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렴풋한 역마살이 다시 돋았다. 충동적으로 일본 도쿄행 항공권을 구입했다. 주로 해외에서 그림전시가 열렸던 간사이 지역의 방문은 진정한 의미의 여행이라기보다 일이라는 것이 끼워져 있어서 긴장감도 없지 않았다. 이번만큼은 모든 것에서 자유롭고 싶어 목적지를 도쿄로 정했다. 도쿄는 오랜만이다. 일본이라는 이웃나라에 대해 이야기 하자면 정치라는 것이 개입되면 싫은 것은 사실이다. 한일전 축구라든지. 배구, 기타 그 외에 많은 것들은 우리나라가 이기길 열심히 응원한다. 그러나 휴머니즘을 우선으로 챙겨야 하는 예술가의 직업은 그런 정치적인 이유를 배제하고 쉽게 접근할 수 있는 이웃나라로서 그들의 문화, 혹은 풍경들을 그림에 넣어두는 일들은 정치의 손익을 떠나 소소한 즐거움이 된다.
<도쿄 타워가 보이는 롯본기에서> 이두섭
[시사의창 2025년 2월호=이두섭 작가] 어렴풋한 역마살이 다시 돋았다. 충동적으로 일본 도쿄행 항공권을 구입했다. 주로 해외에서 그림전시가 열렸던 간사이 지역의 방문은 진정한 의미의 여행이라기보다 일이라는 것이 끼워져 있어서 긴장감도 없지 않았다. 이번 만큼은 모든 것에서 자유롭고 싶어 목적지를 도쿄로 정했다. 도쿄는 오랜만이다. 일본이라는 이웃나라에 대해 이야기 하자면 정치라는 것이 개입되면 싫은 것은 사실이다. 한일전 축구라든지. 배구, 기타 그 외에 많은 것들은 우리나라가 이기길 열심히 응원한다. 그러나 휴머니즘을 우선으로 챙겨야 하는 예술가의 직업은 그런 정치적인 이유를 배제하고 쉽게 접근할 수 있는 이웃나라로서 그들의 문화, 혹은 풍경들을 그림에 넣어두는 일들은 정치의 손익을 떠나 소소한 즐거움이 된다.
발길 닿는 대로 다니는 무계획적인 여행보다 이번엔 일본에서 공부를 하고 있는 사람과 만나기로 약속도 하고 현지 화가가 알려주는 화랑 밀집지역에도 가기로 하였다. 나리타공항으로 향하는 탑승구의 입구에 앉았다. 어차피 탑승을 완료해야 출발이라는 생각에 일찍 서두르지 않고 어수선하고 복잡한 기내에 보다 모두의 입장이 완료하기 직전에 탑승하려 한다. 주변 경치를 관찰하고 있었다. 인천공항 제2터미널을 이용할 기회가 많지 않아서 약간 낯섦이 있다 . 옆의 사람이 큰소리로 통화하고 있다. 귀는 열지 않았어도 근처 사람까지 들리게 하는 것은 자제하면 좋겠다는 생각을 한다. 그는 상대방과 일본을 간다는 이야기를 했다. 통화 상대는 왜 가느냐고 묻는 모양이다. 그냥 간다고 하였다. 이제 이웃나라 일본은 그냥 가는 곳이 되었다.
<긴자 오쿠노 빌딩 화랑 밀집지역 실내> 이두섭
혹자는 제주도 갈 바에야 일본을 간다 한다. 그 이유는 제주도의 고물가 때문이라 하였다. 그도 그럴 것이 무언가 같은 돈을 쓰더라도 지역의 정서나 물가의 차이로 약간은 서운할 수도 있겠지. 2시간 30분 정도의 비행을 마치고 나리타공항에서 입국 수속을 마쳤다. 신주쿠로 가는 특급 열차를 타고 늦은 시간 도착한 신주쿠 역 주변에는 평소와 다르게 한가했다. 언제나 꽉 찬 행인들로 번잡한 역 안과 거리였었다. 왜 이렇게 한가한 걸까. 약간은 평소와 다른 풍경이 낯설다. 늦은 도착에 배가 허기 때문에 식사를 하려고 천천히 걸어 신주쿠의 밝은 골목길로 들어섰다. 본국인보다 여행자인 외국인이 많은 듯 느껴진 신주쿠. 오래 전에 작품 전시를 위해 방문했다가 전시가 취소되는 바람에 약간은 쓸쓸한 마음으로 걸었던 신주쿠 골목길이었다. 그때의 허탈한 마음이 되살아났다. 세상이 녹녹치 않음을 느낀 어린 시절의 기억이다. 늘 패기가 넘쳐 그림에 관한 일이라면 어떤 것이든 닥치는 대로 해결하던 시기. 한쪽 구석에 앉아 담배를 피우며 마음을 달랬지. 가부기초 거리를 걸었다. 이곳은 환락의 정점인 듯한 느낌을 받을 만큼 화려하다.
다음날 일찍 길을 나섰다. 신요코하마에서 사람을 만나 요코하마로 가기로 한 날이었다. 특별히 같이하는 동행보다 얼굴 보며 식사하고 나는 나대로의 길을 가려고 나선 길이다. 요코하마는 인구수가 삼백팔십만 명에 가깝고 국제 항구인 점으로 외국인의 수가 10만 명 정도를 차지한다고 한다. 65세 이상의 고령인구도 4명중 1명인 요코하마. 이곳 요코하마만을 빠져 나가면 태평양과 잇닿아져 있다. 국제 여객선 터미널에 설치되어 있는 인공 테크를 거닐면서 그곳의 끝에서 망연히 바다를 바라보았다. 태평양으로 향하는 바다는 어디인가. 바다를 눈으로 더듬는다. 그 끝에 있는 희미한 풍경들. 그곳엔 무엇이 있고 무슨 이야기가 오가고 있을까. 먼 곳에서 바라보는 풍경은 객관화되어 아무런 의미가 없다. 마찬가지로 이 자리에서 느끼거나 오가는 사연들도 저쪽에서 본다면 아무 의미가 없겠지, 그런 거지. 서로 관계하지 않는 삶들은 아무 의미가 없음에도 불구하고 오로지 나만이 중요할 뿐일 걸. 시야를 넓게 갖는 것이 중요하겠다는 생각.
<미술관 가는 길> 이두섭
다음 날 롯본기에 있는 모리 미술관을 방문하였다. 루이즈 부르주아(Louise Bourgeois, 조각가, 설치 미술가)의 전시가 열리고 있었다. 그녀 작품의 시그니처는 모성으로 상징되는 거대 거미의 크로테스크한 조각이다. 그러나 그것은 하나의 상징일 뿐, 생각보다 많은 여러 종류의 작품들을 제작하였다. 친부의 여성 편력으로 암울한 어린 시절을 보낸 작가의 작품들은 어두움을 담아내었고 그것을 통해 고백예술(confessional art)이라는 분야를 만들어 냈다. 구석에 앉아 그녀의 작품에 대한 메모를 하고 있었는데 한직원이 다가와 볼펜 사용을 금지한다고 말하면서 그곳에서 사용하는 연필을 주었다. 같은 필기도구인데 왜 사용을 금지할까를 궁금해서 물어 보았다. 작품훼손을 방지하기 위해서라고 했다. 수긍이가는 친절한 설명. 그들의 지시에 따라 나는 그녀의 어두운 작업의 한편에서 글로 그녀의 세상과 만나는 시간을 갖게 되었다. 루이즈 부르주아의 작품을 감상하고 긴자의 화랑 거리를 방문하려 길을 나섰다. 멀리 바라다 보이는 건물 사이의 도쿄타워. 많은 영화들의 화면에 가끔씩 보이는 철제 탑은 도쿄의 스카이 라인의 핵심이기도 하다. 긴자로 가는 지하철에서 나의 발끝을 무심히 바라본다. 하얀 운동화에 검은 때가 묻었군. 스스로에게 밀려오는 아련한 자기애. 나는 살아있구나. 아침마다 잠을 깨면서 오늘도 살아나갈 수 있겠구나 하는 막연한 희망과 일치하는 감정이다.
가끔 메신저를 통해 연락을 주고받는 일본인 화가에게 한 지역을 방문해 보라는 권유를 받은 적이 있다. 긴자의 중심거리에서 두 블록정도 들어가 위치하는 아주 오래된 6층 아파트인데 층별로 10여개 정도의 방들을 화가들이 입주해서 작업 하거나 화랑으로 운영 되는 곳이라 했다. 한 층씩 걸어올라 가면서 각 실을 기웃거렸다. 형식화가 완전하지 않은 이런 곳에서 느껴지는 것은 “살아 있음”이다. 금방 잡은 물고기의 파닥거림 같은 생에 대한 몸부림, 혹은 날것의 감성이 그대로 살아있는 풍만함이다. 이런 느낌들이 미래의 대가를 준비하는 출발점일까. 대체적으로 예술 분야는 완숙되어 있지 않은 약간은 서투름에서 그것의 가능성을 보게 된다. 그런 것들이 예술의 심장에서 힘 있게 박동하고 있으며 활기차게 움직이고 있다는 느낌이다. 그런 것들이 나의 그림 앞에서 나를 움직이게 하고 두근거리게 한다. ‘살아 있음’을 느끼게 해준 이번 여행. 내안의 또 다른 나를 꺼내 보는 시간이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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