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는 흔히 진보의 반대개념을 보수라고 말한다. 과연 그럴까? 사람들은 진보와 보수를 단순히 정치적 스펙트럼의 양극단으로 이해하곤 하지만 이러한 관습적 인식이 간과하는 사실이 있다. 인류가 존재하는 모든 순간, 오랜 시간적 흐름을 통시적으로 고찰해 보면 역사는 늘 앞으로 한 걸음씩 나아갔다는 것이다. 동서고금에서 그러했다. 인류의 역사는 진보의 역사다. 그런데 이렇게 진보적 속성으로 쟁취한 성과물들이 쌓이고, 그 성과가 특정 계층이나 집단에 의해 독점되면서 기존 체제를 유지하려는 마음이 생겨났다. 이는 기존 질서의 변화가 더 이상 자신들에게 유리하지 않거나, 축적된 기득권을 위협할 수 있다는 두려움에서 비롯되었다. 결과적으로, 더 이상의 변화를 지양하고 안정과 지속을 우선시하는 태도가 형성되었으며, 이는 보수적 가치관의 뿌리가 되었다. 이러한 맥락에서 보수는 기존의 성과와 체제를 수호하며, 변화를 검증하면서 사회적 균형을 유지하는 역할을 하게 되었다.
윤석열 대통령 탄핵을 두고 열린 탄핵 찬성 집회와 보수 단체의 탄핵 반대 집회 ©연합뉴스
[시사의창 2025년 1월호=원광연 기자] 일반적으로 정치적 지형에서 보수와 진보는 전혀 양립할 수 없을 것이라고 여겨지지만 이는 국가와 국민을 수호하고 발전시키며 공공의 가치를 실현하는 방식이 다를 뿐, 궁극적으로는 같은 방향성을 가지고 있음을 이해해야 한다.
현대 복지 정책의 초석이 된 사회 복지 개혁의 시발점은 좌파가 아닌 철혈 재상 비스마르크로부터 비롯됐다. 그는 대표적인 철저한 보수주의자면서 통일 독일 제국의 상징적인 인물이다.
진보 진영의 전폭적인 응원을 받으며 집권한 노무현 전 대통령도 국익을 위해 대한민국 최초의 FTA 체결을 관철했다.
진보와 보수의 차이는 공공의 가치를 실현하는 방식의 차이에 있을 뿐이다. 이러한 열린 시각이야말로 진보와 보수를 균형 있게 이해하는 데 필요한 관점일 것이다.
진보는 변화와 혁신을 추구하며 사회적 모순과 불평등을 해소하려는 노력을 모색했고, 보수는 전통적 시장원리를 지지하면서 안정과 성장을 도모하는 방식으로 공공의 목표를 실현해 왔다. 그런데 이러한 차이를 부정하고 서로의 적대감을 극대화할 때 사회는 퇴보하고 만다. 45년 만에 맞이한 후진적 ‘비상계엄’ 사태가 이를 증명한다.
윤석열 대통령이 12월 3일 저녁 10시 30분 비상계엄을 선포하고 있다. ©연합뉴스
특히 현재 세계적 흐름으로 살펴볼 때 보수가 보여주는 경향성은 극단적으로 우경화되면서 기존 질서와 체계를 부정하고 급진적 폭력으로 체제를 전복하려는 양상을 보여주고 있다.
역사학자 유발 하라리는 이를 마치 ‘1917년의 볼셰비키 혁명과 유사’하다고 지적하면서 현대 보수 세력의 급진성을 경고하고 있다. 이는 현대의 보수주의가 많은 사람들의 희생과 누층적 노력의 결과인 현대적 민주 질서를 인정하지 않고 오히려 이를 붕괴하려는 시도를 지속한다는 설명이다.
2021년 선거 결과에 불복해 무력으로 결과를 뒤집으려 했던 트럼프를 지지하는 극우 민병대의 소요 시도, ‘기독교 민족주의’와 ‘보수’를 내세운 빅토르 오르반 헝가리 총리의 언론 통제와 의회장악 시도, 한국의 전광훈 목사로 대표되는 급진적 폭력에 기반한 체제 전복 주장 등이 동일한 맥락에서 이해될 수 있다.
이러한 관점을 이해하게 되면, 지난 12월 3일 발생한 ‘비상계엄’ 추진 세력들이 왜 그토록 무모하고 폭력적인 내란 행위를 감행했는지에 대한 원인 규명에 도움이 될 것이다.
따라서 그동안 극단화된 보수 이념, 극우 이데올로기가 강화되는 보수층의 출현을 단순히 견해가 다른 애국적 충정의 발로라고 가볍게 넘어가던 태도에서 벗어나야 한다.
이는 단지 정치 성향의 문제가 아닌 비민주적 질서, 반체제적인 봉건적 과거로의 퇴행이 결국 현실 정치에서 막대한 영향력을 발휘할 수 있다는 방증이기 때문이다.
그렇다. 진보의 반대말은 보수가 아니라 퇴보일 뿐이다. 이는 단순한 정치 용어에 대한 정의가 아니다. 우리 사회의 미래가 퇴보될 것인가 발전할 것인가를 좌우할 중요한 통찰의 요소다.
결국 통찰은 진보적 감각에서 비롯된다. 바꿔야 할 혁신이 무엇인지 시대적으로 성찰해야 하며 진보의 감각 세포는 늘 깨어있어야 한다. 얼어붙은 광장을 뜨겁게 채우는 촛불의 함성은 그러므로 깨어있는 통찰의 밀알이자 희망이다.
엔트로피의 정치학, 극단 보수가 판칠 때 사회는 퇴보한다
우리는 흔히 보수가 집권하면 경제적으로나 안보적으로나 유능할 것이라고 예단하는 경향이 있다. 그러나 연구 결과에 따르면 이는 틀린 분석이다. 보수적 가치관을 가진 개인이 경제적 성공을 이룬 사례는 많다. 개인적으로는 유능한 경제적 감각과 안목을 가지고 있을지는 몰라도 이들이 규합되어 정치 세력화되고 권력을 가지게 되었을 때는 전혀 다른 차원의 문제가 발생한다. 왜냐하면 보수적인 개인이 성취한 경제적, 사회적 역량과 국가 경영의 성공 방정식은 근본적으로 다를 수밖에 없기 때문이다. 또한 시장 우선주의와 개인의 이익 극대화를 중시하는 보수 집권 세력의 가치관은 포용과 사회 통합이라는 국가적 과제와 늘 충돌하기 마련이다. 이러한 현상은 구체적이고 실증적인 연구 결과로 나타난다.
부와 가난이 아닌 사느냐 죽느냐의 문제
집권 진영에 따라 명백한 차이 입증
하버드대 의대에서 정신의학을 가르치는 제임스 길리건이 그의 저서 ‘왜 어떤 정치인은 다른 정치인보다 해로운가’의 내용에 따르면 보수 성향의 공화당이 집권했을 때 살인율과 자살률이 증가하고, 진보 성향의 민주당이 집권했을 때 이 비율이 감소하는 경향이 뚜렷하다는 충격적인 내용을 밝히고 있다.
미국 정부의 공식 통계에 따라 분석한 결과, 1900년부터 2007년까지 무려 100년이 넘는 기간 동안 일관되게 나타난 결과다. 그는 이러한 현상의 원인을 ‘불평등’으로 꼽았다.
보수 정권은 감세 정책과 규제 완화를 통해 경제 성장을 추구하지만, 실제로는 불평등을 심화시키고 사회적 갈등을 증폭시키는 결과를 야기했다는 것이다. 경제적 성과도 마찬가지다.
‘보수는 경제에 강하고, 진보는 경제에 약하다’는 통념과 달리, 1900년부터 2010년 10월까지 불황은 민주당 정부 시기보다 공화당 정부 때 3배 이상 자주 발생했고 불황의 지속 기간도 4배 이상 길었다고 밝혔다. 실제로는 보수 정권의 경제 정책이 진보 정권보다 훨씬 무능하다는 것을 입증한 셈이다.
불황이 길어지고 경제정책이 실패하면 실업률은 대폭 증가한다. 길리건은 실업률과 폭력 치사율 사이의 명백한 상관관계를 규명했다. 폭력 치사율이란 자살률과 살인율을 통칭하는 용어다. 실업률이 상승하면 개인이 체감하는 수치심과 모욕감이 증가하고,
이는 국민 전체의 폭력적 성향을 강화한다는 것이다. 모욕감과 수치심이 결합된 폭력적 성향은 결국 폭력 치사율을 증가시키는 데 결정적인 역할을 한다는 것이다. 정치적 이념에 따라 사람 목숨이 왔다 갔다 하는 결과라는 점에서 충격적인 분석이다.
이것이 비단 미국만의 문제일까? IMF사태를 비롯한 한국의 역대 보수정권의 경제적 무능함에 대한 진단은 모두 생략해 보기로 한다.
불행한 사실이지만 윤석열 정부 들어 우리나라 자살률은 급증했다.
보건복지부가 발표한 자료에 따르면, 올해 1월부터 7월까지 자살로 생을 마감한 사람은 8,777명으로, 이는 지난해 같은 기간 8,255명을 넘어선 상태다. 하루 평균 약 42명이 스스로 생을 마감하고 있는 심각한 상황이다.
우리나라 자살률은 2013년 최고치를 기록한 이후 9년 동안은 점차 감소하는 추세였다.
그러나 윤정권 출범 시기인 2022년부터 다시 증가세로 바뀌면서 지난해에는 전년도보다 무려 6.7%가 늘어나면서 사회적 위기가 고조되었다.
놀랍고 안타깝지만 이는 길리건의 연구 결과와 정확히 일치한다.
아직도 열렬한 지지를 보내고 있는 노인들의 상대적 빈곤율은 2011년 56.9%에서 2022년 57.1%로 늘어났고 66세 이상 노인의 40%가 빈곤 상태다. OECD 회원국 가운데 압도적인 1위면서 노인들의 자살률도 계속적으로 증가하고 있다.
12월 7일 오후 국회 본회의에서 김건희 특검법 제의안이 부결된 뒤 윤석열 대통령 탄핵안이 상정되자 국민의힘 의원들이 퇴장하고 있다. 이날 윤 대통령 탄핵안은 국민의힘 의원들의 불참으로 정족수 미달로 투표가 불성립, 무산됐다. ©연합뉴스
설상가상 끝판왕, 오천 년 역사에 기록될 실정(失政)
그동안 역대 정부는 그 어느 정권을 막론하고 실리를 추구하면서 실용적인 노선을 고수해 왔다. 그러나 윤석열 정부는 극단적 이념으로 경도된 사대(事大) 외교를 고집하면서 국가적 실리를 야금야금 빼앗기고 말았다.
균형 잡힌 시각이 아닌 편향된 외교 정책은 주변국과의 관계를 악화시키며 수출 부진의 원인을 제공했고, 이는 국내 경기의 불황으로 이어졌다.
정부의 정책 결정 과정은 ‘하석상대(下石上臺)’라는 표현이 적확하게 어울릴 만큼 즉흥적이었고 정책의 ‘플랜B’는 아예 존재하지도 않은 모습을 보여줬다. 이는 정책의 일관성과 예측 가능성을 담보하지 못하는 결과를 초래할 수밖에 없었고 결국 ‘의료 대란’과 같은 사태를 초래하면서 국민 건강을 현저히 위협하게 만드는 직접적인 국민적 불행을 자초했다.
그런데도 정작 정적 죽이기로 일관된 수사권 남용, 제 가족 지키기에만 몰두하더니 ‘비상계엄’ 사태로 한국의 민주주의를 45년 전으로 후퇴시키는 퇴행을 감행했다. 나라 망치기에 결정적 한 방을 날린 셈이다.
소설가 한강이 12월 7일(현지시간) 스웨덴 한림원에서 '2024 노벨문학상 수상자 강연'을 하는 모습 ©연합뉴스
잠깐 한눈파는 사이, 한없는 퇴보의 나락으로
“과거가 현재를 돕고 죽은 자가 산 자를 구한다”
불과 6시간 남짓이었다. 예상 밖의 계엄령과 무시무시한 포고령에 사람들은 치를 떨었다. 누군가는 ‘사살’을 말했고, 어느 장삼이사의 운명은 엿장수 맘대로인 포고령으로 ‘처단’될, 위험한 상황도 현실이 될 뻔했다.
그런데 이 무시무시한 폭압이 일상인 시절이 있었다. 쥐도 새도 모르게 끌려가고, 없는 동지도 만들어 실토해야 했으며, ‘책상을 ‘탁’ 치니 ‘억’하고’ 생떼같은 학생들의 목숨은 이슬처럼 사라지기 일쑤였다.
‘모든 권력은 국민으로부터 나온다’는 헌법 제2조항은 유명무실했다.
그럼에도 ‘과거’는 끊임없이 저항했다. 끌려가고 고문당하고 어마어마한 감시와 폭력 앞에서도 끝끝내 민주주의의 꽃씨를 지키고 피워냈다. 엄포뿐인 포고령이 아니라 매시간 통제를 당하고 끌려가고 두들겨 맞고 의문의 죽음을 맞이하면서도 끝끝내 저항했다.
한국 최초의 노벨 문학상 작가 한강은 수상 소감으로 “과거가 현재를 돕고 죽은 자가 산자를 구한다”고 말했다. 이 깊은 메시지는 비상계엄 사태에 즈음하여 더욱 비상한 울림으로 다가온다. 그것을 입증하는 사람들은 바로 우리 가까이에 있다. 그들, ‘과거’와 ‘죽은 자’는 바로 오늘의 현재, 이 시간 추운 광장을 가득 채운 MZ세대들의 아버지 어머니였다.
윤석열 대통령 탄핵 촉구 촛불 집회에 참석한 시민들이 응원봉을 흔들며 구호를 외치고 있다. ©연합뉴스
민주주의 본질은 제도가 아닌 참여와 관심
‘진보의 반대말은 퇴보’
엔트로피는 열역학에서 사용되는 이론으로 흔히 ‘무질서도’라고 한다. 자연 상태에서 우주는 항상 엔트로피가 증가하려는 방향으로 나아간다. 즉, 시스템이 외부로부터 에너지를 받지 않으면 점점 더 혼란스러운 상태로 빠지게 된다는 이론이다. 사회과학에서도 자주 인용되는 이론이다.
알기 쉽게 설명하면 정리 정돈된 방은 시간이 지날수록 어지렵혀 진다는 것에 빗대어 볼 수 있다. 어지러운 상태는 엔트로피가 높은 상태고 깨끗이 정리된 상태는 엔트로피가 낮은 상태다. 마치 정리된 방이 시간이 지나면 어지럽혀지듯, 민주주의도 시민들의 지속적인 관심과 참여가 없다면 무질서와 퇴보의 나락으로 빠지는 건 한순간이라는 의미다.
진보적 가치를 인정하지 않고 보수 이념에 경도된 권력 집단의 엔트로피를 제어하지 못했을 때 어떤 불행한 사태가 벌어지는지 많은 사람들이 몸으로 체감했다.
민주주의는 저절로 굴러가지도 지켜지지도 않는다. ‘민주주의’라는 ‘방’을 시민들이 평소에 관심을 가지고 지속적으로 함께 정리정돈하지 않으면 안 된다. 시민들의 관심과 참여는 깨끗이 정리된 방처럼 민주주의를 안정적으로 유지시키는 에너지다.
흔히 민심을 물결에 비유한다. 물 위에 떠 있는 배는 열심히 노를 저어야 목적한 곳으로 가는 것이지 노를 젓지 않으면 가는 곳을 아무도 모르는 법이다. 오히려 목적지에서 점점 멀어지는 퇴행으로 이끌려 갈 수도 있다.
민주주의도 마찬가지다. 시민의 관심과 참여가 멈추는 순간, 곧바로 알 수 없는 무질서의 위험에 직면할 게 뻔하기 때문이다.
이번 내란 준동 친위쿠데타가 남긴 결과, 한 가지는 정치적 무관심이 우리의 삶에 얼마나 심각한 불행을 초래할 수 있는지 크나큰 경종이 되었다는 사실이다.
창미디어그룹 시사의창