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창덕(좌측)과 박인규(우측)
[시사의창=김성민 기자] 세월의 흐름에 따라 자잘한 추억의 낙엽들이 쌓이면서 같은 일에 매달려 어느덧 35년이란 세월을 보내게 되었다. 그렇게 인생의 가을을 맞이한 듯한 어느 날 필자가 체육관을 운영하는 강동구 성내동에 들려 가끔씩 방문 한잔의 커피를 마시고 인근 당구장에 들려 유희(遊戲)를 즐기던 복서들이 있었다.
주인공은 박인규와 동료 복서 한창덕이다. 이번주 스포츠 컬럼 주인공 한창덕은 1953년 10월 서울 종로구 태생으로 선친이 1948년 런던올림픽에서 한국복싱사상 최초의 올림픽 메달리스트인 한수안 선생이다. 당시 런던올림픽에 출전한 복싱의 한수안 선생을 포함한 한국 국가대표 선수단은 서울역에서 기차를 타고 부산에 도착 부산에서 여객선을 타고 일본의 후쿠오카 하카다항을 거쳐 기차로 요코하마로 출발한다. 그곳에서 다시 여객선으로 갈아타고 중국 상하이 홍콩에 도착한다.
그곳에서 비행기에 승선 방콕 켈거다 봄베이 카이로 로마 암스테르담 등을 간이역 삼아 서울역을 출발 한지 꼬박 19박 20일에 걸쳐 세계 일주 여행을 하면서 영국 런던에 도착한다. 런던 올림픽대회는 제2차 세계대전 (1939ㅡ1945)로 인해 2회나 올림픽이 중단된 지 무려 12년 만에 개최되는 대회로 일본의 압제(壓制)에서 벗어난 우리나라가 최초로 독립 국가로 태극기를 휘날리며 참가한 대회였다.
이 대회에서 플라이급으로 출전한 한수안(성균관대) 선생은 8강전에서 이태리의 반디낼리 선수에게 3ㅡ2 판정패를 당한후 3.4위전에서 체코 선수에 승리 천금 같은 동메달을 획득했다. 그리고 이에 대한 공로로 1975년 올림픽 동장연금(5만원)을 복싱인 최초로 받았다. 이후 한수안 선생은 해병대에 입대 1952년 헬싱키(핀란드) 올림픽에 출전 8강에 진출하였다. 이후 동신 체육관 사범으로 재직하면서 그곳에서 박인규(남산공전)라는 걸출한 복서를 발탁 체계적으로 지도한다.
밴텀급을 호령했던 국가대표 박인규
이에 편승(便乘)한 박인규는 1975년 킹스컵과 아시아선수권 1976년 킹스컵 1977년 아시아선수권 대회에서 황철순(한국화약) 임병진(중앙대) 박남철(원광대) 문명안(한국화장품) 김창석(육군) 등 역대급(歷代級) 복서들을 차례로 꺾고 국가대표로 발탁되어 송순천 정신조 장규철로 연결되는 밴텀급 국가대표 혈통을 승계할 핵심복서로 활약했다.
한편 체력이 좋은 파이터 한창덕(중산체)은 1975년 5월 마닐라(필리핀)에서 개최된 제3회 아시아 청소년대회 (코크급)에서 우승을 차지하면서 주목을 받는다. 그해 11월 몬트리올 올림픽 선발전에 라이트 플라이급에 출전 전년도 전국체전에서 금메달을 획득한 박찬희(한영고)에 판정패를 당한다.
1976년 킹스컵 선발전에서 한 체급 올린 플라이급으로 출전 박태국(해태제과) 김운석(원광대) 김정수(서울체고) 등을 차례로 꺾으며 상승세를 보인 한창덕은 1977년 제3회 킹스컵 최종선발전(플라이급)에서 결승전에서 만난 천적 박찬희(동아대)의 견고한 벽에 막혀 또다시 패한다.
박찬희와 격돌하는 한창덕(우측)
1978년 5월 군산여상에서 개최된 제8회 아시안게임 3차 선발전에서 곽동성(군산체육관)을 판정으로 잡고 밴텀급에서 우승을 차지하면서 부활하는 듯 했지만 1979년 2월 제5회 킹스컵출전 국가대표 선발전 결승 (페더급)에서 전학수(수경사)에게 1회 한차례 다운을 당하는 등 열세를 극복하지 못하고 판정패를 당해 출전권을 상실한다.
여담이지만 우승자 전학수는 1974년 제26회 세계군인선수권 최우수복서(MVP) 출신의 이거성 (경희대) 을 완봉으로 제압하는 등 최고의 테크니션이었다. 1979년 12월 모스크바 올림픽 1차 선발전에서 임창룡 (동아대)를 접전 끝에 꺾고 결승에 진출 했지만 복병 권현규 (신한복싱) 에 패해 제동이 걸린다.
당시 한국 아마복싱이 남산 위에 소나무가 철갑을 두른 듯이 매우 두텁게 형성된 선수층을 한눈에 알 수 있는 장면이다, 한창덕은 1980년 9월 남기남을 상대로 프로 대뷔전(무승부)을 펼친다. 이후 12연승(7KO)을 달리던 79년 신인왕전 최우수복서(MVP) 안현 에게 10회 판정승을 거두는 등 4연승(3KO)을 질주하면서 페더급의 기대주로 주목을 받았다.
하지만 1981년 12월 19일 컨디션 조절 실패로 1981년 12월 13승 (8KO) 5패를 기록한 케냐의 모데스트 나푸니 선수에게 KO패하면서 좌표를 잃고 표류하다 복싱계를 떠났다. 그 후 남대문 시장에서 상가를 관리하는 부장으로 지내면서 이흥수 정영진 문명안 전학수 홍복수등 천호상전 출신 복싱인들의 모임 회장을 맡으면서 인생 3막을 유유자적하게 보내고 있다.
이런 전력을 보유한 한창덕 부장을 수년전 홍수환 챔프 타이틀 획득 기념식장에서 모처럼 만나 담화를 나누었다. 때마침 행사장에 희극배우 엄용수 씨가 필자의 시야에 포착된다. 두 사람 모두 1953년생 동갑이어서 의미 있는 만남으로 생각 현장에서 기념사진을 찎었다.
행사장에서 만난 희극배우 엄용수(좌측)와 한창덕부장(우측)
그리고 엄용수 씨에게 필자가 다가가서 짧은 담화를 나눴다. 1953년 경기도 화성 출신이죠 하고 묻자 엄용수씨 네. 홍익대 화학공학과 출신이시죠 엄용수씨 네. 화성은 축구의 차범근, 가수 조용필 그리고 고향의 봄 작곡가 홍난파 선생이 탄생이 태어난 고장이죠 엄용수씨 네. 그게 대화의 끝이었다.
그리고 자연스럽게 짧은 목례를 하고 돌아서면서 엄용수 씨와 대략 30초에 걸쳐 짧은 인텨뷰 (?) 를 끝낸 지난 날이 시공(時空)을 초월 불현듯 생각난다, 한창덕 부장의 친구이자 올림픽에 3회 연속 국가대표 복싱 스탭으로 참가한 이흥수 전 국가대표 감독의 전언(傳言)에 의하면 온화한 성품에 상대를 배려할 줄 아는 겸손한 인품을 보유한 벗이라고 밝혔다.
이흥수 감독의 말을 듣자 상대에 대한 예의와 타인에 대한 배려는 푼돈으로 투자 목돈으로 돌려받는 것이라고 역설한 미국의 저명한 경제학자 토머스 소웰의 어록이 떠올랐다. 끝으로 한창덕 부장의 건승을 바라면서 이번 주 스포츠 칼럼을 마무리한다.
조영섭 기자 6464ko@naver.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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