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진이 눈을 떴을 때, 눈에서 피를 흘리는 여자가 그녀를 응시하고 있었다. 여자의 눈에서 나온 피는 두꺼운 안경테에 잠시 고였다가 턱까지 주르륵 흘렀다. 턱에는 핏덩이가 맺혔다. 코퍼슬 매장에서 본 시위하는 여자였다. 눈에서 피를 흘리는 여자는 수진의 코앞까지 순식간에 다가오더니 입을 뻐끔거렸다. -본문 중에서-
[시사의창=편집부] 8년간 경제지 기자로 일하면서 사회에 만연한 부조리와 혐오를 고스란히 목격한 작가는 기자 생활을 통해 목격한 ‘자신이 뱉는 말의 영향력을 숙고하지 않는 사람들’에게서 언어를 빼앗고 싶었다는 은밀한 반항을 이 작품집에서 폭발시켰다.
《이윽고 언어가 사라졌다》는 무분별하게 언어를 사용할 때 사회가 어떤 식으로 일그러지는지를 차근차근 짚는다. 언어에 틀에 갇힌 편견이 얼마나 잔인한지, 신념이라는 단어로 포장된 학살이 얼마나 아무렇지 않게 일어나는지 들춘다.
작가의 이 은밀한 욕망으로 탄생한 ‘언어가 사라진 세계’는 재앙과도 같다. 사회는 기능하지 않게 되고 인간들은 스스로 고립을 택한다. 《이윽고 언어가 사라졌다》는 언어의 소멸로 인해 언어의 순기능마저 사라진 역설을 부각시키며, 그 자리에 무엇이 들어갈지 함께 고민하고자 하는 소설집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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