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사의창=정용일 기자] 2024년 미국 경제지 forbes(포브스)에서 발표한 '세계 2000대 기업 순위에서 지난해 14위를 기록했지만 각종 부진으로 올해 7계단 하락한 21위를 차지했다. 또한 '세계 최고의 직장' 1위 자리를 무려 5년 동안 유지하기도 했다. 모두가 예상했듯이 바로 자타공인 '1등 기업' 삼성의 얘기다. 대한민국을 대표하고, 세계 무대에서 글로벌 기업으로서 그 위상을 날리던 삼성이 흔들리고 있다. 삼성이 흔들리면 한국경제에 미치는 여파도 상당할 것이다. 이찬희 삼성 준법감시위원장의 "삼성은 현재 사면초가의 어려움 속에 놓여있습니다."라는 짧은 말 속에는 삼성의 위기감이 고스란히 전해진다.
삼성의 현 상황은 주가로도 쉽게 확인할 수 있다. 투자자들의 심리적 마지노선이라 여겨졌던 6원이 깨지면서 불안감은 더욱 커지고 있다. 21일 오전 9시 40분 0.85% 내린 58,700원에 거래되고 있다. 뿐만 아니라 앞으로의 주가 전망도 회의적이다.
주력인 메모리 반도체의 실적마저 부진한 가운데 삼성 특유의 도전과 혁신 정신이 사라졌다는 비판이 곳곳에서 나오며 총체적인 위기 상황에 직면했다. 이례적으로 실적 부진에 대한 '반성문'을 내고 초격차 경쟁력 회복을 통한 재도약에 시동을 걸고 있지만, 재계 안팎에서는 이재용 삼성전자 회장의 강력한 메시지와 책임경영 강화를 주문하는 목소리도 커지고 있다.
세계 반도체 '슈퍼 을'이라 불리는 ASMR의 실적 부진에도 불구하고 세계 최대 파운드리 위탁생산업체인 대만의 TSMC가 호실적을 발표하고, 3분기 영업이익에서도 SK하이닉스에 추월을 허용할 것으로 예측된다. 또한 중국 정부의 전폭적인 지원에 힘입어 경쟁력을 높이고 있는 중국 메모리 업체의 도전도 극복해내야 할 과제다. 이러한 상황에서 국내 반도체 매출 1위 삼성전자의 혁신과 과감한 승부수가 없다면 세계 반도체 시장에서 매우 험난한 길이 예상된다.
이렇듯 그룹 내 분위기가 그 어느 때보다 무거운 상황에서 이 회장은 오는 27일 삼성전자 회장으로 승진한 지 2주년을 맞는다. 다만 그간의 분위기와 최근 일련의 위기 등을 감안하면 올해도 별다른 취임 기념행사는 열리지 않을 것으로 보인다.
이 회장은 이에 앞서 오는 25일 고(故) 이건희 선대회장 4주기를 맞아 삼성 계열사 사장단과 오찬이나 만찬을 할 가능성이 큰 것으로 관측된다. 예년에도 이 회장은 경기 수원 선영에서 열리는 추도식에 참석한 뒤 사장단과 오찬을 했다. 이 자리에서 계열사 사장단을 향해 내놓을 메시지에도 관심이 쏠린다.
지난 2022년 회장 승진에 앞서 가진 계열사 사장단 오찬에서는 "지금은 더 과감하고 도전적으로 나서야 할 때"라며 "어렵고 힘들 때일수록 앞서 준비하고 실력을 키워나가야 한다"고 강조한 바 있다.
잘하는 '안전한 기술'만 고집해서는 위기극복 힘들다
이후 2년이 지났지만, 삼성전자는 여전히 '과감하고 도전적으로' 나서지 못하고 있고 인공지능(AI) 시장 확대 등에 미리 준비하지 못해 고대역폭 메모리(HBM) 주도권을 놓치며 고전하고 있다는 지적을 받는다.
글로벌 경기 침체와 노사 갈등 등 안팎에서 악재가 이어지는 가운데 최근 이 같은 위기감을 현실화한 것은 3분기 실적이다. 삼성전자의 3분기 잠정 영업이익은 9조1천억원으로, 이미 낮아진 눈높이에도 못 미치며 시장에 충격을 줬다. 아직 사업부별 세부 실적이 나오진 않았지만, 반도체 부문의 영업이익이 경쟁사인 SK하이닉스에 밀리는 것은 기정사실화된 상태다.
이에 지난 5월 긴급 투입된 전영현 디바이스솔루션(DS) 부문장(부회장)은 3분기 잠정 실적 발표 후 이례적으로 사과 메시지를 내고 현재 당면한 위기 극복 방안으로 ▲ 기술의 근원적 경쟁력 복원 ▲ 보다 철저한 미래 준비 ▲ 조직문화와 일하는 방법 혁신을 제시했다.
이는 바꿔 말하면 현재 삼성전자가 그동안 자랑했던 초격차 경쟁력을 잃어버렸고, 미래 준비에 실패했으며, 소통 부족 등으로 조직문화도 망가졌다는 의미로 해석된다. 이에 따라 업계 안팎에서는 삼성전자가 '반성문'에 이어 내놓을 쇄신 카드에 주목하는 모습이다.
삼성전자 DS 부문은 지난 7월 조직 개편을 통해 HBM 개발팀을 신설한 데 이어 최근에는 연구개발(R&D) 인력을 일선 사업부로 재배치했다. 전 부회장 취임 이후 경영 진단 등을 통해 그간 R&D 인력과 생산 현장 간 소통 부족과 '책임 떠넘기기'가 경쟁력 약화의 원인 중 하나라고 판단한 데 따른 조치다.
부진한 파운드리 생산라인의 가동을 일부 중단하고 불필요한 행사 축소 등을 통해 비용을 절감하는 등 운영 효율화 작업도 진행 중이다. '반도체인(人)의 신조' 개정 작업에 나서는 등 구성원에게 '삼성맨'의 자부심을 일깨우고 조직문화를 개선하기 위한 작업도 하고 있다. 오는 11월 말 또는 12월 초에 있을 연말 정기 인사에서도 대대적인 조직 개편과 인적 쇄신이 예고된 상태다.
엔지니어 출신 전문경영인에게 전권 넘기는 시나리오도...
기업거버넌스포럼은 최근 논평에서 "삼성전자는 회장, 부회장, 사장 직급의 25명 중 '후선업무' 담당이 무려 36%"라며 "비대해진 관리 조직, 대관 업무, 홍보 등은 기술에 전념하는 IT 기업의 모습이 아니다"라고 지적하기도 했다.
삼성그룹 초기업노동조합은 위기 극복을 위한 혁신적인 시도로 챗GPT 사용 제한을 전면 해제하고 이른 시일 내에 인사 제도와 성과 보상제도에 대한 대대적인 혁신 작업을 시작해 달라고 요구하기도 했다.
재계에서는 이 회장의 최근 동남아 출장에 정현호 사업지원TF장(부회장)이 동행한 것에 주목하는 분위기다. 재계 관계자는 "이전에도 중요한 결정은 해외에서 최고경영진이 모여 했다"며 "그간 해외 출장에 정 부회장이 종종 동행하기는 했지만, 이번에는 시기가 시기이니만큼 (인사 등에 대한) 중요한 논의가 이뤄진 게 아니겠느냐"고 말했다.
재계 안팎에서는 '승어부'(勝於父·아버지를 능가함)를 다짐했던 이 회장이 취임 2주년을 맞아 현재의 위기를 극복하기 위한 보다 강력한 메시지를 내놓을지에 관심이 쏠리고 있다.
이 회장은 앞서 지난 11일 동남아 출장을 마치고 귀국하는 길에 취재진과 만난 자리에서는 삼성 위기 대응 방안 등에 대해 굳은 표정으로 침묵을 지켰다. 일각에서는 그룹 컨트롤타워 부활과 이 회장의 등기임원 복귀 필요성 등도 제기된다.
이찬희 준감위원장은 최근 발간한 준감위 연간 보고서에서 "새로운 변화가 필요한 시점"이라며 "경영 판단의 선택과 집중을 위한 컨트롤타워의 재건, 조직 내 원활한 소통에 방해가 되는 장막의 제거, 최고경영자의 등기임원 복귀 등 책임경영 실천을 위한 혁신적인 지배구조 개선이 있어야 한다"고 강조했다.
박정호 명지대 교수는 최근 CBS 라디오 '김현정의 뉴스쇼'에서 "미래전략실 해체 이후 삼성이라는 큰 그룹이 미래를 위해 어디를 향해 달려가는지 서로가 잘 모르는 것 같은 느낌을 받는다"며 "지금처럼 경제뿐 아니라 경제 외적인 미중 갈등이나 대외 리스크가 가중되는 불확실성 속에서는 빠른 의사 결정과 이를 조직에 내려줄 수 있는 컨트롤타워가 무엇보다 중요하다"고 말했다. 다만 이 회장의 등기임원 복귀 등이 실제로 이뤄질지는 미지수다.
재계 관계자는 "1심에서 무죄를 받긴 했지만 아직 항소심 재판이 진행 중이고, 이미 그룹 총수로서 책임경영을 하는 상황에서 등기임원에 오를 필요성이 있는지는 의문"이라고 말했다.
거버넌스포럼은 "구조조정, 전략적 선택 등 급한 의사결정이 미뤄지는 것은 어려운 문제를 직시하지 않는 이 회장에게 근본적 책임이 있다고 보인다"면서 "이번 기회에 삼성과 대한민국을 위해 이 회장이 모든 공식 타이틀을 내려놓고 뛰어난 엔지니어 출신의 전문경영인에게 경영에 관한 전권을 넘기는 시나리오를 준비하면 어떨까"라고 제언하기도 했다.
엔비디아의 최고경영자(CEO) 젠슨 황은 지난 9월 이런 발언을 했다. "공급 부족으로 인해 고객 관계가 긴장 상태다.", "자사의 제품이 기술 세계에서 가장 인기 있는 상품이 되면서 제한된 공급을 놓고 경쟁하는 상황이 일부 고객들에게 좌절감을 주고 긴장을 고조시켰다.", “수요가 너무 커서 모두가 첫 번째가 되길 원하고, 모두가 가장 많은 것을 원합니다.”
내용인 즉 엔비디아 제품을 놓고 고객사들이 치열하게 경쟁을 하고 있다는 말이며, 그만큼 수요가 좋다는 뜻이기도 하다. 이러한 분위기에 편승해 엔비디아를 포함의 미국의 반도체 관련주들의 주가가 큰 폭으로 상승하기도 했다. 반도체 글로벌 시장에서 최상위권 자리를 유지해 온 삼성전자의 끝이 보이질 않는 주가 하락과는 매우 상반된 모습이다.
업계에서는 반도체 회복 속도의 지연과 프리미엄 스마트폰 시장의 과열 경쟁, 파운드리의 부진 등을 삼성의 부진 이유로 꼽고 있다. 특히 고대역폭 메모리(HBM)와 같은 인공지능(AI) 반도체 등 AI 반도체 고객 요구에 대응을 안하고 변화를 못 읽은 것은 삼성의 뼈 아픈 실수로 지적되고 있다. 이러한 시대의 변화에 적응하는 속도가 느릴수록 세계 최고 수준의 일본 반도체가 한국(삼성전자)에 따라잡혔듯이, 삼성 반도체가 중국에 추월당하는 것은 시간문제일 것이다.
정용일 기자 citypress@naver.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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