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1월25일 영면하신 김충배 선생
[시사의창=조영섭 기자] 지난 1월25일 제6회 방콕 아시안게임 (라이트 플라이급) 금메달 리스트인 김충배 선생이 영면(永眠)하셨다. 고인은 1946년 9월5일 경기도 부천시 태생으로 1964년 영등포공고 2학년때 운동장 구석에 새끼줄로 링을 쳐놓고 처음으로 복싱을 배웠다.
1966년부터 영등포체육관에서 1972년 뮌헨 올림픽 국가대표 코칭 스탶으로 발탁된 홍순만 관장의 본격적인 지도로 김춘석 이필구 김현치 김진길 전학수 이만덕 등과 함께 훈련을 시작한다. 158cm의 김충배는 보디웍과 헤드웍을 자유자재로 구사하면서 다양한 연타를 뿜어내는 복서겸 파이터였다. 이러한 현란한 테크닉을 주무기로 김충배는 1966년 학생선수권 제 47회 전국체전 10월 제 26회 전국선수권대회를 차례로 석권하면서 3관왕을 달성 한국복싱의 미래로 주목을 받는다.
그리고 1968년 2월 방콕 세계 군인선수권 선발전에서 육군 대표로 출전 우승을 차지한 김충배는 그해 7월 멕시코 올림픽 최종선발전에서 송영수 사단의 선두 주자 지용주(국민대학)의 두터운 벽에 막혀 출전이 좌절된다. 김충배를 꺾은 지용주는 본선에서 송순천 정신조에 이어 사상 3번째로 올림픽에서 은메달을 획득했다.
70년 방콕 아시안게임에 출전한 김태호 지용주 김성은 김충배(우측)
그 당시 올림픽에서 전 종목을 통틀어 금강석(金剛石)처럼 가장 돋보이는 효자종목 한국 복싱의 혁혁(奕奕)한 위상을 한눈에 알 수 있는 대목이다. 한편 패배를 디딤돌로 인해 절치부심(切齒腐心)한 김충배는 1969년 4월 필리핀에서 개최된 제4회 아시아선수권대회에 국가대표로 발탁되어 출전한다. 그리고 대망의 1970년 12월 방콕 아시안게임에 출전 준결승에서 태국의 스파퐁을 결승에서 필리핀의 마놀로 비세라를 차례로 판정으로 꺾고 금메달을 차지한다.
이대회를 앞두고 출국전 아시안게임 단장에 선임된 장덕진 축구협회장이 선수촌을 방문 이대회에서 금메달을 획득한 선수들에게 당시 집 한 채 값인 백만원을 지급하기로 공약을 내 걸었을 정도로 매우 중요한 경기였다. 당시는 중국이 본선에 참가하기 전이라 일본이 독주를 할 때였고 한국이 태국 인도와 2위자리를 놓고 각축전을 벌이던 시절이었다.
당시 한국은 장덕진의 당근 정책에 힘입어 한국복싱은 7체급에서 결승에 진출 6체급에서 금메달을 획득했고 금메달이 유력했던 미들급의 박형춘은 은메달을 고교생 천재 복서 김태호(대경상고)는 라이트급에서 동메달을 획득한 대회였다. 1971년 명지대학 재학시절 김충배는 고생근 남영웅 김승미 김상만 남규철 등과 조화를 이루면서 제22회 전국선수권 대회에서 종합우승을 이끌 때 중추적인 역할을 담당하였다.
영등포 체육관 후배 전학수(좌측)과 생전의 김충배 선생(우측)
1972년 뮌헨 올림픽 대회 선발전에서 김충배는 난적 이석운(중산)에 판정패 올림픽출전과는 인연을 맺지 못했다. 1973년 2월 제2회 아시아선수권 플라이급 2차 선발전 4강에서 천흥배(조선대) 결승에서 박인규(남산공전)를 각각 판정으로 잡고 우승을 차지한다. 하지만 최종선발전에서 그해 전국체전에서 금메달을 획득한 떠오르는 태양 황철순에 판정패를 당하면서 고배를 마신다.
은퇴후 청운실고 교사로 재직하면서 복싱부를 창단 1981년 제31회 전국 학생선수권 대회에서 라이트 웰터급에서 백승영이 88 올림픽 대표 하종호(경북체고)를 꺾고 우승을 차지하는등 2체급을 석권 종합우승을 차지했다. 그리고 이어진 1982년 킹스컵 선발전(페더급)에서 고교생으로 전 KO승을 거두고 우승을 차지한 핵 주먹 송광식을 비롯 장수곤 유규상 박옥식등 다수의 복서들을 배출했다. 끝으로 70년대 초중반 한 시대를 풍미한 전설의 복서 김충배 선생의 명복을 빈다.
조영섭기자 6464ko@naver.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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