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가대표로 활약한 시절의 박인규


[시사의창=조영섭 기자] 지난 한해를 마무리하면서 백인철 장정구 두 챔프를 비롯 홍성민 국민대 감독 이동포 유원대 감독과 그리고 전(前) 밴텀급 국가대표 박인규등 많은 복싱인 들이 연말 송년회를 겸해 필자의 체육관을 왕림(枉臨) 하면서 아쉬운 석별의 정을 나누었다. 특히 장정구 챔프는 강동구 성내동 인근에서 <남도식당>을 경영하는 후배 정성진 대표를 친히 찾아 요즘 불경기 여파로 IMF 사태 못지않은 침체의 가속 패달을 밟고 있는 그에게 한잔 술을 권하면서 따스한 위로의 말을 전했다.

장정구챔프와 정성진 남도식당 대표(우측)


개인사업과 가수 활동을 병행하는 70년대 한 시대를 풍미한 밴텀급 국가대표 출신의 박인규 챔프도 모처럼 필자의 체육관을 방문 옛이야기로 꽃을 피웠다. 그를 보자 지난 2020년 3월 18일 강동구의 대표적인 요식업체인 <탄다타>에서 개최된 WBC 플라이급 챔피언 박찬희 선수 타이틀 획득 41주년 기념행사에서 절친 박찬희 챔프와 동석 담화를 나누던 지난 추억이 주마등처럼 스쳐 지나간다.

절친 박찬희와 박인규 (우측)


1957년 3월 대구 출신의 박찬희(한영고)와 1956년 12월 전남 화순 출신의 박인규는 남영동에 위치한 동신 복싱체육관에서 운명처럼 만나 동문수학한 절친이다. 1972년 박인규가 남산공전에 입학하면서 등록한 동신 복싱체육관에는 홍수환 염동균 고생근 김학영 김정철 고기봉등 역대급 복서들이 포진된 명문체육관이었다.

이곳에서 박인규는 천부적인 복싱 재능을 인정받으며 백종우(대구복싱) 이형신(동아대). 김영문(중산체). 임병진(중앙대), 황철순(한국화약) 김창석(육군) 이흥수(성동중앙)등 간판급 복서들을 차례로 잡고 동료 복서 박찬희를 한뼘차로 앞서가면서 진격을 시도한다. 당시 박인규는 173cm 큰키에서 율동적인 스텝을 밟으면서 송곳같은 스트레이트로 상대를 제압하는 복서겸 파이터였다. 1973년 남산공전 2학년에 진학한 박인규는 대통령배 본선에 서울대표 (플라이급)로 출전 파죽의 4연승(3KO)을 거두면서 결승에서 충북 대표 정재룡을 꺾고 최우수선수(MVP)에 선정된다.

당시 그의 나이 17세였다. 그리고 그해 제3회 아시아 청소년선발전 결승에서 복싱 신동 박인규는 박남철(이리 남성고)을 묵직한 라이트 일격으로 2회 1분 59초만에 RSC로 꺾고 우승을 차지하면서 한국복싱의 미래로 주목을 받는다. 박인규에 패한 박남철은 1978년 제4회 킹스컵 국가대표 선발전에 LW급에서 우승을 차지한 강타자였다.

1974년 12월 광주 실내 체육관에서 제28회 전국선수권 대회겸 제1회 킹스컵대회출전 국가대표 선발전이 열린다. 이대회 에서 박인규는 밴텀급에서 우승을 차지하고 숙적(宿敵)이자 남산공전 동창인 황철순은 플라이급에서 우승을 차지한다. 1975년 2월 태국에서 제1회 킹스컵대회가 열린다. 박인규는 일본선수와 스리랑카선수를 꺾고 결승전에 진출했지만 결승전에서 태국 선수에게 지독한 텃세에 말려 2ㅡ3 판정패를 당하면서 은메달에 머문다. 그해 7월 일본 요코하마에서 개최되는 제7회 아시아선수권 국가대표 선발전이 열렸다. 이대회는 박인규의 라이벌인 황철순이 밴텀급으로 월장 양선수가 숙명적인 맞대결을 펼친다.

그러나 양선수는 링 위에 오르기 전부터 날카로운 신경전을 펼치며 주먹으로 치고받는 난타전을 펼칠 정도로 라이벌 의식이 극에 달했다. 이 대결에서 박인규는 숙적 황철순은 물론 임병진(중앙대) 마져 판정으로 잡고 밴텀급 터줏대감 여실히 임을 증명한다. 그러던 1975년 8월 16일 저녁 태릉선수촌 인근에 위치한 점방(店房) 주변에서 뜻하지 않는 사건이 발생한다.

플라이급 국가대표 강희용과 박찬희 양 선수가 선 후배 논쟁으로 시비를 벌이다가 이를 지켜본 박찬희와 친분이 두터운 박인규가 강희용의 뺨을 한차례 때리면서 사태가 악화된다. 발끈한 강희용 선수가 돌연 유리병을 깨뜨려 박인규 선수를 찔렀고 박인규 선수는 그만 왼손에 큰 부상을 입고 말았다. 이런 돌발상황이 발생하자 박찬희는 우사인 볼트보다 더 빠른 속도로 현장을 벗어나면서 사태는 일단락된다.

강희용과 박찬희는 대구 출신으로 1957년 동갑내기 친구였고 이번 선발전 플라이급 결승에서 맞대결 강희용이 박찬희에 판정승을 거두고 우승을 차지했었다. 사건의 발단을 좀더 상세히 설명하면 1973년 국가대표에 발탁되어 선수촌에 먼저 입촌한 박찬희가 강희용이 예의를 모르고 건방지다고 시비를 걸었다. 이를 지켜본 박인규가 강희용을 훈계하면서 한차례 손찌검을 하면서 사건이 크게 점화(點火)되고 말았다.

이 사건으로 인해 박인규의 왼손에서 피가 수돗물처럼 철철 흘러내리면서 경찰병원에 입원 아시아선수권대회(요꼬하마) 출전 자격을 상실했고 박인규의 이탈로 공백 이 된 밴텀급은 임병진과 황철순이 평가전을 치러 임병진이 황철순에 판정승을 거두고 박인규의 대타로 아시아선수권대회에 출전했다.

중요한 사실은 이 사태가 발생한후 강희용은 경찰에 의해 법률위반혐의로 구속되었지만 김택수 대한체육회장의 용서와 배려로 곧바로 석방되어 강희용은 아시아선수권 대회에 출전을 했다. 수많은 세월이 흘러갔어도 대국적인 차원에서 복싱인들에게 화해와 관용을 보여준 고(故)김택수 대한체육회장의 용단에 고개가 숙여진다. 각설하고 부상이 치유된 1976년 3월 링에 컴백한 박인규는 제2회 킹스컵대회에 출전 녹슬지 않은 기량을 발휘하면서 준결승전에서 홈링의 남비치드와 파융분(태국)을 연달아 꺾고 결승전에 진출한다.

하지만 우간다 선수에게 역시 1ㅡ4 판정패 은메달에 머문다. 치명적인 왼손부상으로 인해 지난날 폭팔적인 파괴력을 상실했기 때문이다, 그리고 그해 7월 벌어진 몬트리올 올림픽 최종선발전에서 숙적 황철순에 판정패를 당하면서 박인규는 125전 118승(77KO) 7패의 화려한 아마츄어 선수 생활을 접는다.

1976년 10월 박인규는 이안사노씨를 매니져로 프로에 전향 기록적인 14연승(1무 포함)을 기록했지만 KO승은 단 1차례뿐이었다. 강희용에게 당한 왼손부상이 치명적이었다. 사실 박인규는 1978년 6월 일본에 원정(동경 고라꾸엔) 10전 전승(7KO)를 기록한 비운의 사무라이라 불리는 일본의 톱복서 무라다. 에이지로와 맞대결 우세한 경기를 펼쳤지만 10회 무승부를 기록할 정도로 만만치 않은 실력을 보유한 복서였다.

루페 핀토르와 무승부를 기록한 무라다(좌측)


무라다(일본)는 1965년 3월 에델 조프레를 판정으로 잡고 밴텀급 세계정상에 오른 파이팅, 하라다. 이후 맥(脈)이 끊긴 밴텀급 타이틀을 승계할 최적임자였다. 여담이지만 통산 29전 24승 (18KO) 3무 2패를 기록한 제2의 파이팅 하라다 라고 불리던 무라다 선수는 WBC 밴텀급 챔피언을 지낸 멕시코의 루페 핀토르와 WBA 밴텀급 챔피언 제프 챈들러와 2차례 세계타이틀전을 펼쳐 모두 접전 끝에 무승부를 기록 정상도전에 실패한 무관의 제왕이었다.

김영식을 판정으로 꺾고 동양밴텀급 정상에 오른 무라다는 국내 밴텀급을 호령하던 문명안 이종수 오동렬 박종철 오용환 과 맞붙어 전부 KO승을 거두는등 12차 방어에 성공하면서 WBA. WBC 양대기구 밴텀급 1위에 오른 전율적인 파괴자였다.

복서 박인규와 가수 이진관(우측)


한편 부상으로 기능(技能)을 상실한 왼손을 바라보면서 자신의 시대가 저물었음을 통감한 박인규는 안타까운 마음에 1980년 9월 돌연 링을 떠난다. 그의 나이 25세였다. 박인규는 결혼과 함께 단란한 가정을 이루면서 미사리 라이브카페와 밤무대에서 노래를 부르면서 활동한다. 그리고 시나브로 입지를 구축하자 한강이 바라보이는 광진구에서 고풍이 감도는 라이브 레스토랑을 운영하면서 활발하게 사업가로 왕성하게 활동하였지만 이후 IMF라는 직격탄을 맞고 주춤거렸다.

그리고 지금은 새롭게 개인사업을 하면서 얼마전 <흙 수선화> <애수의 터미널>이란 노래를 발표 좋은 반응을 보이고 있다. 복싱 못지않게 노래도 잘 부르는 팔방미인 복서 박인규는 필자가 오작교(烏鵲橋) 역활을 하면서 소개 시켜준 1985년 <인생은 미완성>을 부른 가수 이진관 과 함께 망중한을 이용 음악 삼매경에 빠져 인생 3막에서 유희를 즐기고 있다.

아내와 휴식을 취하고 있는 박인규(우측)


조영섭 기자 6464ko@naver.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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