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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사의창 2025년 2월호=김향란 칼럼니스트] 흔히 하양은 순수함, 깨끗함, 창백함, 무결점의, 완벽함, 순결함 등을 상징한다. 그러나 자연은 한가지만을 의미하지 않음을 우린 이미 알고 있다. 다소 이분법적 사고일 수 있겠지만 한편으론 그러한 단순한 사고의 논리가 더 정확하게 판단의 기준이 되기도 한다. 앞의 칼럼에서 색의 상대성에 이야기했고, 이중성에 대해서도 피력한 바 있다. 일반적으로 검정과 하양을 동시에 놓고 보았을 때 검정의 무게감으로 인해 하양을 공격한다고 생각한다. 그러나 하양은 검정을 누를 수 있는 카리스마와 공격성을 숨기고 있음이다. 태양을 보라. 밝게 빛나는 빛은 어둠을 삼키고 몰아낸다. 그렇듯 하양은 배경으로써 아닌 공간과 대상의 존재감을 압도하고 경계를 설정하고 강렬한 메시지를 전달하는 색이다.
모든 색의 집합이면서 동시에 아무 색도 없는 듯 보이는 하양은, 하나의 현상 속에 ‘있음’과 ‘없음’이라는 양면적 의미를 담아낸다. 독일의 철학자 마르틴 하이데거(Martin Heidegger)가 “자신의 존재 가능성을 문제 삼는 존재자(Dasein)”를 논하며 중요하게 다뤘던 ‘빈공간(공백)’의 개념과 맞닿아 있다.
하이데거가 말하는 ‘빈공간’은 단지 아무것도 없는 결핍 상태를 의미하지 않는다. 오히려 그것은 존재자가 드러나고 머무를 수 있도록 터를 마련해 주는 ‘열린 장(場)’이다. 하양 역시 모든 색의 가능성을 잠재적으로 함유하고 있으면서도 동시에 ‘무색’으로 인식될 수 있는 역설적 속성을 지닌다. 하양 종이 위에서는 어떤 색이든 그 형태와 빛깔을 제대로 드러낼 수 있고, 동시에 아무것도 그리지 않은 상태에서는 ‘텅 비어 있다’는 인상을 준다. 바로 이러한 ‘하양’의 양면성이, 하이데거가 말하는 빈공간의 존재론적 의미와 상통한다.
하이데거에게 존재자(Dasein)는 자신에게 스스로 물음을 던질 수 있는 유일무이한 존재자로서, ‘무엇이 될 수 있는지(가능성)’를 열어 두는 존재론적 구조를 지닌다. 이때 세계는 존재자와의 관계 속에서 의미를 부여할 수 있는 ‘열린 장’으로 작용하는데, 이를 ‘Lichtung(숲의 트임 또는 숲속의 공터, 광명(光明), 밝히기 등으로 해석)’, 곧 ‘열림’으로 설명하기도 한다. 이 열림은 곧 ‘빈공간’이나 ‘공백’과 다르지 않으며, 하양이 모든 색을 품을 수 있는 배경이자 여백인 것처럼, 존재자들이 드러날 수 있는 기반을 마련해 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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결국 ‘하양’이라는 색이 함축하는 존재와 부재의 중첩은 단순히 시각적이거나 물리적인 현상만이 아니다. 그것은 하이데거가 강조한 존재자(Dasein)의 열림과 빈공간의 의미를 상징적으로 보여준다. 무색을 통해 모든 색이 가능해지듯, 텅 빈 공백을 통해서만 새로운 존재자들이 모습을 드러낼 수 있다. 그리고 이러한 열림을 스스로 인식하고 탐구하는 존재자가 바로 ‘자신의 존재 가능성을 문제 삼는 존재자’, 존재자(Dasein)인 것이다.
칸트(Immanuel Kant)의 순수 이성은 인간이 도달하고자 하는 이상적 판단의 기준이면서도, 현실에서는 결코 쉽사리 완전히 실현될 수 없는 목표다. 이를 은유하는 색인 ‘하얀색’ 역시 두 얼굴을 지닌다. 한편으로는 어떠한 색에도 물들지 않은 ‘무결점의 상징’이지만, 다른 한편으로는 그 결백함을 유지하기 위한 강한 통제와 배타적 태도를 유발할 수 있다.
궁극적으로 우리는 흰색의 양면성을 인식하고, 순수함이라는 이상 속에 내재된 배제와 억압의 가능성에 대해 비판적으로 성찰할 필요가 있다. 칸트가 말한 ‘순수 이성’도 마찬가지다. 그것이 윤리와 인식의 보편 기준을 지향하면서도, 실제로는 늘 다양한 조건과 맞물려 작동해야 한다. 흰색이 모든 색을 ‘덮어버리는’ 지배가 아니라 ‘포용하는’ 다원성의 열린 장이 될 때, 비로소 순수함은 억압의 상징이 아닌 진정한 비판적·창조적 가능성의 원천이 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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