해산토굴에서 본 득량 앞바다
[시사의창 2025년 2월호=김차중 작가] 한승원 선생의 해산토굴 그리고 득량
나는 보성에서 장흥을 가는 관문을 소등섬이라 여겼다. 그런데 한강 작가가 노벨문학상을 수상하고 그의 부친 한승원 소설가가 조명되면서 장흥의 관문은 선생님의 집필 공간인 “해산토굴”이 있는 마을로 정했다. 해산토굴로 가는 길은 해산토굴만을 가기 위함이 아니다. 해송 숲 사이의 ‘한승원 문학 산책로’를 걸을 수 있고 선생님의 소설 지분 80%를 가지고 있다는 득량 앞바다를 볼 수도 있기 때문이다. 운이 닿으면 해산토굴 앞 작은 마을의 골목길에서 보면 선생님의 시화가 그려있는 벽화를 만날 수 있다.
담벼락의 시화를 보고 있는데 지팡이 소리가 가까워졌다. 한눈에 선생님을 알아차리고 덥석 인사를 올렸다. 동네 일대를 둘러 소개해 주셨다. 해산토굴은 선생님이 글을 쓰는 곳이고 아래 달 긷는 집은 선생님의 자료와 문학 수업을 하는 곳이라고 설명을 들었다.
해산토굴 법문1호
골목에 들어섰다. 찾기 어렵다는 시화가 그려있는 푸른 벽화가 나타났다. 사실 이 벽이 있는 집은 선생님의 거처다. 안양면 사촌리 율산마을에 집과 가까운 곳으로 해산토굴이라는 집필 공간을 마련하셨다. 해산토굴 아래에는 ‘달 긷는 집’은 선생님께서 문학을 가르치는 곳인데 선생님의 문학의 일대기가 보관되고 있는 곳이기도 하다. 진리와 지상의 예술적 경지가 선생님이 길어 올리려 하는 두 개의 달이다. 달 긷는 집에서 부녀간의 사진을 발견하였다. 미소와 닮음에 축복이 깃든 사진이다. 아버지의 성정과 모습이 가장 닮았다는 한강 작가이다. 나는 두 분이 두 개의 달인 것 같다. 마당에는 타원형의 돌이 있다.
아침을 이기는 것은 무엇일까
한승원 선생님이 키우는 돌이다. 아침마다 돌에 물을 주며 돌이 자라기를 기다리신다. 어렸을 적 선생님의 아버지께서 착하게 살면 돌이 자란다고 말했다고 한다. 달 긷는 집 위에는 해산토굴이 있다. 선생님의 호 ‘해산’에 토굴을 붙인 것인데 토굴은 도량을 낮추어 이름을 붙인 것이다.
해산토굴
해산토굴에 들어서기 전 길가에 글 쓰는데 양해를 구한다는 비문이 법문처럼 세워있다. 집필실에 계시지 않겠지만 그래도 조심스럽게 앞마당을 둘러본다. 토굴 입구의 나뭇가지가 토굴처럼 터널을 이루고 있다. 선생님의 의자에 앉아도 보고 마당에서 가장 아끼신다는 공작단풍에 손을 대보고 또 그 아래 이끼처럼 자라난 행운초도 쓰다듬었다.
수평선
불탑 아래 선생님이 지은 <나무>라는 시와 부인 임감오 선생님의 글귀가 정답다. 문을 나서자 득량의 바다가 펼쳐 보인다. 선생님이 걸어간 길을 따라 내려간다.
진목마을 교회
천년학이 노닐던 곳 이청준 마을
장흥군 회진면 진목리 소설 <서편제>를 쓴 이청준 소설가가 초등학교 때까지 머물었던 생가를 찾았다. 초등학교 진학이 다른 학생에 비해 3년이나 늦었는데 이는 불우한 가정생활의 탓일 것이다. 여섯 살 때 남동생이 홍역으로, 일곱 살 때 큰형이 폐결핵으로 그리고 여덟 살 때 아버지가 돌림병으로 돌아가셨다.
길안내 해준 임성철 님과 그의 집
초등학교 교장선생님 강봉우의 도움으로 광주 서중에 입학하는데 친척 집의 도움을 받아 생활한다. 그때부터 이청준은 오랫동안 고향을 찾지 않다가 1979년 무렵, 비로소 <서편제>를 쓸 무렵부터 고향에 자주 내려온다. 어릴 적 아픔만 주었던 고향을 외면했던 것이었을까? 1948년 중학교 진학 때 고향을 떠났으니 30년이 넘어서야 고향에 들른 것이다. 진목리 일대는 <서편제>, <선학동 나그네> 등의 배경이 된 곳이며, 이 외에도 많은 작품들이 이곳의 일화나 소설의 무대로 등장한다. <선학동 나그네>는 임권택 감독의 영화 <천년학>의 원작이다. 또한 감성 여행지로 잘 알려진 이곳에서 멀지 않은 소등섬은 그의 소설을 영화로 만든 <축제>의 배경이 된 곳이다.
골목길과 표지판
시골길을 달려 산골 깊숙이 자리 잡은 진목리로 향했다. 내비게이션도 그의 집을 찾느라 헤매고 있다. 길에 지나다니는 사람이라도 있으면 물을 텐데 아무도 없다. 한참을 헤매다 마을 위쪽으로 교회가 보였다.
‘저곳에서는 사람을 만날 수 있겠지’
교회로 향했다. 동네의 규모에 비해 커다란 교회 역시 아무도 없었다. 마당에 주차하고 아래 골목으로 내려갔다.
축대로 쌓아 올린 바위에 진목1길 10-12라고 검정 락카로 칠해져 있는 주소가 보인다. 임성철 어르신이 축대 위로 모습을 드러내었다. 어르신의 이름 역시 주소 아래 커다랗게 검정 페인트로 적혀있었기 때문에 이름을 알 수 있었다. 인사 후 나의 용무를 여쭈었다.
이청준생가
“이청준 선생님 생가가 어디쯤인가요?
불편한 한쪽 팔을 부여잡고 내가 있는 쪽으로 나오신다. 저 아래로 가서 우측 좌측을 여러 번 말씀하신다. 명확한 설명이었지만 초행인 탓에 확실히 알아들을 수는 없었다.
아랫길로 향했다. 어딘가 담벼락 너머로 거칠게 짖는 견공의 소리가 들린다. 이정표가 나타났다. 40m. 점점 견공의 짖는 소리와 가까워진다. 20m. 울부짖음이 선명해진다. 이청준 선생의 생가는 견공의 집과 등을 마주하고 있었다. 마을에 들어서서 선생의 집을 찾지 못하면 견공이 짖는 소리를 따라 찾을 수도 있겠다는 생각이 든다. 그 견공이 살아있는 한.
이청준 생가에 걸린 선생님 사진
기와지붕의 생가 사진을 본 적이 있는데 초가지붕으로 바뀌었다. 건물의 형태는 예전의 사진과 그대로다. 마루에 올라 방안까지 들어가 볼 수 있다. 사진과 자료가 벽면에 가득하다.
문풍지로 비치는 햇살, 뒤뜰과 부엌, 그리고 마당가의 잡초와 화초, 장독대. 오랜 시간 동안 고향집을 찾아오지 못했지만 선생의 기억 속에서 촛불처럼 떠오르는 하나하나가 모두 그리운 것들이었을 것이다. 선생이 한때는 부끄러웠던 고향, 그렇기 때문에 찾지 않았고, 평생을 원죄 의식으로 삼았던 고향이다. 싫든 좋든 고향은 그의 소설의 많은 소재가 되었고, <당신들의 천국>, <남도 사람> 등에서 고향을 외면했던 개인적 죄의식과 부끄러움을 많은 소설 속에 담아냈다.
2007년 소천하시기 1년 전이자 폐암 투병 3년 후 선생의 마지막 소설집 <그곳을 다시 잊어야 했다>에 수록된 김윤식 문학평론가의 발문
“하늘과 땅이 아득하여 앞이 보이지 않을 때 제일 먼저 보고 싶은 것의 하나가 이청준 씨 소설이오.”
라는 문구가 이 생가의 한쪽에 걸려 탄식처럼 메아리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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