겨울의 장성호에 가면 가슴 한 편이 먹먹한 감동으로 어릿해지곤 한다. 멀리 보이는 방장산과 거울처럼 투명한 장성호가 조화를 이룬 절경 때문만은 아니다. 수많은 사람들의 애환과 그리움, 미처 들어주지 못한 이야기들이 바람으로, 나무로, 호수의 파문으로, 고운 흙으로 남아 있어서다. 그래서일까. 복잡한 마음, 엉킨 생각들을 조용히 풀어내고 싶을 때, 누군가에게 말없이 위로받고 싶을 때 가장 먼저 생각나는 곳이 바로 겨울 장성호다.

장성호관광지 전경

[시사의창 2025년 3월호=송상교 기자] 장성호관광지를 가다
기차를 타고 백양사역에 도착하니 아침 10시쯤 됐다. 백양사역이 있는 북이면은 공기부터 남다르다. 노령산맥, 백암산 등 이름난 명산들이 많고 환경 위해시설이 없어 깨끗한 공기질을 자랑한다.
장성역사를 나와 면소재지를 따라서 10분 쯤 걸으면 북이도서관과 만나게 된다. 낯선 장소에 가면 꼭 그곳의 도서관을 찾는데, 장소와 공간이 주는 특색 있는 분위기를 느낄 수 있기 때문이다. 운이 좋으면 아이들과 지역 주민들의 손길이 담긴 공예품이나 글씨도 감상할 수 있다.
북이도서관은 일단 한옥 형식으로 지어진 도서관의 외양이 마을 분위기와 잘 어울린다. 아기자기하게 꾸며놓은 전시공간과 열람실, 서재도 보기 좋았다. 다만, 일찌감치 꼬마 손님 두서넛이 자리를 잡고 독서삼매경에 빠져 있길래 조용히 둘러보고 나와야 했다.
도롯가를 따라 오밀조밀 어깨를 맞대고 늘어선 작은 가게들과 사거리성당 등을 느긋한 마음으로 둘러보다가 백양사역 앞에서 택시를 타고 장성호관광지로 향했다. 요금은 1만 원이 채 안 된다. 시골에서 개인택시를 탈 때는 복귀할 것을 감안해 미리 명함을 받아두는 것이 좋다.

장성군 장성호 숲길이 전라남도 최우수 숲길에 이름을 올렸다. ‘여름에 걷고 싶은 숲길’에는 총 14개 숲길이 응모했다. 도는 전문가 심의를 거쳐 5개 숲길을 우수 숲길로 선정하고, 장성호 숲길에 ‘최우수’ 평가를 부여했다.사진은 옐로우 출렁다리


‘내륙의 바다’ 장성호
장성호는 1976년 농업용수 공급을 위해 만들어진 인공호수다. 풍경도 아름답지만 그보다 먼저 눈에 띄는 건 규모다. 장성군이 호수 전체를 에워싸며 걸을 수 있도록 조성 중인 ‘수변백리길’ 길이가 무려 34km에 이른다. ‘내륙의 바다’라는 별칭이 괜히 붙었을 리 없다.
봄에서 가을까지는 이 수변길을 찾는 사람들이 꾸준한 편이다. 장성댐에서 시작하는 출렁길과 숲속길은 걷기에도 좋고 코스 길이도 적당해 인기가 높다. 출렁길의 경우, 중간에 두 개의 출렁다리를 건널 수 있어 색다른 재미를 선사한다.
장성군은 추후 호수를 가로지르는 400m 길이의 세 번째 출렁다리를 조성할 계획이다. 앞서 조성된 출렁다리가 154m니 두 배 이상 크다. 횡단 출렁다리를 완성하면, 호수 왼편 출렁길과 오른편 숲속길이 연결돼 새로운 트래킹 코스가 생겨나게 된다.
필자가 방문한 장성호관광지는 출렁다리 방면 장성댐과는 정 반대 방면인 북쪽에 위치해 있다. 문화·예술의 향취를 제대로 만끽할 수 있는 보물 같은 장소다.
장성호관광지에 도착하면 우선 대한민국을 대표하는 거장 임권택 감독의 동상이 시선을 사로잡는다. 잘 알려지지 않았지만 임권택 감독은 장성 사람이다. 본적은 장성 남면 삼태리고, 장성읍 단광리에서 유년시절을 보냈다. 1962년 ‘두만강아 잘있거라’부터 2014년 안성기 주연의 ‘화장’까지 102편의 영화를 연출한 ‘한국영화의 산증인’이다. 장성호관광지에는 그의 업적을 기리는 ‘임권택시네마테크’가 있다.

장성호 문화예술공원 입구에서 바라본 장성호


영화감독의 토양
장성호예술공원으로 향하는 오르막길을 걸으면 왼편으로 ‘임권택시네마테크’ 입구를 찾을 수 있다. 건축연면적 1171㎡에 전시홀과 상설전시홀, 기획전시실, 임권택영화관이 들어서 있다. 많은 사람들이 임권택 영화 하면 ‘서편제’, ‘태백산맥’ 같은 한국적이면서 다소 묵직한 주제를 지닌 영화를 떠올릴 것이다. 이에 대해 임 감독은 “영화감독이란 자기가 태어나서 자란 곳으로부터 도망갈 수 없다”고 했다. 전시공간에 쓰여 있는 그의 말을 빌리면 “영화감독에게도 자기가 태어나고 자란 토양과 같은 그곳에서의 삶이 영화의 토대로 작용한다”고 한다. 줄곧 ‘한국적인 것’에 천착해 온 그의 작품세계를 이해할 수 있는 대목이다.
잘 짜여진 전시공간은 만족스럽지만, 커피 한 잔 마시며 잠시 쉬어갈 만한 곳이 없다는 점은 아쉬웠다. 무인 커피숍과 안락한 의자, 테이블, 감상을 방해하지 않는 수준의 경음악 정도만 준비해도 ‘임권택시네마테크’를 찾는 이들의 만족도가 크게 올라갈 듯싶다.

장성호예술공원 내에 위치한 임권택시네마테크
임권택시네마테크 내 전시실


장성호 문화예술공원
시네마테크를 나오니 상쾌한 산바람이 와락 안긴다. 백양사역에 도착했을 때만 해도 옷깃을 여며야 할 만큼 차가웠던 공기가 어느덧 포근하게 바뀌어 있었다. 이제부터 둘러볼 곳은 ‘장성호 문화예술공원’이다.
‘장성호 문화예술공원’에는 시·서·화 등 100여 점의 예술작품이 전시되어 있다. 길 따라서 동그랗게 원을 그리며 공원을 둘러보면 발걸음 옮길 때마다 마음을 사로잡는 작품과 글들을 만나게 된다.
가장 인상깊었던 작품은 박생광(1904~1985)의 ‘금산사의 추녀’다. 강렬하면서도 과감한 색채의 사용, 그리고 여인의 눈빛이 마치 천경자 작품에게서 느꼈던 충격과 견줄 만했다.
박생광 작가는 17세부터 일본에서 유학하며 미술을 공부했다. 광복 이후 한국에서 작가로 활동하고자 했지만, 일본 화풍을 배척하는 분위기가 팽배해 은둔할 수밖에 없었다. 1967년 천경자의 소개로 홍익대학교와 경희대학교에 출강하며 미술활동을 본격화했다. 이후 70년대 후반부터 샤머니즘, 불교 설화 등 전통성을 주제로 작품활동을 펼쳐 세계적으로 주목받았다. ‘금산사의 추녀’는 1983년작으로 그의 화풍이 절정에 이르렀을 때의 작품이다.
‘금산사의 추녀’에게서 느꼈던 흥분을 곱씹으며 발걸음을 옮기니 익숙한 명화들이 조각작품 속에 폭 안겨 있다. 마티스의 ‘루마니아풍 블라우스를 입은 여자’, 고흐의 ‘해바라기’, 세잔의 ‘사과 바구니가 있는 정물’ 등이 감상의 재미를 더했다.

북이도서관 전경. 고즈넉한 한옥풍 건물이 마을 분위기와 잘 어울린다 (3)
유네스코 세계유산 장성 필암서원
장성호 문화예술공원 내 전망대



“해를 삼켰던 옛꿈”
미술작품에 녹아 있는 ‘글’도 감동을 준다. 명시들이 많지만, 특히 장성 출신의 독립운동가 기삼연 선생을 기리는 조각상은 그 앞에서 한동안 자리를 뜰 수 없었다. 기삼연 선생은 장성에서 의병을 조직해 일본군에 맞서 싸우다가 1908년 광주에서 총살당했다. 작품 속 “의병을 일으켜 이기지 못하고 몸이 먼저 가니, 해를 삼켰던 옛꿈 또한 허무하구나”라는 글귀는 기삼연 선생이 죽음을 맞이하기 직전 옥중에서 남긴 전언이다.
‘해를 삼킨다’는 건 일본을 이긴다는 의미로 해석된다. 장성읍 장성공원에 있는 ‘호남창의영수기삼연선생순국비’ 뒷면에도 이와 같은 내용이 새겨져 있다.
전망대 부근, 하서 김인후 선생(1510~1560)의 ‘절로가’도 눈에 띄었다. ‘청산도 절로절로’로 시작하는 ‘절로가’는 선비의 여유와 기품을 느낄 수 있는 짧은 시조다. 하서 선생은 장성이 낳은 조선시대 대표 성리학자다.
하서 선생 하면 빼놓을 수 없는 곳이 있다. 바로 2019년 유네스코 세계유산에 등재된 장성 필암서원이다. 하서 선생의 학업과 덕망을 기리기 위해 그의 사후 30년 뒤에 세워졌다. 오늘날에는 고유의 선비문화를 체험하고, 국악 등 다양한 장르의 문화공연과 접목을 시도하는 교류의 장으로도 기능한다.

북상면 수몰문화관 내부
북상면 수몰문화관


닿을 수 없는 고향의 기록
장성호 문화예술공원을 나와 다음으로 향한 곳은 ‘북상면 수몰문화관’이다. 장성호 자리에는 과거 북상면이라는 마을이 있었다. 장성댐 공사로 인해 폐면된 1975년 이전까지 5800여 명이 거주했다. 당시 기준으로 장성에서 다섯 번째로 큰 면이었다.
수몰문화관에 가면 당시의 흔적들을 고스란히 느낄 수 있다. 먼저, 1층 전시관 우측 북상면 마을 사람들의 흑백사진이 먹먹한 감동을 전한다. 이어서 왼편으로 수몰 전후의 신문기사들이 빼곡하게 자리를 차지하고 있다. 마을 사람들이 사용하던 농기구와 북상면에서 채집한 곤충들도 눈길을 끌었다.
예전에는 댐 공사를 할 때 수몰될 마을을 철거하지 않고 그대로 뒀다고 한다. 그래서 지금도 물이 가물 때면 과거 북상면의 모습이 장성호에 언뜻 드러나곤 한다. 문순태 작가는 우연히 찾은 장성호를 배로 건너다가 수중에 잠긴 마을 모습을 보고 큰 영감을 받아 ‘징소리’라는 소설을 집필했다.
수몰문화관에는 문순태 작가의 ‘징소리’ 집필에 얽힌 이야기와 작가가 직접 북상면에서 가져와 소장하고 있던 징이 전시되어 있다. 수몰문화관이 건립될 때 기증했다.
코너를 돌면 북상초등학교 졸업생들의 기념사진과 당시 교실 풍경을 재현해 놓은 공간이 있다. 책상 위에 펼쳐진 교과서 역시 1973년에 편찬된 ‘진짜’였다. 북상면 사람들이 수몰된 고향을 얼마나 그리워하며 이곳을 채워갔을지 상상하니 가슴 한 편이 저릿했다.

장성군이 장성호관광지에서 2026년부터 '장성 원더랜드 프로젝트'를 추진한다


장성 원더랜드 프로젝트
장성군이 장성호관광지에서 2026년부터 '장성 원더랜드 프로젝트'를 추진한다
임권택시네마테크와 문화예술공원, 수몰문화관 그리고 산맥에 둘러싸인 장성호가 있는 장성호관광지는 장성에서 첫손에 꼽히는 예술향유공간이다. 그러나 조성된 지 20년이 지나며 어쩔 수 없이 시설 노후화를 겪고 있다. 전망대와 공원 산책로 등을 부분 정비하긴 했지만 요즘 관광 트렌드에 부합하는 과감하고 새로운 변화가 필요한 시점이다.
지난해 11월, 장성군은 ‘전남형 균형발전 300 프로젝트’ 공모사업에 선정되며 장성호관광지의 대변신을 예고했다. ‘전남형 균형발전 300 프로젝트’는 300억 원을 투입해 미래 성장동력을 육성하는 전라남도 지역균형발전사업이다.
장성군은 장성호관광지를 사계절 관광명소로 만드는 ‘장성 원더랜드 프로젝트’를 제안해 최종 선정되는 성과를 냈다. 원더랜드(wonderland)는 ‘동화 속 상상의 나라’라는 뜻이다.
도·군비 포함 사업비 300억 원을 확보한 장성군은 오는 2026년부터 장성호관광지 일원에 예술공원, 복합문화공간, 어린이 테마파크, 반려동물 테마파크, 숙박공간 등을 조성할 예정이다. 자이언트트리, 에어바운스 등 볼거리와 즐길거리를 갖춰 차별화된 관광체험을 선사한다.
특히, 예술공원에는 ‘임권택시네마테크’를 중심으로 한 다채로운 영화 콘텐츠가 조성될 계획이어서 기대를 모은다. 홀로그램과 조명을 활용한 환상적인 야경도 연출한다.
김한종 장성군수는 “시설 노후화로 방문객 발길이 줄어들고 있던 장성호관광지가 ‘원더랜드 프로젝트’를 통해 사계절 핫플레이스로 거듭날 것”이라며 “지역의 역사성과 고유성을 반영해 차별화된 관광 콘텐츠를 선보일 수 있도록 최선을 다해 준비하겠다”고 말했다.

북이면 사거리전통시장


북이면의 자랑 ‘사거리 전통시장’
매달 1일과 6일, 장성군 북이면에선 ‘사거리 전통시장’이 선다. 대형마트의 영향으로 규모가 예전 같지 않지만, 이럴 때일수록 자주 기억하고 이용해 주는 것이 명맥을 살리는 데 동참하는 길이다.
사거리시장의 또 다른 매력은 ‘음식’이다. 시장 내에 있는 음식점들이 하나 같이 맛집이라 어디를 들어가도 실패하지 않는다. 방문객들에게 가장 인기 있는 곳은 ‘강마루돈가스’다. 셰프 출신 사장님이 손맛을 발휘해 만드는 돈까스는 옛날에 먹던 바로 ‘그 맛’을 제대로 만끽하게 해준다. 에피타이저로 나오는 단호박스프도 입맛을 돋우기 좋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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