통상 일반인은 접하기 어려운 ‘관봉’ 형태의 신권 묶음
대체 ‘누가’, ‘왜’, ‘어떻게’ 이 돈을 전 씨에게 전달했나
전씨 “대한민국서 대기업 중 나를 모르는 사람이 없다”
[시사의창=정용일 기자] 정치권과 무속의 검은 그림자가 또다시 수면 위로 떠올랐다. 무속인 ‘건진법사’ 전성배 씨 자택에서 압수된 5천만 원 상당의 한국은행 포장 신권이 그 출처를 둘러싸고 사회적 의혹을 증폭시키고 있다. 검찰이 압수한 현금은 단순한 지폐 다발이 아니라, 통상 일반인은 접하기 어려운 ‘관봉’ 형태의 신권 묶음이었다. 이같은 형태의 현금은 통상 금융기관에 지급되기 위해 한국은행에서 직접 포장한 것으로, ‘누가’, ‘왜’, ‘어떻게’ 이 돈을 전 씨에게 전달했는지에 대한 물음이 본격화되고 있다.
검찰이 지난해 무속인 '건진법사' 전성배씨 자택에서 압수한 5천만원 신권 '뭉칫돈'의 출처를 추적하고 있는 것으로 전해졌다. 사진은 전씨의 자택에서 나온 한국은행이 적힌 비닐로 포장된 돈뭉치./연합뉴스
서울남부지검은 지난해 12월 전 씨의 자택에서 1억6천5백만 원 규모의 현금을 압수했으며, 그 중 5천만 원은 ‘한국은행’ 명칭이 적힌 비닐에 포장된 신권이었다. 해당 비닐에는 담당자 및 책임자명, 일련번호와 함께 날짜가 명시되어 있었는데, 그 날짜는 윤석열 전 대통령 취임 사흘 뒤인 2022년 5월 13일로 적혀 있었다. 단순한 현금 다발이 아닌 ‘기획된 포장’으로 보일 수밖에 없는 정황이다.
한국은행 측은 더불어민주당 윤건영 의원실에 “해당 포장 상태는 금융기관으로 나가는 형태”라며 “일련번호만으로는 출고 기관을 특정할 수 없다”고 밝혔다. 이는 결국 누군가 금융기관을 통해 막대한 금액의 신권을 조달하고 이를 전 씨에게 전달했을 가능성을 시사한다. 이쯤 되면 개인적인 기부나 시주라고 보기에는 무리가 따를 수밖에 없다.
전 씨는 검찰 조사에서 “사람들이 뭉텅이 돈을 갖다주면 쌀통에 넣는다”며 해당 돈의 출처를 기억하지 못한다고 주장한 것으로 전해졌다. 그러나 이는 상식적으로 납득하기 어려운 해명이다. 특히 검찰은 전 씨의 법당과 주거지를 압수수색하며 대기업 임원, 정치권 인사, 경찰 고위간부, 법조인 등의 명함 수백 장을 확보한 것으로 알려졌다.
전 씨는 윤석열 정부 출범 이후, 유력 인사들로부터 ‘기도비’ 명목으로 금품을 받아왔으며, 사실상 정치 브로커 역할을 했다고 검찰은 판단하고 있다. 그는 검찰에 “1억 이상 기도비를 받은 적이 많고, 3억을 받은 적도 있다”, “대한민국 대기업 중 나를 모르는 사람이 없다”는 발언을 서슴지 않은 것으로 전해졌다.
검찰은 전 씨 배우자 명의 계좌에 2017년 7월부터 2018년 12월까지 기도비 명목으로 6억4천만 원 이상의 현금과 수표가 입금된 사실도 확인했다. 이는 단순 종교 행위의 일환으로 볼 수 없는 금액이다. 또한 이러한 ‘기도비’가 정치적 영향력 행사, 인사 청탁, 또는 대가성 금품일 경우, 제공자 역시 업무상 횡령, 정치자금법 위반, 알선수재죄 등의 혐의 적용이 가능하다는 지적이 나온다.
이번 사건은 과거 국정원 특수활동비 사건, 박근혜 정부의 상납 스캔들과 묘한 데자뷔를 남긴다. 이명박 정부 당시 국무총리실 불법사찰 사건을 폭로한 장진수 전 주무관은 입막음용으로 받은 5천만 원 현금 다발이 ‘관봉권’ 형태였음을 공개한 바 있다. 박근혜 정부 당시 청와대에 국정원 자금을 상납한 사건에서도 ‘띠지로 묶인 신권 다발’이 동일하게 등장했다.
권력과 현금의 반복되는 유착 고리를 보여주는 상징적 장면이다. 무속인을 앞세운 권력의 음지 활동, 그리고 그를 통해 자금이 오고가는 구조는 단순한 개인의 일탈을 넘어 정치 시스템의 구조적 문제로 확대되고 있다.
2018년 지방선거 당시 불법 정치자금을 수수한 혐의로 기소된 무속인 '건진법사' 전성배 씨가 7일 서울 양천구 남부지방법원에서 열린 불법 정치자금 수수 의혹 관련 재판을 마친 뒤 법원 청사를 나와 차량에 탑승하고 있다./연합뉴스
이 사건은 몇 가지 본질적 질문을 던진다. 윤석열 정부 출범 직후의 시점에, 누구의 손을 거쳐 전 씨에게 신권이 전달되었는지와 ‘기도비’ 명목의 돈은 과연 종교적 시주의 일환인지, 혹은 정치적 거래의 산물인지에 대해 명확히 짚고 넘어가야 한다. 또한 전 씨와 연결된 명함 속 이름들은 단순 방문객인지, 아니면 비공식 권력 네트워크의 일원인지에 대한 부분도 의문으로 남는다.
단지 한 무속인의 일탈로 축소될 문제가 아니다. 포장된 현금 다발은 마치 사회의 은밀한 거래를 증명이라도 하듯 정교하게 준비되어 있었다. 검찰이 이 자금의 출처와 사용처를 명확히 규명해야 한다. 국민은 더 이상 무속과 권력, 검은 돈의 밀월을 좌시하지 않는다. 정치는 무속의 가면 뒤에 숨을 수 없다. 침묵은 공모고, 방조는 범죄다.
정용일 기자 citypress@naver.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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