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음에 맞는 친구들, 여행을 좋아하는 사람들과의 여행을 나는 ‘함께 여행’이라고 정의한다. 나이 차가 있고 하던 일도 다른 다양한 사람과 같이 있는 것만으로 즐겁다. 서로 배우고 가르쳐 준다. 서로를 알아가는 재미도 있다. 끝으로 여행을 다녀온 후 관계가 더 끈끈해진다. 홀로 여행, 가족여행에 이어 ‘함께 여행’을 시리즈로 소개하고자 한다.

친퀘 테레 5개 어촌 마을 중 마나롤라에서 황홀한 야경 – 친퀘 테레


[시사의창 2024년 12월호=글/사진_서병철 작가] 시에나 캄포 광장에서 중세와 현대를 동시에 마주하다
시에나 캄포 광장에 앉아서 우두커니 바라본다. 조개 모양의 기울어진 방사형 광장, 빨간 벽돌과 회색 벽돌을 45도 각도로 마주하며 화살 표시를 만들어 역동감을 준다. 중간에 길게 연결된 울퉁불퉁한 흰 벽돌로 선을 그어 구획을 나눈 듯하다. 궁금증이 생긴다. 유럽의 일반적인 광장은 편평한데 왜 캄포 광장은 경사진 형태일까? 물이 잘 빠지기 위해, 아니면 공연, 대중 연설할 때 높낮이를 달리해서 앞에 있는 사람에게 방해받지 않고 집중할 수 있도록, 종탑과 연관성 등 과거라는 무덤 속에 묻혀 있던 이야기를 나 나름대로 상상의 나래를 펴 본다. 미리 공부하지 않더라도 현장에서 이런 시간을 가질 수 있다는 것, 그게 또한 여행의 묘미다.
캄포 광장은 자연스러운 언덕 지형을 그대로 살려 설계된 덕분에 물이 광장 중앙으로 자연스럽게 흐르게 되어 비가 올 때도 배수가 잘 이루어졌다고 한다. 광장의 중심에서 여러 건축물을 바라보면, 자연스러운 경사가 시각적 효과를 증대시켜 광장이 더욱 넓고 웅장하게 보이고, 경사진 설계로 인해 모인 관중이 어디에 있든 행사나 축제를 잘 볼 수도 있어서 공동체 정신을 더욱 느낄 수 있게 했다. 또한 광장 자체가 조개껍데기 모양으로, 9개로 나눠진 이유는 시에나의 9개 행정 구역, 즉 시에나를 이끄는 정부 지도자를 상징하기 위함이다. 이렇듯 캄포 광장은 다양한 의미가 담긴 역사적 산물이다. 중세 시대 강력한 도시 국가 시절 시에나 시민들의 우렁찬 함성이 들리는 듯하다. 지금도 매년 7월 2일과 8월 16일 두 차례 걸쳐 기마 시합이 열리는 데 13세기부터 이어진 팔리오 축제로 역사가 600년이 넘었다고 한다.

중세에 지어진 시에나 캄포 광장에서 오늘의 자유로움을 만끽하는 사람들 - 시에나


한 어린아이가 스케이트보드 위에 엎드려 경사를 이용해서 내리막을 신나게 즐긴다. 30~40명 학생이 모여서 선생님의 말씀에 집중하는 모습, 사랑하는 남녀 연인들, 가족들, 남자 친구들, 여자 친구들 등이 앉아서 혹은 누운 채 이야기하는 자유스러운 모습이 부러워 나도 따라 해 본다. 광장 주변 식당에는 손님들로 가득하다. 어디 음식점에 가던 광장을 품고 있다는 생각이 들어서 좀 더 머물며 즐기고 싶은 것은 아닐까. 식당 2층 발코니에는 사람들이 광장을 바라보며 일렬로 나란히 앉아서 술과 음료를 즐기는 모습도 생경하다. 갈색의 사나워 보이는 사냥개가 대자로 드러누웠다. 개 주인에게 아양을 떠는 모습이 사냥개가 무섭기는커녕 귀엽다. 이 광장은 중세에 지어진 것이지만 현재를 살아가는 현지인뿐만 아니라 관광객도 함께 모여서 자기만의 시간을 온전히 즐길 수 있는 공간이라서 더욱 특별하다.

광장을 품은 한 식당 테라스에서 나란히 앉아 이야기꽃을 피우는 젊은이들 – 시에나

사나운 사냥개가 대자로 누워서 주인에게 아양을 떤다 - 시에나


우연히 만난 졸업생을 통해 월계관 의미를 알게 되다
캄포 광장으로 가는 도중에 이탈리아 커피를 마시기 위해 노천카페에 들렀다. ‘역시 커피는 이탈리아 커피구나!’ 절로 감탄하게 하는 맛이다. 머리에 월계관을 쓴 앳된 여인이 지나갔다. 다가가서 혹시 무슨 축하할 일이 있는지 물었다. “졸업했어요”라고 답했다. 진심으로 축하한다고 했더니 고맙게도 여행자인 나에게도 샴페인 한 잔을 따라 준다. 졸업한 학생 그리고 그녀의 아버지와 함께 사진도 찍으며 다시 한번 축하 인사를 건넸다. 왜 올리브 나무를 머리에 쓰는 걸까.
이탈리아에서 특히 대학 졸업식과 일부 고등학교 졸업식에서 월계관을 쓰는 전통은 고대 로마 시대와 그리스 문명에서 유래했다고 한다. 지식을 쌓고 학업을 완수했다는 의미로, 마치 로마의 승리자가 월계관을 쓰는 것과 같은 의미다. 월계수는 지혜와 성취를 상징하는 나무라는 의미를 담고 있으며, 앞으로 더 큰 지식과 성취로 나아가기를 격려하는 의미도 있다. 시에나와 같은 전통적인 도시에서는 졸업식을 단순한 학업의 끝이 아니라 성인식 같은 의미도 부여하였다고 한다. 환한 미소가 아름다운 한 고등학교 졸업생의 앞날에 성공적인 성인의 삶이 펼쳐지기를 기원해 본다.

우연히 골목에서 만난 월계관을 쓴 환한 미소가 아름다운 고등학교 졸업생 – 시에나


화려한 피렌체에서 마음이 따뜻한 친구를 사귀다
피렌체는 토스카나 공국의 주도로서, 메디치 가문의 전폭적인 후원으로 르네상스를 꽃피운 도시다. 영화 <냉정과 열정 사이>의 촬영지로 잘 알려진 두오모 성당에서 한 동반자는 흥분을 감추지 못했다. 영화 속 두오모 앞의 장면을 캡처해 와서 그곳을 찾으러 여기저기 헤매느라 힘들지만, 밝은 미소가 가득했다. 우연히 물 고인 곳에서 두오모 성당의 반영을 찍었다. ‘아! 이렇게 반영 사진을 찍을 수도 있구나’ 감탄하며 나도 한 수 배웠다. 사진 고수와 함께 여행을 떠나면 이런 남다른 기술을 배우는 즐거움도 따른다.
두오모 성당 앞에는 산 조바니 세례당이 있는데 천재 조각가 기베르티가 27년 동안 만든 두 개의 청동 문이 있다. 미켈란젤로가 “이 문은 천국에 어울린다”라고 말에서 유래하여 ‘천국의 문’이라고 불린다. 문은 10개의 직사각형 패널로 나누어지며, 아담과 하와의 창조와 추방, 노아의 방주, 이삭의 희생 등 구약 성경의 이야기를 담고 있다. 가까이 다가가서 보니 정교한 입체적 조각에 감탄을 연발했다. 기베르티는 선형 원근법과 대기 원근법을 사용하여 공간감과 입체감을 혁신적으로 표현했다고 한다. 프랑스 현대 조각가 로댕은 이 문의 영감을 받아 자신의 걸작인 ‘지옥의 문’을 제작하게 되었다고 한다. 파리에서 꼭 봐야 할 목록을 추가하며 두 작품을 비교해 보고 싶은 욕심도 생겼다.

작은 물웅덩이에 비친 두오모 대성당 – 피렌체


우피치 미술관에서는 보티첼리의 <봄>이라는 한 작품 앞에서만 20여 분 시간을 보냈다. 임신한 6명 여인의 각기 다른 얼굴의 모습, 미간을 찌푸린 악마, 사랑의 화살을 겨누는 큐피드, 나무를 가리키고 있는 젊은 남자, 그리고 138종의 다양한 식물들까지 가까이서 때론 멀리서 자세하게 보고 이해하려 노력했다. <봄>이라는 작품에 유독 끌리는 이유는 무엇일까.
다음 장소인 미켈란젤로 광장으로 향했다. 노을과 야경 사진을 찍기 위해서다. 노을이 지으려면 한참 시간이 남았음에도 일찌감치 자리싸움이 치열했다. 노을에 이어 어두워지면서 조명이 하나둘 켜졌다. 두오모 성당, 조토의 종탑, 베키오 궁전, 아르노강을 잇는 단테와 베아트리체가 만난 장소로도 유명한 베키오 다리를 모두 담아 봤다. 함께 간 동료가 삼각대를 가져온 덕분에 나도 빛이 사방으로 갈라지고 조명이 비치는 강물을 담은 멋진 야경 사진을 찍을 수 있어 더욱 만족스러웠다.

미켈란젤로 광장에서 바라본 피렌체 야간 전경 - 피렌체


숙소 앞에 괜찮은 카페가 있다고 해서 간단히 술 한잔하려고 들렀다. 나는 한 젊은 이탈리아 친구에게 웃으며 다가가서 반갑게 인사했다. 갑자기 그 친구가 우리 일행에게 꿀술(Honey Whiskey)을 사주고 싶다고 가져다주었다. 아무런 관계도 아니지만 여행을 왔기에 이렇게 인연을 맺게 되는 것이 아닌가. 여행이라는 친구 덕분에 이런 호의를 받았으니 당연히 갚는 것이 인지상정 아닌가. 나는 그 친구와 함께 온 일행에게 일일이 물어봐서 원하는 술을 사서 함께 마셨다. 축구를 보면서 익살스러운 표정으로 서로 부둥켜안기도 하면서 아주 오래 만났던 친구처럼 함께 즐겼다. 그 친구는 동전 지갑 등 다양한 소품을 만드는 회사를 경영하고 있다고 했다. 나중에 별도로 연락이 왔다. 현재 진행 중인 프로젝트가 있는데 나와 함께 만났던 일행 이름을 모두 알려주면 새겨서 선물을 주겠다고 한다. 참 따뜻한 이탈리아 젊은이를 만나서 피렌체가 더욱 기억에 오래 남을 것 같다.

친퀘 테레의 황홀한 야경
친퀘 테레는 이탈리아어로서 숫자 5를 뜻하는 친퀘(Cinque)와 땅이라는 뜻의 테레(Terr)의 뜻이 결합한 지명이다. 친퀘는 5개 어촌 마을을 가리킨다. 해안도로를 자동차로 드라이브하기 어려운 곳이라 라 스페치아역 근처에 있는 숙소에 머물면서 그 역에서 하루 기차 운행권을 사서 좋아하는 마을을 선택해서 여행하면 좋다. 우리 일행은 첫 목적지를 마나롤라(Manalora)로 정했다. 일몰, 야경 모습이 특히 멋진 곳이다. 올라가는 길에 쉬고 있는 한 노부부에 나의 눈이 잠시 머문다. 휴대 전화를 응시하는 남편을 앉아서 아래로 물끄러미 쳐다보는 아내의 모습, 정겹고 아름답다. 계단 및 산등성이를 따라 땀을 흘리며 450m를 올라갔는데 바라던 풍경이 보이지 않는다. ‘앗 우리가 길을 잘못 들었구나!’ 포도밭 너머 바다는 우리가 바라던 풍경이 아니었다. 나중에 확인해 보니 역에서 내리자마자 왼쪽 길을 선택해야 했다.

물끄러미 내려보는 아내의 정겹고 아름다운 모습 – 친퀘 테레


부랴부랴 버스를 탔다. 해가 뉘엿뉘엿 지는 시점에서 간신히 도착했지만 벌써 일몰이 이미 시작된 것이 아닌가. 지는 해를 바라보면서 계속 올라갔다. 자리를 잡기 전에 일몰의 멋진 모습을 담기는 어려워서 아쉽기도 했지만, 이제는 야경 사진을 위해 최선을 다할 수밖에. 우리 옆에 머리를 비스듬히 기대고 바다를 바라보는 한 연인들의 모습이 사랑스럽다. 이윽고 밤이 찾아왔다. 시시각각 변하는 빛, 파도, 다양한 색상의 집들을 어떻게 표현하는 것이 좋을지 안간힘을 썼더니 배고픔도 잊었다. 만족스러운 야간 사진을 찍고 가까스로 마감 시간 전에 식당에 도착해서 생선 요리와 함께 식당 추천하는 화이트와인까지 즐겼다.
숙소로 돌아오는 길에 우연히 기차 플랫폼에서 이탈리아 친구들을 만났다. 웃으며 다가가서 인사하며 말을 건넸더니 금세 친해졌다. “여자 친구를 만들려면 롤렉스 시계가 있어야 하는데”라는 재미있는 농담도 하면서 서로 박장대소했다. 마침내 플랫폼에서 춤판까지 벌어지면서 주변 사람도 덩달아 흥겨워하면서 기차를 기다리는 지루함을 즐거움으로 바꾸어 버렸다.

머리를 비스듬히 기대고 바다를 바라보는 사랑스러운 연인 – 친퀘 테레

친퀘 테레 5개 어촌 마을 중 마나롤라에서 노을 지는 모습 – 친퀘 테레


바롤로(Barolo)에서 내 인생 와인을 만나다!
“바롤로에 가면 어떤 풍경이 있나요?” 한 동행인이 물었다. “전 그저 바롤로 와인 먹으러 가요.” 동선이 꽤 먼 이곳까지 왜 오게 되었는지 궁금했을 텐데. 싱거운 대답에 다소 실망하는 듯했다. 얼마 지나지 않아 반전이 일어났다. 마을로 들어서면서 고흐가 왜 그렇게 구름, 나무를 그렸는지를 여기서 알게 되었다는 한 동행자의 감탄이 나오면서 시작되었다.
산 비탈길을 따라 가로와 세로 반듯하게 이어진 포도밭, 검은 하늘에서 빨간빛이 나타나는 환상적인 포도밭 일출, 마을을 거닐면서 베이지와 오렌지 톤 벽과 빨간 지붕의 예쁜 집들, 골목길은 햇빛이 어떤 각도로 비추느냐에 따라 아름다움의 자태가 바뀐다. 기념품 가게는 거의 없고, 낭만적인 음악이 흘러나오는 와인 레스토랑이 이어지는데 오로지 와인을 즐기는 사람만 와야 하는 곳이라고 항변하는 듯했다. 나이 드신 중년 부부가 아래 펼쳐지는 포도밭을 보며 멍을 즐기는 모습에서 여유로움과 편안함이 느껴졌다. ‘이게 행복일 텐데. 행복이란 뭘까?’ 잠시 나를 생각하게 한다.

산 비탈길을 따라 가로와 세로 반듯하게 이어진 포도밭 – 바롤로


기대하지 않았는데 예기치 않은 결과가 나올 때 그 기쁨은 배가 된다고 한다. 바로 그 여행지가 바롤로(Barolo)였다. 여행 동선상 시간이 더 걸리고 힘들 것 같아서 제안하기가 부담스러웠던 것이 사실이다.
나의 무리한 제안에 흔쾌히 동의해 준 동반자 덕분에 최종적으로 일정에 반영할 수 있었다. 물론 나와 바롤로는 인연이 있다. 몇 년 전 뉴욕 여행을 갔을 때 친구 추천으로 마신 첫 와인이 바롤로였다. 목구멍으로 들어가는 순간, “와! 맛이 좋은데” 하며 그 당시 와인 왕초보였던 내가 감탄했던 기억이 있다. 그런 인연으로 국내에서도 비싸지만, 가끔 바롤로 와인을 마시거나 선물을 하기도 했다. 더욱 기분 좋은 것은 이탈리아 여정을 마치고 한 동반자는 바롤로가 최고 여행지였다고 엄지척을 해 주었다.
와인 시음에 대한 최신의 변화도 읽게 되었다. 바로 와인 자판기다. 와인 종류별 4병씩 자판기에 설치되어 있다. 돈을 지급하면, 카드와 와인잔을 받아서 원하는 와인을 시음할 수 있다. 그 지역 다양한 와인을 맛볼 수 있는데 한국에서도 다양한 와인을 합리적인 가격에 시음하는 자판기 시설이 생기면 인기가 있을 듯하다.
드디어 저녁에는 와인의 여왕인 바르바레스코(Barbaresco)와 와인의 왕인 바롤로(Barolo)를 동시에 맛볼 수 있는 기회가 주어졌다. 와인의 여왕은 꽃 향, 과일 향, 여운이 길고, 탄닌감, 풍미가 풍부해서 좋았으나, 나의 최애 와인은 아니었다. 와인의 왕인 바롤로는 붉은 체리 향을 비롯한 검은 후추, 버섯, 가죽 향이 강해서 강한 바디감을 보여주며 내가 진정으로 좋아하는 와인임을 입증했다.
다음 날 시음에 참여해서 다양한 종류의 바롤로 와인에 흠뻑 빠지며, 최애 와인도 찾았다. 그 와인을 함께 여행한 동료가 선물로 사주니 더욱 뜻깊었다. 참고로 바롤로 와인은 네비올로(Nebbiolo) 품종으로 만드는데, 산지오베제와 더불어 이탈리아 전체에서 가장 중요한 레드 품종이다. 네비올로라는 이름은 안개(Nebbia)에서 유래했다.

다양한 바롤로 와인을 마시며 나의 최애 와인을 찾다 - 바롤로


이탈리아 자동차 여행은 진정한 자유로움, 그 자체다. 차에 얽매있을 수 있다는 생각은 지나친 편견에 불과했다. 지금까지 보지 못했던 자연의 장관들을 가고 싶고 머물고 싶은 곳에 머물면서 보았다. 시에나 캄포 광장에서 중세와 현대를 마주하고 상상으로 넘나들었다. 친퀘 테레에서 황홀한 야경과 일몰 풍경 사진에 몰입했다. 그리고 마침내 평화롭고 편안했던바롤로에서 나의 진정한 와인을 발견하는 기쁨까지 얻었다. 더 이상 무엇을 더 얻을 수 있을까. 앞으로 여행은 덤이다. 이탈리아 국경선을 넘어가면서 설렘이 달라진다. 과연 다음 프랑스 여정은 어떻게 펼쳐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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