉬 상하지도 않는 호떡을 한 보따리씩 싸들고 다니는 쿨리들이 많았다.

쿨리가 몰리는 항만도시나 대도시를 중심으로 서서히 차이나타운이 형성됐으며 호떡집도 늘어나, 한동안 우리 전통 음식점인 설렁탕집보다도 호떡집이 더 많았다고 한다. 호떡집 앞에는 항상 사람들이 몰렸는데, 부산하고 소란스러운 것을 의미하는 “호떡집에 불났다”라는 말도 여기서 비롯된 것으로 추정된다.

쿨리를 대상으로 팔리던 호떡은 쿨리들이 한국을 떠난 뒤에도 우리 입맛에 맞게 다양하게 변형되면서 우리나라의 국민 간식으로 자리 잡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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