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사의창=조영섭 기자] 며칠전 경기도 구리시에서 한 통의 전화가 걸려왔다. 주인공은 필자와 간담상조(肝膽相照) 하는 한국체대 5회 졸업생 이성희 선배였다. 그곳에서 그의 한국체대 1년 선배 박기철과 만나 함께 식사를 한다는 내용이었다. 1961년 서울태생의 이성희는 온화하고 합리적인 성품으로 현역시절 김창렬 김성길 김명환 강성덕 이승용등 국가대표 선수들과 경합(競合)을 벌였던 복서였다.
1961년 7월 광주 출신의 박기철은 1974년 중학교에 입학하면서 복싱에 입문한다. 그가 운동을 시작한 광주체육관은 전남체육회 사무국장. 대한복싱협회 심판위원장을 역임한 무소불위(無所不爲)의 영향력과 파워를 겸비한 이재인 관장이 총괄한 체육관이었다. 명장 밑에 약졸 없다는 말처럼 그분 휘하에서 김광민 3형제 복서를 비롯 오영호 유옥균 진행범 김동길 이현주 김종섭 이남의등 명 복서들이 화수분처럼 배출되었다.
이곳에서 복싱을 수학한 박기철은 중 3때 인 1976년 제26회 학생선수권 코크급에서 우승을 차지하면서 <복싱 신동>으로 주목받는다. 1977년 전남체고에 진학한 그는 전남체고 2학년 때인 1978년 제2회 세계선수권(유고) 2차 선발전 LF급 결승에서 국가대표 마수년을 꺾는 대이변을 연출하면서 성인무대를 접수한다.
졸업반인 1979년 전남체고는 박기철을 중심으로 김종섭 김동길 송중석 성두호 이남의(이상 한국체대) 이현주(목포대) 등 세븐스타(Seven star)로 구성된 전남체고 복싱부는 역대 전국최강의 드림(Dream)팀이었다, 마치 1971년 고교야구에서 황규봉 이선희 배대웅 천보성 정현발 함학수 구영석 등 7명의 스타플레이어 들이 포진되어 전국대회 5관왕을 달성한 서영무 사단의 경북고에 비견될 정도의 전남체고 복싱팀은 어느 팀도 범접하지 못할 만큼 막강한 전력이었다.
1979년 12월 박기철은 그해 개최된 제1회 세계청소년대회( 일본 요코하마) 선발전 밴텀급 결승에서 윤평선(원주체) 과 지택림 (한국체대)을 각각 판정으로 꺾고 본선에 진출한다. 1회전에서 박기철은 캐나다의 마이클 니켈과 격돌한다. 강력한 우승 후보인 사우스포인 니켈은 당일 체중조절에 실패하면서 기진맥진한 박기철을 로프에 몰아넣고 피스톤처럼 쉼 없이 연타를 품아낸다.
우박처럼 쏟아지는 상대의 맹공에 속수무책으로 공격을 허용한 박기철이 비틀거리자 경기를 마무리하기 위해 니켈이 회심의 일타를 날린다. 그때 로프에 기대어 수양버들처럼 허우적거리면서 절체절명의 위기에 빠진 박기철은 로프 반동에 의해 중심이 앞으로 쏠리면서 반사적으로 오른손 스트레이트를 내 뻗는다. 그때 그 순간 성경에서 나오는 홍해가 갈라지는 듯한 기적이 발생한다. 박기철이 눈을 감다시피 하면서 무의식적으로 내 뻗은 오른손 주먹과 들어오던 니켈의 안면이 정면충돌 대폭팔이 일어난 것이다.
결국 물리학적 용어인 작용 반작용 법칙에 의해 파괴력이 증폭되어 큰 충격을 받은 니켈은 1회 2분 9초만에 그대로 링 바닥에 고꾸라지면서 박기철은 KO승을 거둔다. 천우신조(天佑神助)란 이런 상황에서 나오는 단어가 아닐까 싶을 정도로 극적인 승리였다. 지옥의 문턱까지 갔다가 극적으로 기사회생한 박기철은 비몽사몽인 상태로 러커룸에 도착하자 헤비급 미국 복서가 박기철의 오른손을 만지면서 한국에서 온 강타자 미스터 박(朴)이라고 치켜세우는 퍼포먼스를 연출한다,
그 미국 복서는 1964년 동경올림픽 헤비급 금메달 리스트이자 프로복싱 헤비급 챔피언 조 프레이져의 아들 마비스 프레이져 였다. 다 아시다시피 박기철은 강타자와는 거리가 먼 빠른 스피드를 이용 상대를 제압하는 정통파 복서였다. 박기철의 2회전 상대는 일본 대표 우에하라 아키라 였다. 아키라는 초반부터 박기철의 묵직한 강타(?)를 지나치게 의식 초반부터 소극적인 전략으로 대응하다가 결국 박기철의 카운터에 한차례 다운을 당하고 5ㅡ0 판정패를 당했다.
3회전에서 만난 불가리아의 파블로프도 박기철에게 KO패를 면하기 위해 전의를 상실한 상태에서 시종일관 클린치를 연발하다가 참다못한 주심에 의해 3회 1분 56초만에 실격패를 당한다. 뜻하지 않은 대회 1회전에서 럭키(Luck) 펀치로 인해 한순간에 강타자로 둔갑한 박기철의 결승전 상대는 박기철보다 스피드와 테크닉등 전반적으로 피지컬이 우세한 러시아 복서가 유력했다. 최소한 은메달을 확보한 박기철도 편안하고 느긋한 마음으로 러시아 선수와 프랑스 대표 마게니아 벌인 밴텀급 준결승전 선수경기를 현장에서 관전한다. 그러나 한 수위의 전력으로 평가받던 러시아 선수가 돌연 프랑스 대표인 마게니아의 대결에서 마치 마법에 걸린듯 페이스를 잃고 전전긍긍하다가 판정패를 당한다.
그리고 맞이한 결승전에서 박기철은 마게니아를 맞이하여 속사포처럼 터지는 연타로 예상대로 5ㅡ0 심판전원일치 판정으로 제압하고 제 1회 세계 청소년대회에서 감격의 금메달을 획득한다. 10체급에 출전한 한국팀의 유일한 금메달이었다. 그러나 박기철의 금메달은 단순 금메달이 아니었다. 1929년 9월 17일 이땅에 한국복싱의 아버지라 불리는 성의경 선생에 의해 조선 권투 구락부가 창설된 이후 반세기 만에 탄생한 대한민국 복싱사상 최초의 세계대회 금메달이었기 때문이다.
그날이 정확하게 1979년 12월 16일이었다. 공교롭게도 바로 그날 국내에선 프로복싱 70년대 마지막 세계타이틀전이 벌어진 날이기도 했다. WBC 플라이급 챔피언 박찬희가 홈링인 부산 구덕체육관에서 벌어진 3차방어전에서 멕시코의 구티 에스파다스를 2회 KO로 꺾고 피날레를 장식한 역사적인 날이기도 했다. 또한 역사적인 관점에서 보면 12월 16일(1598년) 그날은 노량해전에서 전사한 구국의 영웅 이순신 장군의 순국일과 일치한 기념비적인 날이었다.
한국체대에 진학한 해인 1980년 박기철은 그해 1월 12일 문화체육관에서 벌어진 모스크바 올림픽 최종 선발전 (밴텀급) 결승에서 극강의 황철순을 꺾고 우승을 차지한다. 그리고 그해 11월 미국에서 개최된 제1회 LA 시장배 대회에선 페더급으로 월장 금메달을 획득한 박기철은 1981년 1월 뉴질랜드 국제복싱대회에서 홈링의 피트먼을 샌드백 두들기듯 일방적으로 맹공 판정승을 거두고 한국팀 유일한 금메달을 획득한다.
그해 5월 제5회 김명복 배 (페더급) 결승에서 동원공전 고희룡과 결승에서 맞대결 2회 방심을 하다 상대의 라이트 스트레이트를 맞고 다운을 당한다. 박기철은 3회에 물고물리는 대접전을 펼치면서 간신히 판정승을 거두고 김명복배 2연패를 달성한다. 당시 국내 복싱 선수층이 매우 두텁게 형성되어 있음을 유추 해볼수 있는 장면이다.
1982년 5월 제3회 세계선수권(독일) 대회에 참가 8강에 진출한 그는 7월 박기철은 서울에서 개최된 제10회 아시아선수권을 재패 국제대회 4관왕을 달성한다. 그해 7월 뉴델리 아시안게임 4강에서 박기철은 상비군 박용운(부산 금성고)에 힘겨운 판정승을 거두고 출전권을 확보한다.
당시 양궁과 복싱은 국제대회에서 금메달을 획득하는것보다 국내선발전에서 우승하기가 낙타가 바늘 통과하듯이 매우 힘겨웠다. 10월 뉴델리 아시안게임에 출전한 그는 결승에 진출했지만 북한의 여연식에 아깝게 판정패 은메달을 획득한다. 이런 화려한 전력을 보유한 페더급 국내 랭킹 1위 박기철은 1984년 지상 최대의 스포츠 잔치인 제24회 LA 올림픽을 앞두고 쿠바와 동구권이 불참한 이번 올림픽에 한국팀 유력한 메달 후보로 손꼽힌다.
그러나 올림픽 선발전을 앞두고 어슴푸레한 새벽의 베일을 헤치고 성전(盛典)을 향해 뜨거운 짐념으로 훈련하던 어느날 박기철은 뜻하지 않게 발생한 코칭 스탶과 불화로 단숨에 복싱을 접는다. 그리고 1985년 3월 박기철은 동인천중학교 체육 교사로 부임 복싱팀을 창단 지도자로 변신 인생 2막을 시작한다. 그리고 그곳에서 프레 올림픽(스페인)에서 은메달을 획득한 인천복싱의 진주(珍珠)인 임덕민을 비롯 박상민 박정원 프로복싱 우수신인왕 김세준등 유망한 새싹 복서들을 지속적으로 배출하면서 인천복싱 발전에 크게 이바지하였다.
2010년 스스로 교직에서 명예퇴직한 박기철은 인천 북항에서 방역업무를 담당하면서 지내오다 얼마전 구리시에 정착 인생 3막을 유유자적하게 지내고 있다. 80년대를 전후 한 시대를 풍미하면서 스마트한 복싱을 펼쳤던 전설의 복서 박기철의 그의 행운을 빈다.
김성민 기자 ksm950080@gmail.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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