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4. 12. 11. 한국시간 새벽 6시에 스웨덴 스톡홀름 노벨상 수상 연회장에서 아시아 여성최초로 한국인 한강 작가가 수상소감을 조용히 읊조리고 있었다. “여덟 살 때의 어느 날을 기억합니다. 주산학원의 오후 수업을 마치고 나오자마자 소나기가 퍼붓기 시작했습니다. 맹렬한 기세여서, 이십여 명의 아이들이 현관 처마 아래 모여 서서 비가 그치길 기다렸습니다.” - 중략 - “우리가 이 세상에 잠시 머무는 것의 의미는 무엇일까요? 무슨 일이 있어도 인간으로 남는다는 것은 얼마나 어려운 일일까요? 가장 어두운 밤, 우리가 무엇으로 이루어져 있는지 묻는 언어, 이 지구에 사는 사람들과 생명체의 일인칭 시점으로 상상하는 언어, 우리를 서로 연결해주는 언어가 있습니다. 이러한 언어를 다루는 문학은 필연적으로 일종의 체온을 지니고 있습니다. 필연적으로 문학을 읽고 쓰는 작업은 생명을 파괴하는 모든 행위에 반대되는 위치에 서 있습니다. 문학을 위한 이 상이 주는 의미를 이 자리에 함께 서 있는 여러분과 함께 나누고 싶습니다. 감사합니다.”
윤석열 대통령이 비상계엄을 선포한 12월 4일 새벽 서울 여의도 국회의사당에 계엄령 선포에 반대하는 시민들이 이를 저지하는 경찰 병력과 대치하고 있다. ©연합뉴스
[시사의창 2025년 1월호=민관홍 궁 해설사] 스웨덴 한림원은 스톡홀름 콘서트홀에서 한강에 노벨문학상을 수여하며 “결코 잊어버리는 것이 목표가 아니다”라며 “(소설 속) 인물들은 상처를 입고 부서지기 쉬우며 어떤 면에서는 나약하지만, 그들은 또 다른 발걸음을 내딛거나 질문을 던질 만큼의 충분한 힘을 갖고 있다”고 했다.
이날 아스트디르 비딩 노벨재단 이사장도 시상식 개회사에서 문학상 수상과 관련해 “역사적 트라우마를 배경으로 인간의 나약함을 심오하게 탐구한 작품에 수여됐다”고 소개했다. 한강 작가는 소설 ‘소년이 온다’ 를 쓰며 ‘죽은 자가 산 자를 돕고, 과거가 현재를 돕는다는 것’을 믿게 됐다고 하였다. 이와 같은 수상에 대한 찬사와 소감의 주고 받기는 2024년 12월 3일 밤 10시에 윤석열 대통령의 계엄령 발동이 없었다면 우리 국민은 가슴 벅찬 감동과 아름다운 말의 성찬으로 즐기고 있었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한강 작가의 나직한 읊조림과 스웨덴 한림원의 한강에 대한 평가의 말은 2024년 현재 성공한 산업국가이자 성공한 민주국가 대한민국에 다시 닥친 역사적 트라우마를 이겨내게 하는 안내서가 되게 하고 있다. 국민들은 미치광이 같은 대통령의 2차 계엄에 대비하여 나약함에 떨면서도 뭉쳐서 대통령을 탄핵하라며 광장에 모였다.
한강은 언어를 다루는 문학은 필연적으로 생명을 파괴하는 모든 행위에 반대되는 위치에 서 있다고 하는데 윤대통령과 그의 친위쿠데타 혹은 내란 동조자들은 왜? 대한민국의 민주정체와 수많은 한국민의 생명을 파괴하려 할까? 그러고도 너무나 쉽게 자신이 양심을 갖고 있는 인간, 역사를 두려워하는 인간으로 생각하거나 포장을 할까?
소설가 한강이 12월 7일(현지시간) 스웨덴 한림원에서 '2024 노벨문학상 수상자 강연'을 하는 모습 ©연합뉴스
쿠데타와 혁명의 차이
국가나 인민을 위한 혁명이든 권력만을 잡기 위한 혁명이든 혁명을 하는 대부분의 사람 마음은 변한다. 진실된 철학과 이념으로 무장하여도 자신에게 쓴소리를 하는 사람이나 정적의 편에 서는 사람은 권력을 함께 쟁취한 동지라도 무자비하게 죽이는 것이 권력을 잡은 사람의 속성이다.
국가나 인민을 위한 쿠데타, 권력만을 잡기 위한 쿠데타 또한 마찬가지이다. 성공한 혁명과 성공한 쿠데타는 어떻게 다른가? 혁명과 쿠데타의 가장 큰 차이는 두 가지가 있다.
하나는 혁명은 민중의 지지를 받는 정당성이 있어야 한다. 둘째는 혁명은 기존체제 아래 속한 세력이 아니라 새로운 세력이다. 따라서 쿠데타는 권력자 아래에서 봉직하는 세력으로 하극상이며 정당성도 없다. 혁명이나 쿠데타가 발생하면 국가는 정체성의 혼란을, 국민은 생존을, 필연적으로 위협받는 시간 속에 내동댕이쳐진다. 또한 권력을 잡은 사람의 속성은 반대파나 정적을 제거하기 위한 살육을 하기 마련이며 장기 독재의 길로 가게 마련이다.
여기에 쿠데타도 아니고 혁명도 아닌 친위쿠데타도 있다. 권력의 정점에 있는 사람이 자신의 권력을 더욱 더 공고하게 하기 위하여 국민의 동의도 없고 법적 근거도 없이 강압적인 방법으로 자신의 친위세력을 동원하여 쿠데타를 일으키는 것이다.
친위 쿠데타의 성공확률은 90%가 넘으며 필연적으로 장기 독재로 가는 과정이라고 한다. 윤석열도 친위 쿠데타를 성공하였다면 야당의원들과 정부에 비판적인 시민들을 구금하고 입법, 사법 , 행정, 군대를 장악하고 남은 임기만을 채우고 내려가지는 않았을 것이다.
다행히 성숙한 시민의 저항권 발동과 국회의원들의 신속한 계엄해제 의결로 국가변란의 상황을 일시 봉합하였으나 아직도 끝나지 않은 윤 대통령 탄핵의 과정이 조바심 나고 두렵게 남아있다. 산 너머 산이다.
1894년부터 1895년까지 한국을 방문했던 독일인의 사진첩에 등장하는 사진 중에 고종·순종의 사진과 명성황후로 추정되는 사진 ©연합뉴스
명성황후의 친위 쿠데타와 그 역사적 배경
역사적 사실로서 명성황후의 쿠데타는 없었다. 다만 조선 주재 특명전권공사의 부인인 로즈 푸트의 말에서 명성황후의 친위 쿠데타와 같은 이야기를 끌어 내어 제목으로 삼아 관심을 끌려 하였다. 낚시에 걸려서 역사이야기를 보게 된 독자분들에게는 사과의 말씀을 드린다.
하지만 친위쿠데타라 하면 명성황후처럼 절체절명의 상황에서 나라를 위한 권력의 쟁취나 복원을 위한 쿠데타여야 그나마 정당성을 부여 받지 않을까 하여 윤대통령의 친위쿠데타와 비교하여 보자는 의미에서 명성황후의 친위쿠데타와 그 역사적 배경을 다뤄보고자 한다.
1882년 조미수호통상조약을 체결한 후, 1883년 최초로 조선 주재 특명전권 공사로 부임한 루시우스 하우스 푸트 장군의 부인인 로즈 푸트 부인은 명성황후에 대해 이렇게 말하였다. “친일 김홍집 내각 하에 일본장교에게 훈련 받은 군인들을 친 조선적인 자신의 친구들로 바꾸려는 대담한 쿠데타를 계획한 인물이라고 하였다.” 로즈푸트는 고종과 민비의 당시 상황에서 왕보다 위세가 등등한 친일 내각을 뒤엎는 것을 쿠데타로 생각할 정도였다.
구한말 당시 상황은 매순간이 격동의 세월이었다. 1876년 일본의 운요우호 조작사건으로 맺어진 일본과의 불평등조약인 강화도조약부터 1882년 임오군란, 1884년 갑신정변, 1894년 봄 동학혁명, 1894년 6월 2일 일본 중의원에서 내각 탄핵 상주안이 가결되어 정치적으로 궁지에 몰려 있던 내각총리대신 이등박문은 동학군의 거병으로 청군이 조선에 온다는 구실로 즉시 각의를 열어 중의원을 해산하였다. 그리고 ‘일본공사관 및 거류민을 보호한다.’라는 구실로 제5사단 오시마 소장 휘하의 혼성여단을 조선에 파견하기로 결정하였다. 1894년 7월 일본군의 경복궁 점령은 대원군과 친일 매국노들에 의한 쿠데타을 사주하여 고종과 명성황후의 경복궁 유폐로 시작된 청일전쟁, 1894년 10월 경복궁에 유폐된 상황 하에서도 고종의 ‘별입시’ 들의 목숨 건 연통으로 전봉준에 전달된 고종의 밀지로 충청, 전라도에서 동학군들과 조일전쟁이 재개되었다.
하지만 이노우에 일본공사가 지휘한 동학군 토벌대는 11월 목천 세성산 전투, 12월 공주 우금치 전투에서 동학군에 승리하였다. 청일 전쟁은 청나라의 패배 결과로 1895년 4월 청·일의 시모노세키 조약으로 일제는 3억엔의 전쟁배상금과 요동할양, 조선에 대한 정치, 경제 군사적 지배권을 확고하게 장악하였다.
시모노세키 조약이 체결된 지 6일 후인 1895년 4월 23일 러시아를 중심으로 프랑스와 독일 등이 일본 정부에 대해 랴오둥 반도를 청국에 반환하라는 요구, 즉 삼국간섭을 하였다. 프랑스는 러·불동맹의 동반자 입장에서, 독일은 러시아의 제국주의적 야망을 아시아 쪽으로 돌리게 만들어 중국분할경쟁에서 유리한 지위를 확보할 목적으로 각각 러시아의 삼국간섭에 동조하였다. 결국, 5월 10일 삼국의 군사력에 대한 열세를 인정한 일본 정부는 간섭에 굴복, 랴오둥 반도 영유권을 포기하고, 대신 청국으로부터 배상금 3000만 냥을 받기로 하였다.
삼국 간섭 이후 러시아는 랴오둥 반도 남부를, 영국은 웨이하이웨이와 그 주변 지역을, 독일은 자오저우만 주변 지역을 각각 조차하게 되었다. 1894년 7월 일제의 경복궁 점령사건으로 고종과 민비는 경복궁 유폐 상태였다. 고종과 민비는 유폐상태에서 일체의 정치적인 행위를 하지 못하고 1895년 1월 두 차례에 걸친 향원정에서 선교사와 외교관 부부들을 위한 스케이트 연회를 개최하였다.
이는 한가한 빙상놀음이 아니라 언제든 일제의 암살과 겁박 속에서 국내외 정세와 동향을 알기 위한 목숨을 건 스케이트 연회였던 것이었다. 일제의 지시하에 충실히 행동하는 친일 김홍집 내각에 전권을 휘둘리는 상황에서 민비는 일본장교에게 훈련 받은 훈련대 군인들을 자신을 보호하는 시위대의 군인들로 대체하려고 하였다.
그에 따라 훈련대를 해체하려고 계획을 하고 있었다. 이러한 상황을 비교적 소상히 알고 있던 로즈 푸트 부인이 이 상황을 쿠데타로 표현하고 있는 것이다. 1894년과 1895년의 조선을 둘러싼 열강들의 동향과 정세를 간파한 고종과 명성황후는 친러내각을 구축하고 일제의 간섭을 배제하여 자주국가의 생존을 찾으려 하였다. 하지만 1895년 10월 8일 일제는 을미사변을 일으켜 눈에 가시 같은 명성황후를 무도하게 살해하였고 그 시신을 훼손하였다.
12월 14일 서울 영등포구 여의도 국회 일대에 윤석열 대통령 탄핵을 촉구하기 위해 운집한 시민들 ©연합뉴스
나오는 글
토인비는 역사연구에서 문화는 사라지지 않으며 역사는 반복된다고 한다. 따라서 반복되는 역사를 배우며 역사에서 교훈을 얻어야 할 것이다. E.H. CARR는 ‘역사는 현재와 과거의 끊임없는 대화’라고 한다. 그런데 권력을 잡은 많은 사람들은 ‘후세 역사가가 평가할 것’이라는 번지르르한 말을 자주 하며 왜 역사에서 교훈을 얻지 못할까?
후세의 역사가가 평가할 것이라는 말은 길이 기록되어 후세에 알려질 역사를 두려워하며 후세에 나쁜 자로 기록되지 않겠다는 것으로 국정책임자나 국가적 중책을 맡은 사람들이 역사를 걸고 내일로 이어지는 현재를 책임지겠다는 말이다.
국가와 민족을 위한다는 말이 얼마나 멋지고 낭만적인 말인가? 하지만 자신의 이익과 기회만을 노리며 부패하고 부조리한 권력에 빌붙어 국민과 다른 등급의 세상에서 산다는 우쭐함으로 국민에게 갑질하려는 자들도 입에 달고 사는 씁쓸한 말이기도 하다. 얼마전 사기 범죄전문가의 인터뷰를 본 적이 있었다. 그는 사기 범죄의 유형을 구걸형과 조작형과 과시형으로 분류하였는데 세 유형의 공통된 특징은 내일은 없고 오늘만 사는 사람이라고 한다. 내일은 생각 안하고 한탕 하여 오늘만 살고 오늘의 삶도 타인의 신뢰나 평판은 무시하고 내일의 또 다른 건수를 기다리는 삶이라 한다.
역사에서 교훈을 얻지 못하고 부정의와 부조리로 폭주하는 권력자나 기득권층들도 내일은 없이 오늘만 살고 오늘의 삶도 타인의 신뢰나 평판은 무시한 채 오늘만 사는 사기꾼과 같은 유형의 사람이 아닐까? 걱정된다. 한강 작가의 소설 속 인물들처럼 상처입고 부서지기 쉬우며 어떤 면에서는 나약하지만, 또 다른 발걸음을 내딛거나 질문을 던질 만큼의 충분한 힘을 갖고 있는 대한민국의 시민들이 당면한 대한민국의 시련을 극복하리라 굳게 믿는다.
참고문헌
1. 일제종족주의. 황태연 외 5인. 넥센 미디어. 2019.10
2. 한국민족문화 대백과 사전. 청일전쟁 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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