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사의창=정용일 기자] 당초 수개월 이내 끝날 것으로 여겨졌던 우크라이나 전쟁이 예상을 완전히 뒤엎고 장기전으로 전개되는 가운데, 북한군 파병이 사실로 드러나면서 뜬금없이 한국과 북한이 전쟁이 직접적으로 개입되는 아이러니한 상황이 펼쳐지고 있다. 남북 대리전을 우려하는 얘기까지 나오고 있는 상황에 세계 주요 언론이 주목하고 있다.
북한이 우크라이나와 전쟁 중인 러시아에 병력을 보낸 것이 기정사실화된 상황에서 북한과 휴전선을 사이에 두고 대치 중인 한국의 대응에 외신들이 주목하는 것은 어찌 보면 당연하다. 북한의 파병으로 인해 한국도 뒷짐만 지고 불구경할 순 없는 상황이며, 자칫 우크라이나 전쟁이 확전 된다면, 이번 전쟁이 걷잡을 수 없는 방향으로 흘러갈 수 있기 때문이다.
세계 경제가 거미줄처럼 복잡하게 얽힌 구조 속에서 만에 하나 한국이 전쟁 참여로 인해 직접적인 타격을 입게 되면 그 피해는 한국뿐만이 아닌 세계 경제에 연쇄적인 큰 타격을 줄 것이 불가피하게 때문이다.
25일(현지시간) 영국 일간 가디언은 "한국은 왜 북한의 우크라이나 전쟁 참여를 두려워하나"는 제목의 기사에서 북한의 러시아 파병으로 인해 우크라이나 전쟁은 한국에 더 이상 먼 나라의 일이 아니게 됐다고 짚었다.
이 매체는 "북한의 러시아 파병 소식은 서울에 깊은 우려를 불러일으켰다"면서 "이 소식은 우크라이나 수도 키이우로부터 7천300㎞ 떨어진 서울에 특별한 의미를 갖는다"고 짚었다.
그러면서 "한국에서 북한은 적인 동시에 바로 옆의 이웃"이라면서 "한때 유럽의 분쟁이었던 일이 이제 아시아의 분쟁이기도 하다"고 진단했다.
이 매체는 북한이 러시아에 파병하는 대가로 얻게 될 것으로 관측되는 현금과 러시아의 탄도 미사일, 잠수함에 대한 노하우 등은 북한이 이미 한국에 제기하고 있는 위협을 강화할 수 있다고 짚었다.
가디언은 "한국인들은 북한의 우크라이나 전쟁 개입이 이미 긴장이 고조되고 있는 (남북 간) 국경의 긴장을 고조시킬 것을 우려하고 있다"고 전했다. 그러면서 한국 영자지 코리아타임스의 사설을 인용해 "북한의 파병은 우크라이나에서의 전쟁이 더 이상 한국과 관련이 적은 분쟁이 아니라는 신호"라고 전했다.
전쟁 전문가들, 한국 정부의 대응에 주목
앞서 한국과 미국, 우크라이나 당국 등에 따르면 북한은 현재 우크라이나와 전쟁 중인 러시아에 병력 약 3천명을 파병했다. 미국과 우크라이나 당국은 이들 북한군의 숫자가 연내에 최대 1만2천명까지 늘어날 수 있다고 보고 있다.
25일 볼로디미르 젤렌스키 우크라이나 대통령은 북한군이 앞으로 수일 내에 러시아 서부 격전지 쿠르스크 전투 지역에 투입될 것으로 예상된다고 밝혔다.
전문가들은 세계에서 아홉번째로 큰 무기 수출국인 한국이 북한 파병에 맞서 우크라이나에 무기를 직접 지원하기로 한다면 이는 우크라이나에서 남북 간 '대리 전쟁' 양상으로 치달을 수 있다며 한국 정부의 대응에 주목하고 있다.
한국은 우크라이나를 포함해 전쟁 중인 국가에 살상 무기를 직접 제공하지 않는다는 오랜 정책을 유지해왔는데, 최근 윤석열 대통령은 우크라이나 무기 지원과 관련해 "북한군의 활동 여하에 따라 그런 부분에서도 더 유연하게 검토해 나갈 수 있다"고 밝혔다.
가디언은 이러한 윤 대통령 발언을 전하면서 최근 한국 내에서 우크라이나에 무기를 직접 지원하기를 원하는 목소리가 커지고 있다고 전했다. 호주 싱크탱크 호주전략정책연구소(ASPI)의 유안 그레이엄 분석가는 "가장 큰 문제는 서울이 (우크라이나에) 직접적인 군사 지원에 대한 제한을 완화할 것인지 여부"라면서 "그러나 이는 경우에 따라 헌법 개정이 필요할 수도 있기 때문에 간단한 일은 아니다"라고 말했다.
한국의 우크라이나 무기 직접 지원이 실현될 경우 우크라이나 전쟁이 사실상 남북 간의 대리전으로 번질 수 있다는 지적이 나온다. 영국 킹스칼리지 런던의 국제 관계학 교수 라몬 파체코 파르도는 "한국은 이미 (우크라이나의 동맹국에 포탄을 판매함으로써) 우크라이나에 간접적으로 군사 지원을 하고 있으며, 북한은 러시아를 직접적으로 돕고 있다"면서 "만약 한국이 우크라이나에 치명적인 살상 무기를 직접 전달한다면 이는 '두 개의 한국'이 대리전을 벌이고 있다는 사실을 두드러지게 할 것"이라고 말했다.
"북한군의 파병, 글로벌 정세 어느 때보다 엄중한 상황"
우크라이나를 침공한 러시아를 돕기 위한 북한의 파병이 노골화하는 가운데 한국과 미국 국방 수장이 만나 대처 방안을 논의한다. 한국과 미국은 30일(현지시간) 미국 워싱턴DC 인근 미 국방부(펜타곤)에서 제56차 한미 안보협의회의(SCM)를 개최한다.
SCM은 동맹인 한국과 미국의 주요 군사정책 협의·조정 기구로, 실무급 한미 통합국방협의체(KIDD)나 확장억제전략협의체(EDSCG) 등에서 논의해온 군사 정책을 양국 국방부 장관이 만나 최종적으로 보고받고 확인하며 현안에 대응하는 자리다.
매년 한국과 미국에서 번갈아 개최되며, 미국에서 열리는 차례인 이번 회의에는 김용현 국방부 장관과 로이드 오스틴 미 국방부 장관이 참석한다. 김 장관은 지난달 취임 이후 오스틴 장관과 처음 대면하게 된다.
SCM은 기본적으로 미국의 한국에 대한 확장억제 등 한미동맹 관련 군사정책을 다루지만, 올해는 북한군의 러시아 파병으로 인한 글로벌 안보 정세 대응이 주요 현안으로 부각된 할 상황이다.
한국 대통령실이 이미 우크라이나를 위한 공격용 무기 지원 가능성까지 열어둔 만큼, SCM을 통해 한미가 한층 강화된 대북·대러 메시지를 낼 것이라는 관측이 제기된다.
북한이 러시아로 대규모 지상군을 파병한다는 소식은 지난 18일 국가정보원에 의해 처음 확인됐고, 그 규모는 1만 명 수준으로 파악됐다. 북한군은 현재 우크라이나 전선에 가까운 러시아 쿠르스크 지역에 배치됐다는 정보가 미국과 북대서양조약기구(NATO·나토) 등 다양한 출처에서 나온다.
미국 국방부는 지난 28일 "북한이 훈련을 위해 러시아 동부 지역에 약 1만 명을 파견했으며, (그들이) 향후 수주 간 우크라이나 가까이서 러시아의 무력을 강화할 것"이라며 "북한 군인이 전장에 투입된다면 합법적 공격 대상"이라고 경고했다.
북한과 러시아는 쇄도하는 국제적 비난에 말을 맞춰 공동 대응을 꾀할 것이라는 분석이 제기된다. 러시아 정부 특별기의 지난 23∼24일 모스크바와 평양 왕복, 북한이 외무상 최선희의 러시아 공식 방문을 29일 공개 보도한 점 등이 그 근거다.
북한군의 실전 투입이 임박한 가운데 한국은 국제사회와 연대 강화로 초기 대응에 나섰다. 나토에 국가정보원·합동참모본부 등의 고위급을 대표단으로 파견해 정보를 교환했고, 유럽연합(EU) 외교안보 고위대표와도 사안을 논의한다.
이런 상황에서 열리는 SCM에서는 북한군 파병이 한반도와 인도·태평양 안보 정세에 미치는 영향을 평가하고, 한미동맹 차원에서 어떻게 대응할 것인지를 논의할 전망이다.
SCM 이후 결과물로 나오는 공동성명에 담길 대응과 표현 수위에 따라 한미가 북한의 러시아 파병에 대처하는 방향의 윤곽이 나타날 것으로 보인다. 수사적 규탄을 넘어 공동 행동이나 조치까지 도출될지가 관심사다.
정부 관계자는 "북한군의 파병으로 한반도를 넘어 글로벌 정세가 어느 때보다 엄중한 상황"이라며 "이런 사안에 대해 양국 장관 간 심도 있는 논의가 있을 것"이라고 말했다.
한미는 국방뿐 아니라 외교 수장이 함께 참여하는 제6차 한미 외교·국방(2+2) 장관회의를 SCM 다음날인 31일 미 워싱턴DC에서 개최한다. 한미 2+2 회의 개최는 2021년 한국에서 열린 뒤 3년 만이다. 2+2 회의에서도 북한의 러시아 파병이라는 최대 현안과 북한의 도발 행위 등이 의제로 오를 전망이다.
김건희 여사 리스크 등 국면전환용, 국면 타개용 주장도
한편 더불어민주당은 지난 25일 국민의힘 한기호 의원이 신원식 국가안보실장에게 보낸 메시지를 두고 "국가가 국민을 위험에 빠트리고 있다"며 강하게 비난했다. 앞서 한 의원은 전날 국방위원회 국정감사에서 신 실장에게 '러시아에 파병된 북한군을 공격하고 이를 대북 심리전에 활용하자'는 내용의 문자 메시지를 보냈고, 이 사실이 언론에 공개돼 여야 간 공방이 벌어졌다.
이재명 대표는 이날 최고위원회의에서 "젊은 해병대원과 이태원의 수많은 젊은이도 지키지 못한 정부가 이역만리에서 벌어지는 전쟁을 한반도까지 끌어오려는 것인가"라며 "정신 차리라"고 말했다. 이 대표는 "정부·여당은 가뜩이나 불안한 안보 상황에 대한 국민의 우려를 잠재우기는커녕 장기판 말 옮기듯 가벼운 말로 위기를 부추긴 데 사과하라"고 촉구했다.
박찬대 원내대표는 "말이 심리전이지, 현실이 되면 심리전으로 끝나겠나"라며 "머나먼 이국땅에서 남북한이 대리전을 벌이고 충돌을 일으킬 작정 아닌가"라고 비판했다. 특히 윤석열 대통령이 전날 한·폴란드 정상회담 후 공동언론발표에서 우크라이나 무기 지원을 두고 "유연하게 검토할 수 있다"고 한 점을 언급하며 "파병, 살상무기 지원도 모자라 한반도를 전쟁터로 만드는 게 정상적 사고인가"라고 반문했다.
김민석 최고위원은 "'전쟁사주 문자'의 본질은 한기호의 전쟁사주 제안이 아니라 신원식이 긍정적으로 답변한 것"이라며 "이들은 우크라이나의 불길을 서울로 옮기려고 한다"고 밝혔다.
한 의원과 신 실장이 주고받은 메시지가 김건희 여사와 관련한 각종 의혹으로 궁지에 몰린 여권의 정국 타개용이라는 주장도 나왔다. 정성호 의원은 MBC라디오 '김종배의 시선집중'에 나와 "국민이 너무 심각하게 생각하는 김건희 여사 리스크에 대한 국면전환용, 국면 타개용이 아닐지 걱정된다"고 말했다.
민주당은 이날 오전 국회에서 한 의원의 메시지를 '신북풍몰이'로 규정하고 이를 비난하는 규탄대회도 열었다. 박 원내대표는 이 자리에서 "히틀러 같은 전쟁광이나 할 법한 제안을 집권 여당의 국회의원이 하고, 정부의 안보책임자가 흔쾌히 동의하는 것이 정상인가"라며 "한 의원은 즉각 사퇴하고, 신 실장도 즉각 해임돼야 한다"고 목소리를 높였다.
정용일 기자 citypress@naver.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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