현대판 과거시험이라 할 수 있는 사법고시는 판사, 검사, 변호사 또는 군법무관에 필요한 학식과 능력의 유무 등을 검정하기 위한 시험으로 해방 직후인 1947년 치러진 ‘조선변호사 시험’으로 시작됐다. 이승만 정부 수립 이듬해인 1949년 ‘고등고시령’이 제정되고 1950년 제1회 ‘고등고시사법과 시험’이 치러졌다. 사법고시는 정권이 바뀌며 여러 변화를 거쳤는데 특히, 노무현 정부 때인 2007년 사법시험을 폐지하고 로스쿨을 도입하는 ‘법학전문대학원 설치법’이 제정됐다. 그 후, 2017년 11월 7일 마지막 사시 합격자와 함께 사법시험은 역사의 뒤안길로 사라졌다. 2018년 이후에는 법학전문대학원(로스쿨)을 졸업한 뒤 변호사 시험에 합격하는 것만이 법조인이 되는 관문이 되었다. 판·검사가 되기까지는 공부 머리뿐 아니라 돈이 없으면 학업을 이어갈 수 없는 학비가 드는 법학 전문대학원을 졸업하고 자격시험에 합격해야 한다. 이제는 웬만해서는 진입할 수 없게 만든 그들만의 리그가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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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사의창 2024년 12월호=민관홍 궁 해설사] 왕과 함께 정전으로 걸어갔던 문무 양반
서울에는 왕이 살던 궁궐이 다섯 개가 있다. 이는 세계 어떤 나라에도 없는 특이한 경우인데 궁궐이 다섯 개가 된 것은 필요한 이유가 있었다. 서울의 궁궐 다섯 개는 1392년부터 500여 년을 이어온 조선왕조 시기에 건설된 것이다. 태조 이성계와 정도전이 개경에서 조선왕조를 개국 후 고려의 남경이며 우왕이나 공양왕 때는 몇 개월이나마 잠깐 천도를 하였던 적이 있었던 한양으로 수도를 옮기었다.
지금의 서울, 조선의 수도인 한양은 1395년 정도전이 설계하고 주요 정전은 사노비 출신으로 판한성부사(현 서울시장)까지 승차한 박자청이 건설하였다. 1398년 한양은 도성이 정비되고 정전인 경복궁과 그 궁성 및 궁성의 사대문이 완성되었다. 하지만 한양 경복궁에서 왕자의 난을 일으켜 혈육을 도륙한 태종은 경복궁에 머물기를 좋아하지 않아서 창덕궁을 건설하였다.
성종 때는 세조 비 정희왕후, 예종비 안순왕후, 성종의 어머니 소혜왕후까지 세 분의 대비가 경복궁에 머무르게 되자 그들의 궁이 필요하게 되었다. 그런 이유로 수강궁 옛터에 짓게 된 것이 창경궁이다. 경운궁(덕수궁)은 원래 성종의 형 월산대군의 집이었으나 임진왜란 때 도성의 궁궐이 모두 불타버리고 행궁(왕이 임시로 머무르는 거처)으로 사용하던 곳으로 고종이 아관망명 후 대한제국을 선포하면서 황궁으로 중건한 궁궐이다.
경복궁의 서쪽에 있어서 서궐이라 불렀던 경희궁은 선조의 핍박으로 트라우마에 시달리던 광해군이 왕기가 서려 있다는 바위(왕암)의 왕기를 누르려고 건설하였다고 전해진다.
이들 궁궐의 정전으로 들어가려면 중앙에 왕이 밟고 가는 어도가 있고, 어도의 양옆에는 어도보다 조금 낮은 박석 보도가 깔려있다. 왕이 북배 남면의 정전 어좌에 앉아서 앞을 바라볼 때 좌측의 보도는 동쪽으로 동반인 문반이, 우측의 보도는 서반인 무반이 걸을 수 있는 보도이다. 그런 이유로 문무 양반이라 하는 것이며 조선은 왕과 양반이라는 사대부가 다스리는 왕조 국가였다.
고려왕이 과거급제자에게 합격증을 수여하는 방방례 의식 재현 ©연합뉴스
조선의 과거제와 입신양명
조선의 과거제는 고려 광종 때 후주의 귀화인 ‘쌍기’에 의해 채택된 과거제를 상당 부분 원용하였다. 조선의 과거제는 문과와 무과, 그리고 잡과(역, 의, 음양, 율과)가 있다. 문과는 유교의 경전에 대한 시험과 그를 바탕으로 하는 문장 짓기가 주요 내용이었다.
조선시대의 문과 시험은 중앙관리로 가는 관문이었다. 조선은 문(文)을 숭상하는 경향이 있어 보통 과거시험이라 하면 문과 시험을 의미할 정도였다. 그러므로 자연히 문과에 응시할 수 있는 유자격자를 신분상으로 제한하여 일반서민과 천인은 물론, 같은 양반이라도 서얼 출신은 응시할 수 없도록 함으로써 이른바 순수한 양반들만이 합격의 특권을 누리게 되었다.
문과는 크게 소과와 대과로 나뉘었다. 소과는 다시 초시·복시의 2단계, 대과는 다시 초시·복시·전시의 3단계로 나뉘어 있어서, 모두 5단계를 차례로 거쳐야만 문과급제가 되는 것이 원칙이었으며 최종합격자는 33명이었다. 그러나 이 5단계를 거치지 않고도 대과의 전시와 동등한 자격을 받던 특별과거시험에는 증광시(국가 경사를 기념하기 위한 시험), 알성시 및 성균관 유생이 보던 반제·관학유생응제 등이 있었다. 시험의 실시는 예조에서 담당하였다.
무과는 무인을 선발하는 시험으로 문과와 달리 무과는 신분상의 제약을 훨씬 완화하여 무관의 자손을 비롯하여 향리나 일반 서민으로서 무예에 재능이 있는 자에게는 응시할 수 있는 기회를 주었다. 무과는 소과와 대과의 구별이 없는 단일 과로서, 초시·복시·전시의 3단계가 있었으며 장원을 선출하지 않았다. 무과의 복시는 28명을 선출하였으며, 전시는 복시 합격자 28명을 그대로 급제하게 하였고 시험의 실시는 병조에서 담당하였다.
잡과는 직업적인 기술관의 등용 시험이었으므로 서울과 지방 관청에서 양성되는 생도들이 응시하였다. 양반들은 잡과에 응하지 않았고 일반 서민이나 천인은 이에 참여할 수 없었다. 따라서 잡과는 일정한 신분 계급에 의해 세습·독점됨으로써 이들에 의해 이른바 중인이라는 신분층이 형성되었다. 잡과에는 역(譯)·의(醫)·음양(陰陽)·율과(律科)의 4과가 있었다. 사역원·전의감·관상감·형조 등 각 관서의 기술 관원을 채용하기 위해 실시되었고 여기에는 초시·복시의 두 단계가 있었다. 대체로 그 격이 문과나 무과에 비해서 낮았다. 시험의 실시는 해당 관청에서 담당하였다.
과거시험 '전주 별시(別試)'의 재현 ©연합뉴스
조선의 신진사대부는 고려의 통치이념으로서의 불교가 타락하고 귀족과 사찰의 민중에 대한 전횡이 심해지자 유교(주자학 중심) 경전으로 무장한 현실 개혁적인 인사들이었다. 정몽주나 정도전 등이 대표적인데 이 둘을 중심으로 고려를 그대로 두고 개혁을 하자는 정몽주와 고려왕조를 엎어버리자는 정도전으로 갈리게 되었다. 최후의 승자는 정도전이었으며 그가 설계한 삼정승 중심의 중앙정치는 조선시대가 망할 때까지 이어지게 되었다.
고려는 과거제로 관리를 뽑기는 하였으나 국가 운영에 지방 호족 세력의 영향력이 컸다. 하지만 조선은 고려보다 지방 귀족의 세력은 거의 없었으며 양반의 입신양명은 과거에 합격하여야만 될 수 있었다. 조선시대에 양반이지만 3대가 넘도록 과거에 합격하지 못하면 토지가 많은 양반이 아닌 이상 몰락한 양반으로 평민만도 못한 생활을 할 수밖에 없었다.
양반이 관리가 되지 못하면 수공업이나 상업에 종사할 수 없었고 농사에 익숙하지도 않으니 이것은 양반이 다른 직업을 선택할 수 없이 평생을 수험생으로 살아가는 숙명이 되게 한 것이다. 5세에서 7세부터 유교 경전을 공부하며 수험생활을 시작하여온 조선의 양반은 빠르면 30대 초반 늦으면 40세로 평균 35세 전후로 과거에 급제하게 되는데 이마저도 통과하지 못하는 양반은 과거시험의 뒷바라지로 등골이 휜 가족의 눈총을 받아야 했다.
조선의 과거제는 세종이나 성종 같은 부지런하고 총명한 왕으로 인해 조선의 애민과 개혁 정신을 이어 갔지만 임진왜란과 병자호란 이후 조선 후기로 갈수록 그 정신은 쇠퇴하였다. 고려의 지방호족과 사찰의 민중 수탈이 조선의 문벌 양반과 서원의 민중 수탈로 바뀌면서 훌륭한 인재를 뽑는 과거시험은 더욱 변질되었다. 과거시험의 부정은 정말 실력있는 ‘노긍’(영조 때 진사)같은 사람을 대리시험의 범법자로 만드는가 하면 대필, 대리시험에 급제자 시험지 바꿔치기, 시험문제 유출까지 하게 된다.
정조 때 김홍도의 ‘공원춘효도’(貢院春曉圖)는 새벽의 과거 시험장 풍속화로 권력 있는 집안의 수험생은 혼자 과거장에 가는 것이 아니라 ‘거벽(문장 짓는 사람)’, ‘서수나 사수(글 쓰는 사람)’, ‘망보는 사람’, ‘수발드는 사람’ 등 일군의 무리들이 과거장에 동반 입장하여 너무도 당당하게 부정행위를 하는 현장을 그렸다. 성호 이익은 이런 세태에 과거시험 응시자 중 직접 답안을 작성하는 자가 열에 한 명 정도라고 한탄하였다. 지방에서 힘들게 올라온 어떤 선비는 좋은 자리를 잡으려는 권력자의 수험생 무리들에 맞아 죽는 일도 발생하였다.
이는 실력보다는 ‘돈 있고 빽 있는 놈’이 출세한다는 요즘 말로 표현할 수 있겠다. 이는 조선의 과거제도가 시간이 흘러감에 따라 정당하게 시험에 합격하든 부당하게 시험에 합격하든 관리가 된 양반이 지방서원을 중심으로 당리당략에만 몰두하는 직업인이나 생활인이 되어 애민 정신과 현실 개혁을 기대할 수 없게 되었다.
조선의 양반은 후기로 갈수록 ‘소중화’에 만족하며 유교의 이상 국가인 주나라의 예법만 강화하여 민중을 주자학 근본주의에 가둬두는 한편, 자신의 부정과 부패에는 눈 감고 야합하는 양반 기득권이 되어 자신들의 정신세계도 폐쇄 병동에 가둬두는 결과가 된 것이었다. 이러한 일들이 쌓여 조선이 개혁할 마지막 기회였던 갑오 농민혁명인 동학혁명이 좌절되며 조선은 망국의 길로 가게 된 것이었다.
‘신임검사 임관식’에서 신임 검사가 선서하고 있다. ©연합뉴스
현대판 과거시험인 사법고시
현대판 과거시험이라 할 수 있는 사법고시는 판사, 검사, 변호사 또는 군법무관에 필요한 학식과 능력의 유무 등을 검정하기 위한 시험으로 해방 직후인 1947년 치러진 ‘조선변호사 시험’으로 시작됐다.
이승만 정부 수립 이듬해인 1949년 ‘고등고시령’이 제정되고 1950년 제1회 ‘고등고시사법과 시험’이 치러졌다. 사법고시는 정권이 바뀌며 여러 변화를 거쳤는데 특히, 노무현 정부 때인 2007년 사법시험을 폐지하고 로스쿨을 도입하는 ‘법학전문대학원 설치법’이 제정됐다. 이때 정부는 특정 대학, 전공에 집중된 획일화된 사법부에서 탈피하고, 사법연수원 기수 문화를 타파하며, ‘고시 낭인’ 양산에 따른 부작용을 완화하고, 변호사 수 증가를 통한 법률비용을 절감한다는 등의 취지를 내세웠다.
그 후, 2017년 11월 7일 마지막 사시 합격자와 함께 사법시험은 역사의 뒤안길로 사라졌다. 2018년 이후에는 법학전문대학원(로스쿨)을 졸업한 뒤 변호사 시험에 합격하는 것만이 법조인이 되는 관문이 되었다. 판검사의 공부 능력이 출중하며 그들이 전문가가 되기까지의 노력은 일반인이 감히 생각하지 못할 정도일 것이라는 것은 여러 경로를 통해서 누구도 부정할 수 없을 것이다.
하지만 대부분 친일 인명사전에 등재된 충성스러운 일제강점기의 판검사들에 이어 지금의 판검사들도 많은 부분 정권을 가진 자의 직업인이거나 정권 유지 이념의 수호자 역할을 착실히 해 왔다. 용공 조작사건이나 간첩 조작사건을 위해 고문을 서슴지 않았던 검사와 수사관과 황당한 판결을 내렸던 판사들이 정권이 바뀐 이후에도 그 직위나 자격이 박탈되지 않고 다시 요직에 등용되고 살아남는 것은 우리 사회의 자정 기능이 제대로 작동된다고 볼 수 없을 것이다.
검찰개혁 촉구 촛불문화제에 시민들이 참석해 있다. ©연합뉴스
판·검사, 그들만의 리그
판·검사가 되기까지는 공부 머리뿐 아니라 돈이 없으면 학업을 이어갈 수 없는 학비가 드는 법학 전문대학원을 졸업하고 자격시험에 합격해야 한다. 이제는 웬만해서는 진입할 수 없게 만든 그들만의 리그가 되었다. 개천에서 용이 나오지 못하고 그들만의 리그가 되어서는 다양성이 사라진다. 하다못해 미꾸라지무리 속에 메기라도 있어야 더 긴장하며 살아있는 조직이 될 터인데 말이다.
유전무죄, 무전유죄를 만든 관행이라는 ‘전관예우’는 법조 카르텔이 만든 최악의 형사 범죄이다. 산재 사망 사고가 부주의로 바뀌고, 피해자가 가해자로 바뀌고 중범죄인이 집행유예로 풀려나게 하는 것 등은 당사자와 관련자의 죽음이나 아픔을 자신 손에 박힌 자그마한 선인장 가시보다 덜 아프다고 하는 것과 같다. 민중의 어려움을 알아야 개혁을 하게 되고 내가 살아 있는 의미가 된다.
판검사라면 누구보다 더 ‘법 앞에 평등해야 하며 법치주의를 실현하는 기본명제’를 굳건히 지켜야 한다. 기득 권력만 추종하다 보면 어느 순간 다른 경쟁 권력의 희생양이 될 수 있다. “믿는 도끼에 발등 찍힌다”는 말을 하지 말자. 그것 또한 자신들끼리의 싸움이지 민중들의 정서나 삶과는 유리된 그들만의 싸움이다. 그들만의 싸움에 등 터지는 것은 일반 국민일 뿐이다.
그들만의 리그가 되지 않으려면 타인과 소통해야 한다. 타인과 소통하려면 공감 능력이 있어야 한다. 한국 사회의 가장 큰 문제는 어쩌면 공감 능력 부재가 아닌가 한다. 특히 사회적 아픔에 대한 기득권의 공감 능력 부재와 그에 편승하여 사회적 재난의 피해자에 대한 조롱을 일삼으며 돈벌이 수단으로 삼는 유투버들은 공감 부재인 사회의 가장 큰 문제라 할 수 있다. “사람에 충성하지 않고 검찰조직에 충성하는” 사람이 정권을 잡고 사실상 견제 세력 없이 검찰과 사법부를 장악하였다. 이는 민주화가 되고 군부가 안정되면서 사회의 여러 문제 들을 검찰과 법원의 판단에 맡기면서 검찰의 기소권 독점과 수사권으로 강화된 검찰 권력의 결과물이다. 검찰의 수장이 권력의 정점에 서서 모든 부분을 범죄자를 재단하듯 보는 일방적 획일은 대한민국을 고혈압과 동맥경화로 몰고 간다. 조선 후기 양반 기득권층이 그러했듯이 ‘내로남불의 병동’에서 나오지 못하면 그런 사회나 국가의 미래는 뻔하다. 오늘은 어떤 일이 터질까? 전전긍긍하는 요즘, 우리 사회는 공감 능력 회복을 중요한 화두로 삼고, 국가와 시민의 공리를 위해 맡은 일이라도 잘하며 엄혹한 현실을 타개하여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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