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릉 굴산사지 당간지주


[시사의창 2024년 12월호=김동식 칼럼니스트] 범일국사는 810년(혼덕왕 2) 정월에 태어나서 889년(전성여왕 3) 5월에 입적하였다. 시호는 통효대사(通曉大師)이고 탑호(스님의 별호)는 연휘(延徽)이다. 그는 신라하대 9산선문(九山禪門) 가운데 사굴산문의 개산조이다.
범일의 출신에 대해서는 『조당집』에 비교적 자세히 기록되어 있다. 그의 할아버지 김술원(金述元)은 구림(鳩林, 경주의 옛 이름)의 관족(冠族, 대대로 高官을 배출한 집안)으로서 명주도독을 지냈으며, 그의 어머니 문씨(文氏)는 강릉지역의 토착호족 출신이었다고 한다. 즉 범일의 아버지에 대해 특별히 알려지지 않은 이유는 자세히 알 수 없지만 아마도 지방세력으로 고착되었기 때문이라 생각된다.
옛적 어느 양가의 처녀가 굴산(지금의 학산(鶴山))에 살고 있었다. 나이가 들어 시집갈 때도 지났는데 마땅한 혼처가 없어 노처녀로 지내고 있었다.
하루는 이 처녀가 석천(石泉)에 물을 길러 갔다가 표주박에 햇빛이 유난스럽게 비쳐오는 것을 아무 생각 없이 그냥 그 물을 떠 마시었다. 그런 연후 날이 갈수록 몸이 달라지더니 13개월 만에 뜻밖에도 옥동자를 낳았다.
처녀의 몸으로 아이를 낳은 것은 집안의 체면을 손상한 일이라 하여 그 아이를 학이 살고있는 바위밑에 포대기에 싸서 버렸다. 그리고 모성애를 이기지 못하여 삼일만에 학암(鶴巖) 근처에 가서 보니 아이는 곤히 잠들었기에 그 근처에서 지켜보았더니 학이 와서 날개로 아이를 감싸주며 입에 단실을 넣어주고 어디론가 날아가 버렸다. 그로 인하여 범상한 아이가 아닌 줄 알고 집으로 데려와 양육한 것이 곧 범일국사로서 굴산사의 개조(開祖)가 되었다고 한다.
범일은 824년(원성왕 16) 15세때 출가하여 5년 동안 입산수도하였다. 그가 출가한 사찰이 정확히 어디인지 알 수 없지만 아마 강릉 부근의 사찰이었을 것이라 생각된다. 고려시대에 들어와 낙산사에서는 범일이 의상(義湘,625~702)의 문인이라는 설이 유포되고 있었다. 이에 대해 일연은 『三國遺事』의 세주(細註)에서 “범일은 의상의 문인이라 하나 잘못된 것”이라 주장하였다. 물론 일연의 주장처럼 범일은 의상(義湘)의 문인이 아님이 분명하다. 그러나 이러한 설이 유포된 것은 나름의 이유가 있을 것으로 생각된다.
범일이 후일 주지로 있었던 사굴산문의 본산은 굴산사였지만 춘천의 건자암(建子庵)을 비롯하여 봉화의 태자사(太子寺), 오대산의 월정사, 양양의 낙산사, 동해의 삼화사 등에도 그 세력이 미치고 있었다. 즉 사굴산문은 영동지역 뿐만아니라 영서지역과 경상도 지역까지 세력이 미쳤던 것이다. 이 때문에 범일과 그 문인들은 오대산을 중심으로 한 자장계(慈藏界)의 화암 및 의상계(義湘界)의 화엄사상(華嚴思想) 문수신앙(文殊信仰)을 선사상에 수용한 것으로 보기도 한다.

강릉 굴산사지 승탑


범일이 당나라에서 유학생활을 하고 있을 때 명주(明州) 개국사(開國寺)에서 양양 출신이라는 왼쪽 귀가 떨어진 한 스님을 만났는데, 그가 사는 곳이 낙산 밑이라고 하였다. 그는 스님께서 본국으로 돌아가시면 자기 집에 찾아가 집을 지어달라는 부탁을 하였다. 그러나 귀국 후 선교활동을 하는 데 여념이 없었던 범일은 그와의 약속을 까맣게 잊고 있었다. 그렇게 10여년이 지난 어느 날 꿈에 그 스님이 나타나 “전에 명주 개국사에서 저의 부탁을 하셨거늘 어찌 이렇게 늦으십니까?” 하였다. 잠에서 깬 범일은 곧바로 양양으로 가서 그가 사는 곳을 찾았다. 마침 낙산 밑의 마을에 한 여인이 살고 있었는데, 그녀의 여덟 살 된 아들이 마을 남쪽 돌다리 가에 금빛 아이가 있다 하여 범일이 찾아보니 돌부처가 물 한가운데 있었다. 범일이 이를 꺼내 보니 당나라에서 본 스님의 모습과 똑같았다. 범일은 그것이 곧 정취보살(定聚菩薩)임을 알아보고 점을 쳐서 길하다는 낙산 위에 불전(佛殿)을 짓고 그 상(像)을 모시었다.
굴산사지의 당간(幢竿) 지주는 100cm석재로 서로의 폭으로 마주보고 있으며, 기둥 전체 높이가 5.4m로서 아마 우리나라에서는 가장 규모가 크며, 당간을 세우기 위해 좌우에 지탱하도록 세운 기둥(支柱)을 말한다
범일은 40여 년간 굴산사에 머물면서 선법을 전파하였다. 그 동안 경문왕, 헌강왕, 정강왕이 연이어 범일을 국사로 삼아 경주로 모시려 했으나 끝내 부름에 응하지 않았다. 이들 왕이 범일을 경주에 부른 이유는 알 수 없지만, 아마 명주지역에서 정신적인 지도자로 활동하고 있던 범일을 경주로 불러들여 이 지역의 세력을 회유하고자 하였던 것으로 짐작된다.
범일은 임종 직전에 “내 이제 영결하고자 하니 세속의 부질없는 정분으로 어지러이 상심하지 말 것이며, 모름지기 스스로의 마음을 지켜 큰 뜻을 깨뜨리지 말라”고 당부한 뒤 입적(入寂)하였다. 명주지역에서 정신적인 지도자로 활동하던 범일은 조선후기에 이르러 강릉단오제의 주신인 ‘대관령국사성황신(大關嶺國師城隍神)’으로 봉안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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