재조지은이라는 말을 아시는지? 재조지은은 사자성어로만 풀이하면 ‘다시 만든 것에 대한 은혜’라는 말이고 부연하여 설명하면 ‘명나라가 왜국의 침략으로부터 조선이라는 나라를 다시 만든 은혜’라는 뜻이다. 성리학의 원조 나라이자 조선의 상국인 한족의 나라 명나라는 진심으로 조선을 위하여 임진왜란에 참전을 하였을까? 그들이 왜와 전쟁에 가장 큰 승전의 원인일까? 임진왜란을 연구하는 학자들의 견해는 상당히 다르다. 끈질긴 의병 활동, 이순신 장군의 남해, 서해에서의 연전연승, 시간이 지나면서 조선군의 전투 능력 향상도 무시할 수 없다는 의견 등이 있다. 1945년 8.15 해방 이후 대한민국에서 미국은 어떠한가? 해방 이후 1948.8.15까지 남한은 3년간의 미군정이 있었고 북한은 소련의 군정 아래 있었다. 1950년 6.25 동족상잔이 일어나고 미국의 주도로 UN의 16개국이 한국전쟁에 참전하였다.
4·19 혁명 당시 시민들의 모습. ©전남대학교5·18연구소
[시사의창 2025년 2월호=민관홍 궁 해설사] 들어가는 글
한국전쟁은 16개국의 UN군과 국군이 인민군과 중공군과 맞서며 3년간 소모적이고 지리한 공방전 끝에 휴전되었다. 미국은 부산까지 밀려난 이승만 정권을 구출하였다. 이의 주도적 역할을 한 미국은 과연 대한민국을 구한 재조지은의 나라인가? 조선과 필리핀의 식민화를 위한 일본과 미국의 카쓰라/태프트의 밀약, 미군정 시기 친일파 청산의 방해와 친일파의 등용, 독립지사들의 사회주의적 성향과 민족주의적 성향에 대한 미국의 경계와 우려는 그들의 정부 참여를 막았고 이승만 정권의 독립지사 암살의 묵인 등이 있었다. 4.19로 자유당 정권이 물러나고 군사쿠데타로 정군을 잡은 박정희 정권의 승인, 5월 광주항쟁을 총칼로 탄압한 전두환 정권의 묵인 등은 미국이 자유, 민주적인 한국과 민주적이고 민족적인 인사들의 정권이 들어서는 것을 꺼려하는지? 의심이 들게 하였다.
임진왜란과 명나라에 대한 조선의 재조지은
임진왜란과 정유재란이 끝나고 선조는 왜란의 공을 세운 사람들의 포상을 하였다. 포상의 우선 기준은 전국각지에서 일어나 전 재산과 목숨을 바쳐 싸운 의병들도 아니고 남해와 서해를 지킨 이순신 장군도 아니었다. 우선순위는 선조를 끝까지 호종하였던 호종 공신이었다. 김덕령 장군은 이몽학의 난에 연루됐다는 모함으로, 임진강 해유령 전투(임란 최초의 육전 승리)의 승장 신각 장군은 항명으로 조선 정부에 억울한 죽임을 당하였다. 이순신 장군 또한 원균의 모함과 선조의 견제로 옥에 갇혔다가 원균의 부산 칠천량 해전에서 조선 수군 완전 궤멸 이후에야 백의종군으로 서해로 가게 되었고 명량에서 13척으로 나라를 구하였다. 명나라는 임란이 발발하기 전부터 왜나라가 조선을 거쳐 명나라를 침략하러 온다는 정보를 알고 있었다. 심지어 명나라는 임란 초기에 조선이 너무나 쉽게 왜나라에 영토를 침탈당하자 정명가도(명을 치러가니 조선은 길을 터줘라.)라는 왜의 명분을 조선이 호응하는 것이 아닌가 의심을 할 정도였다. 개전 17일 만에 한양을 버리고 의주로 파천을 한 선조는 명나라로 망명을 하겠다고 명에 애걸을 하였고 조선에 명의 지원군을 파견해 달라고 하였다. 이러는 사이 격전지 부근의 사지로 보낸 광해군이 군병 모집과 의병의 위무를 잘하고 남해의 이순신은 왜의 해군을 연이어 격파하였고 전국의 의병이 불같이 일어나 전황이 바뀌는 조짐이 나타나고 있었다. 이때 명은 조선의 항전 의지가 있는 것이 확인되고 만력제의 가신 병부상서 석성이 임진왜란에 조선에 지원군을 파병하여 천자의 관용을 보여주라는 권유로 참전하게 되었다. 선조는 광해군의 분조 활약. 이순신 장군 등의 해전에서의 연승과 목숨을 바친 의병투쟁보다는 선조 자신의 주장으로 참전한 명의 참전에 더욱 명분을 두어 재조지은(상국인 명이 조선을 다시 만든 은혜)이라 하면서 명을 더욱 섬기게 되었다. 이후 우여곡절 끝에 왕이 된 광해군은 명의 참전 요구에 마지못해 참전하여 강홍립 장군에게 적극적인 전투를 하지 말라고 하였다. 명과 청의 사이에서 등거리 외교의 진수를 보여준 광해군은 선조의 광적인 괴롭힘에 트라우마가 심해져 풍수가의 말에 휘둘렸다. 풍수적 이유로 궁궐건축에 집중하다가 내치에서는 백성의 불만이 쌓였고 반대당인 서인에 빌미를 주었다. 결국 광해군은 인조반정으로 쫓겨났고 복수심만으로 왕이 된 인조는 전혀 준비되지 않은 왕이었다. 저무는 명과 떠오르는 청의 국제정세에는 무지하고 눈 가리는 인조는 선조의 재조지은을 금과옥조로 청을 오랑캐 취급만 하고 청의 역량을 무시하였다. 결과는 정묘호란을 맞이하였고 이후, 청의 실력을 알았으면 그에 따른 대비를 하여야 했으나 다시 병자호란을 당하여 남한산성에 틀어 박혀있다가 삼전도에서 인조가 직접 삼궤구고두례를 하며 항복을 하는 굴욕을 당하고 말았다. 호란과 왜란이 다른 점은 왜란에 비해 호란은 신속하게 한양까지 왔으며 의병들의 봉기가 거의 없었다는 점이다. 이는 왜란 때 의병들의 낮은 포상과 오히려 징벌을 받은 점이 작용한 결과이다. 못난 인조는 청에 볼모로 끌려간 소현세자와 세자빈 강빈의 청에서의 활약을 의심스럽고 못마땅하게 생각하였다. 인조는 청의 실력과 국제정세를 잘 알게 된 소현세자를 죽게 만들었으며 국제정세보다는 청을 정벌하겠다는 일념과 정치적 운영의 수단으로 활용한 소현세자의 동생 효종이 왕이 되었다. 그리하여, 인조 이후 조선의 명나라에 대한 재조지은은 유교적 가치에 부합되는 금과옥조가 되었다.
한국전쟁 당시 미국 스미스특임부대 모습 [플래닛미디어 제공] ©연합뉴스
한국전쟁과 미국에 대한 한국의 재조지은
1830년대부터 시작된 미국의 조선에 대한 관심은 1866년의 대동강 제너럴셔먼호 침몰 사건과 1871년 신미양요로 구체화 되었다. 미국은 로즈 제독이 함포를 쏘며 일본을 강제 개항시킨 경험이 있었으나 제너럴셔먼호 침몰 사건이나 신미양요에 대하여 미국도 남북전쟁 직후여서 조선에 신경을 쓰지 못하였다. 일본의 조미수호통상조약 중재가 지지부진하자 청나라 이홍장의 중재로 1882년 조미수호통상조약을 맺게 되었다. 이는 1876년에 일본과 맺은 불평등 조약인 강화도 조약보다는 불평등이 어느 정도 배제된 조약이라 조선은 미국을 믿을 만한 나라로 생각하였다. 그러나 이것은 이홍장이 청의 조선에 대한 독점적지위를 바라고 미국에 유리한 조건을 주지 않으려 한 것과 ‘마건충’이라는 프랑스 유학파 국제법 전문가의 자문을 받은 결과이다. 조선은 조미수호통상조약의 답례로 보빙사를 파견하였고 1893년 5월~10월 시카고 만국박람회에도 참가하였다. 1905년 일제의 을사년 침탈에 1882년의 조미수호통상조약 제1조 ‘제3국이 불공경모(불공정하며 경시하고 모멸하는)하는 일이 있을 경우에 필수상조(반드시 서로 돕는다.) 한다’라는 규정을 들어 고종은 미국에 밀서를 보냈으나 카쓰라 태프트 조약으로 필리핀을 식민화하려는 미국이 고종의 요구를 들어줄 리 만무하였다. 민족이 말살당할 뻔한 일제강점기를 용케 견뎌온 대한민국은 1945년 8.15해방을 주권국가로서 맞이하지 못하고 남쪽은 미국에 의한 3년간의 군정 치하에 있게 되고 북쪽은 소련의 군정 치하에 있게 되었다. 이것은 38도 선의 획정과 함께 동서의 이념대립 사이에서 분단국가로 가게 된 가장 큰 원인이 되었다. 미군정 기간 독립군을 잡던 만주특설대 일본군 출신과 독립투사를 잡고 고문하던 일본 경찰 출신을 척결하지 못하게 하고 오히려 그들을 군/경에 그대로 두어 지금까지 사회통합을 방해하게 한 것은 한국인에게 가장 큰 아픔이다. 동서의 이념대립은 1950년 한국전쟁이라는 국제전쟁으로 발화되었다. 6.25 동란을 겪은 세대는 전쟁의 참화와 공산주의에 대한 반감으로 은혜의 나라 미국이 재조지은의 나라라고 찬양하고 맹신하는 경향이 있다. 현실의 결과만 놓고 모든 일을 판단하는 것은 위험하다. 한 사람의 일생도 기승전결의 서사가 있고 시비가 있는데 하물며 국가와 민족의 대사를 판단하고 확인하는 일은 신중해야 한다.
2021년 7월 2일(현지시간) 유엔무역개발회의(UNCTAD)는 한국의 지위를 개발도상국에서 선진국 그룹으로 변경했다. ©KBS 뉴스 방송 화면 갈무리
한반도 분할점령론
1593년 5월~6월 임진왜란 시기 강화회담은 조선이 배제되고 명의 책사 심유경과 일본의 소서행장이 은밀하게 진행하였다. 양측의 강화조건은 피차 들어주기 어려운 점이 있었으나 특이한 점은 명과 일본이 조선팔도를 4도씩 분할 점령한다. 는 조건이 있었다는 점이다. 심유경의 조선 분할점령론은 300여 년이 지난 19세기 말 청일전쟁 전에는 한반도 중립화론이, 러일전쟁 전에는 러/일간에 만주를 두고 한반도 중립화론과 함께 조선을 배제한 한반도 분할점령론으로 이어져 왔다. 해방 후 한국의 신탁통치 결정으로 미군정과 소련 군정으로 나라가 분단되었고 지금까지 은밀하게 나도는 한반도 전쟁 발발 시 미. 중. 러. 일의 한반도 분할점령론으로 이어지고 있다. 명나라를 재조지은으로 생각하는 선조나 청나라가 국토를 유린해도 남한산성에 틀어박혀 명나라 황제가 있는 방향으로 새해 하례를 지내던 인조는 지금까지 이어지는 한반도 분할점령론을 알고 있는지 모르겠다. 조선을 다시 만든 은혜의 나라라는 명나라가 조선을 일본과 이렇게 저렇게 나눠 먹기 위해서 수차례의 회담을 하였는지를. 미치광이 장님 무사와 앉은뱅이 주술사가 국정을 농단하며 위헌적 반국가적 계엄을 저지른 이 시간에 성조기를 든 극우 단체들이 한국을 구한 미국이 한국전쟁 중에 한반도를 어떻게 분할 점령할 것에 대한 논의를 했는지? 한반도 유사시 한반도의 분할점령을 누구와 논의를 하였는지? 알아야 할 것이다. 많은 부분 미국의 도움을 받고 성장을 한 우리나라 사람으로서 친미일 수는 있으나 숭미나 맹미가 돼서는 자주 국가로서 국익을 추구하거나 타국과 관련된 국내외의 시비를 밝히는데 어려움이 많을 것이다. 한반도를 둘러싼 4대 강국 속에서 우리를 지키려면 어떤 국가에나 단정적 태도의 외교는 금물이다. 외교는 항상 협상의 여지를 두어야 한다. 어제의 적이 오늘의 동지가 되는 예는 역사에 많다. 앞뒤를 자르고 결과만의 재조지은은 스스로를 낮고 불쌍한 위치로 만든다.
서울 전 지역에 대설주의보가 내려진 지난 1월 5일 아침 서울 용산구 관저 인근 ‘노동자 시민 윤석열 체포대회’ 농성장에서 은박 담요를 뒤집어쓴 시민들이 농성하고 있다. ©정혜경 진보당 의원실
굳건한 민주주의, 부강한 대한민국
필자는 민주화와 산업화를 동시에 이룬 저개발국가는 처음이라는 찬사를 받아온 대한민국이 이를 뒷받침 할 풀뿌리 시민단체들도 자리 잡아 가고 있다고 생각하였다. 하지만 이번 윤 대통령의 무도한 위헌적 계엄 사태는 민주화와 산업화를 동시에 이룬 최초의 저개발국이라는 찬사가 시기상조이자 얼마나 취약한 자유 민주적 기본질서를 갖고 있는가? 를 절감한 지난 한 달이었다. 또한 윤 정부 들어서서 국민이 서로에게 종북 좌빨과 극우 개보수라 조롱하는 진영으로 양분되고 국론이 분열되어 국가 위기에 국민의 합치된 힘을 발휘할 수 있을까? 심히 우려하였다. 여러 진영의 다양한 생각을 서로 존중하는 사회가 되려면 사고가 굳어진 노년층 기성세대는 어쩔 수 없다고 해도 청장년층은 바뀔 수 있다고 생각한다. 특히 제도권 공교육을 받는 학생들에게는 교육개혁을 통해 민주시민으로서 올바른 가치관과 역사관을 스스로 정립할 수 있도록 해야 한다. 선진 유럽에서 대부분 채택하는 ‘역사 부정 처벌법 제정’(역사적으로 확인된 반국가적 행위, 반민주적 학살행위 등의 부정, 왜곡에 대한 처벌법), 초등교육 고학년부터 실시되는 노사정 롤 플레잉 교육(서로 돌아가며 노사정의 대표역할을 하며 교섭을 하는 교육)으로 성장하여 노사정의 당사자가 되었을 때 서로를 이해하고 협상을 통해 갈등을 해소하는 성숙한 사회구성원이 되게 하여야 한다. 친일 사관과 관계깊은 학파를 정리하고 역사교육의 중요성을 인식하여 역사교육 혁명을 이뤄야 한다. 고등학교까지는 영어 회화 위주의 단순 반복 교육으로 영어가 우월한 사회적지위를 확인시켜주는 목적이 아니라 고등학교를 졸업해도 누구나 세계인과 일상 회화가 가능한 수단으로 기능하게 하여야 한다. 상대 진영을 비하하고 조롱하는 문화를 바꾸고 유머와 배려로 나가는 정치·사회·경제·문화를 만들어 나가야 더욱 굳건한 민주국가, 부강한 대한민국이 될 것이다.
누가 대한민국을 다시 만드는가?
계엄선포 후 맨몸으로 계엄군을 막아선 시민과 계엄 해제 의결을 신속히 하였던 국회의원, 해병대 채상병의 죽음을 왜곡하고 은폐하려는 국가 최고 권력층의 부당한 카르텔에 굴복하지 않고 원칙과 정의감으로 진실을 밝히려 하였던 박정훈 대령, 무주 공항에서 승객을 구하려고 폭발 전까지 조종간을 꽉 잡고 있던 제주항공 기장, 결정적 순간에 결정적 판단을 할 헌법재판소 법관들도 대한민국을 다시 만드는 사람이 될 것이다. 하지만 차가운 바람이 살을 에이는 길 위에서 민주, 정의, 탄핵을 외치며 발랄한 응원봉을 든 젊은 청년들이 현재뿐 아니라 앞으로의 대한민국을 다시 만드는 가장 큰 자산이 될 것이다.
창미디어그룹 시사의창