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사의창 2025년 3월호=김동식 칼럼니스트] 사성제(四聖諦)는 네 가지 성스러운 진리(眞理)라는 뜻으로 사성제(四聖諦)의 법문(法文)은 움직일 수 없는 진리(眞理)로 분명(分明)히 규명(糾明)하여 그 고뇌(苦惱)를 치유(治癒)한 다는 뜻으로 체(諦)라하고 또 깨달음의 뜻이라고도 한다.
‘고(苦)’는 괴로운 것, ‘집(集)’은 괴로움의 원인, ‘멸(滅)’은 괴로움과 괴로움의 원인을 분명히 알고 그것을 바로잡아 없애는 것, ‘도(道)’는 괴로움을 없애는 방법이다.
존재하는 것의 현실은 항상 불만족과 고통의 연속인 ‘고(苦)’이다. 이런 현상의 원인은 ‘집(集)’ 즉 집착(執着)이다. 무상(無常)한 현실(現實)에서 영원한 현실에서 영원한 것을 찾고, 무아(無我) 즉 고정된 실체나 본래의 자기 것이 없는데도 헛되이 집착하므로 말미암아 고통을 낳는 것이다. 사제(四諦:苦.集.滅.道)를 설(設)하는 것은 중생(衆生)으로 하여금 괴로움을 알게 하여, 그 원인을 끊게 하며, 또 ‘멸(滅)’을 동경하게 하고, ‘도(道)’를 닦게 하기 위함이다.
즉, 괴로움을 여의고 즐거움을 얻게 한다. 일체개공(一切皆空)의 이치로 본다면 ‘미(迷)’와 ‘오(悟)’와의 인과를 보더라도 사제의 법도 없게 되는 것이다. 즉, 인간은 괴롭다, 인생은 고해와 같다, 괴로움과 번뇌 덩어리다. 하는 현실을 극복하는 방법과 극복되는 상황은 무엇인가? ‘고(苦)’의 원인이 되는 집착을 제거하는 방법이 바로 ‘도(道)’이며 그 ‘도(道)’의 내용인 팔정도 즉, 올바른 실천을 통해 얻어지는 평안의 경지가 바로 ‘멸(滅)’의 상태이다.
이 팔정도가 중도(中道)의 실천이며 그릇된 견해 극단의 견해를 떠난 바른 견해와 실천을 제시하는 불교의 중요한 가르침이다. 이와 같이 현실과 그 원인, 현실과 극복의 결과 그 결과 등 4가지가 모두 원인과 결과를 이루면서 서로의 인과관계(因果關係)를 이루고 있으니 이는 부처님이 깨달으신 연기의 이치를 중생의 현실에 맞추어 알기 쉽게 설(設)하신 것이라 할 수 있다.
여기에서 사성제(四聖諦)를 상세히 알아두면 이해(理解)하기가 쉽다.
「고제(苦諦)」는 현실의 ‘상(像)’을 나타낸 것이니 현실의 인생은 고(苦)라고 관하는 것.
「집제(集諦)」는 고(苦)의 원인(原因). 고(苦)의 원인(原因)은 번뇌(煩惱)로 특히 애욕(愛慾)과 업(業)을 말함이니, 「고제(苦諦)」와 「집제(集諦)」는 유전(流轉) 하는 인과(因果)이다.
「멸제」는 깨달음을 목표(目標)로 곧 이상(理想)의 열반(涅槃)을 말하는 것이다.
「도제(道諦)」는 열반(涅槃)에 이르는 방법(方法) 곧 실천(實踐)하는 수단(手段)이다.
「멸제(滅諦)」와 「도제(道諦)」는 연기설(緣起說)을 설(設)하고, 「도제(道諦)」는 팔정도(八正道)를 설(設)한 것이다.
고성제(苦聖蹄)란 삼계(三戒)에서 생사(生事)하는 과보(果報)는 ‘고(苦)’이고, 안락할 수 없다는 것이 절대진리(絶對眞理)이다. ‘고(苦)’는 일체의 현실(現實)이 괴로움이라는 진리 즉, ‘고(苦)’는 현실의 괴로움을 나타내는 상태(常態)이다. 그리고 괴로움의 근본 원인은 갈애(渴愛)이다. 탐욕(貪慾)과 탐애(貪愛) 즉 오욕(五慾)에 탐착(貪着)인 것이다.
인생은 괴롭다고 하는 것과 그 괴로움이 어디서 오는 것인가? 사바의 출발점은 ‘고(苦)’다. 그 무대(舞臺)는 바로 나의 육체(肉體)다. 생명(生命)의 조건(條件)이요, 실상(實相)이고 법칙이다.
‘기독교’에서는 태초의 ‘고(苦)’를 선악과(善惡果)에 의한 것이라고 하였으나, 불교에서는 그 원인(原因)이 바로 우리 자신에게 있다는 것이라고 말한다. 얼마나 합리적인 나의 노여움과 욕심(欲心)과 어리석음이여 나의 생명 의식과 나의 정신작용이여. 나 자신도 제도(制度) 못하면서 어찌 중생을 제도할 수 있겠는가? 괴로움을 성스러운 진리라고 하는 것은 괴로움을 여실히 알 때만이 괴로움을 극복할 수 있기 때문이다. 이러한 계기가 출발점이 될 때 비로소 괴로움은 진리가 된다. 몸과 마음이 고통스러운 것은 다 ‘고(苦)’인 것이다. 마음으로 생기는 짜증, 불만, 공포, 초조, 절망, 불안, 고독, 허탈감 등은 정신적인 고통에 속하며, 육체적으로도 불편하고 괴로움을 느끼는 것은 모두 ‘고(苦)’이고, 누군가에게 속을 때 우리들 마음속에는 자기의 욕심이 내재되어 있는 것이다.
즉, 수천만원을 사기(詐欺) 당하였다 했을 때 그보다도 더욱 큰 돈을 얻으려는 욕심(欲心)이 있었기 때문에 크게 낙담(落膽)하고 분하고 원통(怨痛)한 것이다. 이것은 모두 자기(自己)의 욕심으로 인해 스스로 자초(自招)한 것이니 누구를 원망할 것도 없이 스스로의 판단이 잘못되어 욕구(欲求) 충족(充足)에만 급급했다는 사실을 살필 줄 알아야 한다. 인생을 살아가면서 느끼는 것이 이 세상 모든 것들이 내 것인줄 알았는데 막상(莫上) 살다보니 한 점의 흙도 내 것이 아니라는 것을 깨닫게 된다. 이것이 물욕(物慾) 때문이다.
욕망(欲望)은 고통의 뿌리이다. 인생을 지배하는 것이 욕망인데 그 유혹에 빠지므로 흥망성쇠(興亡盛衰)의 괴로운 고통을 당하게 되는 것이다.
부처님이 『우루벨라』 마을에서 흔히 기독교의 ‘산상수훈(山上垂訓)’에 비견되는 이야기로 가섭 3형제가 귀의함으로 약 1,000명에 이르는 비구들을 향하여 다음과 같이 설법하셨다.
『비구(比丘)들아, 모든 것은 불타고 있다. 모든 사물(事物:色)이 불타고 있고, 안식(眼識)이 불타고 있고, 시각(視覺)이 불타고 있다. 괴로움이든 즐거움이든 비고비락(非苦非樂)이든 시각으로 인해 일어난 모든 감각(感覺)이 불타고 있다. 이것들의 탐욕(貪欲)과 성냄과 어리석음이 불로 타고 있다. 또한 그것은 태어남과 늙음과 죽음, 그리고 슬픔과 고통과 비탄(悲歎)과 번민(煩悶)으로 불타고 있느리라.』
『여래(如來)는 이미 삼계화택(三界火宅)을 여의고 고요히 한거(閑居)해서 임야(林野)에 처하니 이 삼계가 다(多) 나에게 있는 바요, 그 가운데 중생(衆生)들은 다(多) 나의 자식이니 지금 이곳에 모든 환난(患難)이 많은 자(者)라도, 오직 나(我) 한 사람이 능히 구호함이라.』
이것은 부처님의 끝없는 자비(慈悲)의 손길임을 우리들은 느끼게 된다.
‘괴로움을 경험(經驗) 해본 사람만이 남의 자식을 가르칠 자격이 있다.’
‘초년고생(初年苦生)은 금(金)을 주고도 못산다.’라는 말이 있듯이 세상물정(世上物情)을 모르고 살아온 사람은 모든 점이 경솔(輕率)하고 천박(淺薄)하기 쉽다. 이 말은 현실의 괴로움을 나타낸 것이다. 요컨대 번뇌의 수풀 위에 뿌리 받고 있는 이 몸이 존재하는 것도 괴로움이다.
일체개고(一切改稿) 즉 존재하는 모든 것은 괴로움이다. 다시 말하면 항상 변화하고 주체가 없는 현상에 중생들은 집착하기 때문에 괴롭다는 것이다. 일체(一切)란 모든 것, 존재(存在)하는 모든 것을 말하는 것으로 부처님께서는 아함경에서 “일체(一切)는 무상(無常)하고. 일체는 괴로움이고, 일체는 무아(無我)이다”라고 하셨다. 모든 존재는 끊임없이 생멸(生滅)하여 변화하고 있다. 이것은 인간에게 괴로운 것이다. 즐거움도 있지만 그것은 일시적인 것이고, 괴로움은 그림자처럼 늘 곁에 있는 것이다.
고(苦:괴로움), 락(樂:즐거움), 사(捨:괴롭지도 즐겁지고 않음) 이 3가지는 모두 무상(無常)하기에 괴로운 것이다.
삼계화택(三界火宅)이란 욕계(欲界), 색계(色界), 무색계(無色界)인 3계가 시끄러운 것을 불타는 집에 비유한 것으로 고뇌(苦惱)가 가득 찬 이 세계를 말하는 것으로서 중생(衆生)의 번뇌(煩惱)가 마치 화염(火焰)에 쌓여 불(火)에 타고 있는 집과 같다는 말이다. 요즈음 세상 돌아가는 형태(形態)가 오탁악세(五濁惡世:命濁. 衆生濁. 煩惱濁. 見濁. 劫濁)의 모습이므로 즉 “불난 집의 심각성(心覺性)을 보여주는 것 같다”는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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