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두섭의 여행스케치] 예술은 사회에 어떻게 기여해야 하는가

각자의 마음 속에서 키우는 진리

편집부 승인 2024.10.11 15:51 의견 0

현대 미술을 이야기하자면 대다수 사람은 피카소를 떠올리게 된다. 이때부터 그림이라는 예술 분야는 일반인들과 거리를 두기 시작했다. 피카소는 작가의 작품을 알고 싶으면 그것에 대해 이해해야 함을 강조하였다. 다른 작가들은 눈에 보이는 것을 그렸지만 피카소 자신은 ‘생각하는 것을 그린다’라는 선언을 하며 타자와 선을 긋고 큐비즘의 세계에 발을 딛었다. 그러한 피카소의 진리는 참으로 진실했다. 현대 미술가들에게 예술의 지표를 설정해 준 피카소는 많은 기행을 남겼다.

<둥굴게 말아올린 꿈(들)> 이두섭


[시사의창 2024년 10월호=이두섭 작가] 작가들의 기행은 어떤 것일까. 수간도 마다하지 않는 중광스님이나 작품을 옮길 때 끈으로 자신의 몸에 작품을 묶은 살바드로 달리. 그런 것들은 실은 뜬금없이 나오거나 계산된 행동이 아니라 그의 세계관이 만들어내는 자연스러운 결과일 것이다. 사회에서는 고맙게도 통념상 낯선 것들도 어느 정도 허용하고 용인해 준다.

감정의 핵심을 스스로 발견했을 때 작가는 그것을 위해 모든 것을 버린다. 핵심을 발견하고 예술로 승화시키는 아름다운 시간을 보낼 때 자기 행동은 아무런 문제가 되지 않는다. 그 기이한 행동들은 사람들에게 회자하여 예술가는 그런 존재라는 용인이 어느 정도 이루어진다. 애매하고 불확실한 환경이 그림 속에 존재할 때 그 애매함과 불확실성은 환상으로 존재한다. 이 환상으로 연결되는 것을 극대화해야 현실과 동떨어진 영역을 확장해서 우리가 새로운 것에 갈망이 충족되게 한다. 그렇게 만들어내는 현실에서 이루어지는 틈이 문화에 기여하는 새로운 존재가 되는 것이다.

누구나 나이를 먹는다. 그러면서 연륜이라는 지점이 생기고 그 연륜이라는 것은 많은 지점에서 넉넉하고도 아름다운 상상력을 남겨 준다. 잘 익은 연륜이 생긴 사람들은 타인들의 그릇된 점들을 알면서도 짐짓 모르는 척해주는 것으로 진리의 무게를 갖게 된다. 그런 따듯한 마음의 묵인이 진리를 더욱 견고하게 하는 것일까.

<깊은 바닷속에서 멍들어 있던 시간> 이두섭


많은 사람은 과거를 기억하며 살아간다. 그 과거의 기억을 통해 어떤 사람은 진취적이고 긍정적인 결과물을 만들어내고 어떤 사람은 그 기억을 통해 끝없이 자기 연민과 고통에 빠지는 경우가 있다. 화가의 경우, 겪었던 트라우마를 자기 투사를 통해 깊이 있는 작품을 만들어 내는 경우가 있다. 그 불편한 기억을 예술이라는 환상의 영역으로 끌어내어 승화라는 결과물을 만들어내는 것이다. 우리는 과거에 있었던 모든 문화를 무의식적으로 차용하여 사용한다. 그러므로 과거의 문화 패턴을 많은 부분에서 인정할 필요도 있지 않을까.

개념과 관념의 반복과정에서 많은 문화의 발전을 이루어낸 서양의 문화는 너와 나를 완벽하게 분리하면서 서로의 생각을 존중하는 배려를 통해 그것을 일구어 내지 않았을까. 그에 반해 동양적 사고는 전체를 생각하는 배려나 질서의 문화이지만 자신을 희생하고 억누르는 과정에서 대한해협을 배 타고 건너면서 촉망받던 극작가 김우진과 동반 자살을 한 우리나라 최초의 여성 성악가 윤심덕이나 우리나라 최초의 여성 서양화가 나혜석 등의 예술가들은 타인에 의한 모진 풍파를 몸과 마음 전체로 모진 풍파를 견뎌내야 했다. 나혜석은 우리나라 1대 페미니스트로 여성의 사회평등과 권리에 대해 투고하는 글을 써서 계몽에 관심을 둔다. 이러한 태도는 당대에 얼마나 많은 화제가 되어 그들의 삶을 힘들게 했을까.

나와 뜻을 같이하는 작가들이 있다. 다른 작가들처럼 우리는 가끔 지방의 작은 도시에서 단체전이나 개인전을 개최할 때가 있다. 그럴 때, 어떤 사람은 그런 곳에 사람들이 보러 오는지를 묻는다. 약간은 당황스러운 질문이다. 작가로서 누군가가 많이 와서 봐주는 것도 중요하겠지만 그럴 때는 이렇게 말한다. 누군가에게도 필요한 관람이 있다. 설령 1명이라 하더라도 필요하다면 기꺼이 전시해야 한다.

<위험한 향기> 이두섭


예술가의 사회적 분류를 말하자면 어느 시점에서는 사회지도층이라는 분류도 있다. 이것이 타당한지는 확신이 서지 않지만, 그것이 타당하다면 예술가들은 그들의 사회적 책임을 분명히 해야 한다고 믿는다. 문화가 닿지 않는 오지에서도 문화의 현재를 보여 주는 일이라든지 해양 오염. 전쟁으로 인한 열악한 환경, 기아, 기후 문제 등 사회가 당면한 문제점의 해결을 제시하는 태도는 매우 중요하다고 본다. 실제 그런 작업을 하는 작가를 알고 있다.

작가는 해양 쓰레기에 대한 지속적인 관심을 두고 바다의 오염에 대한 경고의 작업을 꾸준히 하고 있다. 발표되는 작업만이 전부라면 그 작가는 오염에 대한 작가적 과시의 작업이겠지만 작가는 틈나는 대로 바닷가에 나가서 쓰레기를 줍는다. 누가 보지 않더라도 그런 쓰레기를 줍는 일을 통해 자기 작업의 이면에 있는 예술의 깊이를 더해주고 있다. 작가는 자신의 행위가 아주 작은 일이라 겸손해한다. 그러나 그런 작은 일이 사회에 어떤 계기가 있어 파장을 일으킨다면 큰 파장이 되어 선한 영향력을 갖게 된다.

선택이 옳으냐 그르냐를 떠나서 많은 작가가 행동하고 실천하는 대사회적 태도는 그들의 작업을 더욱 깊이를 갖게 한다. 소비되는 문화가 아니라 정신적 생산을 통해 작가는 사회에 여유의 쉼표를 주게 되는 것이다. 매일 돌을 닦으면서 끊임없는 기원으로 자신의 영혼을 맑게 하는 구도자처럼 이런 태도로 하루하루를 견디며 작업을 하는 작가들의 사회에 대한 작은 참여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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