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차중의 여행에세이] 석양의 명상, 어청도 등대 곁에서

편집부 승인 2024.10.11 15:48 의견 0
어청도등대와 낙조


[시사의창 2024년 10월호=김차중 작가] 군산항에서 72km에 이르는 뱃길은 두 시간가량 이어졌다. 배는 항구를 떠났고 바다에 깊이 길을 내듯 이름 모를 갯벌이 뻗어있다. 갑판 위의 바람은 많은 생각을 잠재우고 오로지 바다의 풍경만을 바라보게 한다. 한 시간쯤 지나자 배의 속도가 급히 느려진다. 십이동파도를 구경시키기 위한 카페리호 선장이 열두 개의 섬 십이동파도를 지난다는 신호를 준 것이다. 누워있던 2층 객실의 승객들이 밖으로 나온다.

십이동파도


열두 개의 섬의 도열은 이국적이기도 하고, 또 중간에 있는 섬은 커다란 고래가 머리를 물 밖으로 내밀고 포효하는 모습이다. 등대가 있는 가장 큰 섬은 예전에 사람이 살았던 섬일 것이다. 열두 섬의 곳곳에는 1960년대까지 주민이 살았다고 전한다. 이 섬 주변은 고려 시대 무역선의 침몰로 인한 도자기가 발굴되기도 했다. 뜻밖의 아름다운 풍경을 모두 지날 때쯤 여객선은 다시 속도를 내며 어청도를 향한다.
오직 “푸르다”는 뜻밖에 없는 섬 어청도는 중국 역사가 닿는 곳이다. 2200여 년 전 유방은 초나라 항우를 제압하고 통일왕조 한나라를 세운다. 항우의 휘하에 있던 장수 전횡은 500명의 군사와 함께 피신한다. 3개월간의 피신 끝에 마주한 소나무가 푸르게 자란 섬을 마주한다. 그때부터 이 섬은 어청도(於靑島)라 불리게 되었다는 이야기가 전한다.

바다에서 바라 본 어청도


중국의 기록에는 섬의 이름은 오호도(嗚呼島)로 기록되어 있다. 정몽주, 정도전, 이숭인 등은 전횡 장군의 다른 왕을 모실 수 없다는 결기를 “오호도”를 넣은 제목의 시로 남기기도 하였다. 전횡은 터전을 이을 반가운 섬으로 여겨 이름을 지었지만, 후대 사람들은 그가 죽은 안타까운 섬이라 생각하여 슬픔의 섬 오호도로 불렀던 것이다. 어청도 마을의 오른쪽 부근에 위치한 치동묘는 전횡 장군을 모신 사당이다.
섬에 도착하자마자 숙소를 찾아 짐을 놓고 등대를 향했다. 어떤 이들은 이 등대를 가장 아름답다고 했고, 이 섬의 등대를 지켜보는 것이 작은 소원이라고 말하는 이들도 있었다. 나는 후자였고, 전자의 느낌을 받을 것 같은 기대를 품고 한발 한발 등대를 향했다.
여름 장마의 폭우가 섬을 헤집고 간 후 등대에 오르는 숲길은 희미해졌다. 대나무가 터널을 이루는 길을 지나 무릎까지 올라온 풀과 발목을 잡는 칡넝쿨을 헤치고서야 당산의 능선에 오를 수 있었다. 정상에 도착했다. 당산은 198m로 낮지만 수면기준(해발 0m) 인근에서 시작했기 때문에 건물 50층을 오르는 높이와 같다. 등대로 쉽게 가는 길이 있지만 정상의 봉수대를 보기 위해 힘든 길을 택한 것이다.

어청도 봉수대


어둠이 점점 짙어지는 시간, 풀숲 사이로 희미하게 봉수대의 윤곽이 드러났다. 2.1m의 높이와 12m의 둘레 원추형 석축으로 쌓였고 가운데 봉수대 상단으로 오르는 계단이 있다. 멀리서 보면 커다란 무덤으로 보일 만큼 위에는 잡풀이 무성하다.
이 봉수대는 고려시대 의종 3년인 1148년에 만들어졌다는 기록이 있다. 열 개의 계단석을 차례로 올라 어청도에서 가장 높은 곳에 섰다. 지금은 주변 나무가 자라 시야를 가렸지만 이곳은 고려 시대부터 조선 중기까지 우리나라 서해를 지키는 전초기지였다.
봉수대를 뒤로하고 다시 등대를 향했다. 지금부터는 내리막길이다. 터벅터벅 고단해진 다리를 앞으로 내던진다. 팔각정에 도착했다. 비로소 바람이 서서히 산등을 오른다. 공치산이 남쪽으로 뻗어있고 오른쪽으로는 잠잠한 포구가 보인다.
한때는 일천여 명의 주민이 거주했던 포구다. 태풍이나 풍랑이 거세지면 주변의 배들이 U자형 포구를 찾아 숨을 고르는 곳이다.

아펜젤러비와 포구


배재학당을 설립한 헨리 아펜젤러의 기념비가 있다. 무슨 인연일까? 비문에는 목포에 가는 배를 타고 가다가 어청도 인근에서 선박 사고가 나서 정신여고 학생과 동료를 구하려다 안타깝게 순직했다고 쓰여있다. 이 비는 그의 숭고한 희생을 기억하기 위해 사고 후 120주년이 되는 날인 2022년 6월 11일에 대한기독교감리회에서 설립한 기념비이다.
석양에 물든 등대를 보기 위해 다시 걸음을 시작했다. 등대는 언덕 절벽 위에 위치한다. 다른 등대와는 다르게 항로표지관리소라는 영역 안에 있기 때문에 등대에 다가갈 수 있는 시간이 한정되어 있다. 하계는 오전 아홉 시부터 저녁 일곱 시까지 개방이 되고 동계는 저녁 여섯 시까지이다.
산 뒤편에 숨겨졌을뿐더러 시간까지 정해져 있고 또 저녁이면 자주 해무가 이는 서해에서 일몰을 만나기란 쉬운 일이 아니다. 등대에 도착했다.
1912년 일제에 의해 건설된 등대지만 지금은 군산을 찾는 선박과 남북을 오가는 선박들의 등불이 되어주는 14m 높이의 등대이다. 삼각형의 돌출된 출입문 위의 지붕과 꽃송이 모양의 장식 그리고 계단의 난간은 어느 해안 별장의 문처럼 아름답다.
수평선에는 이미 구름이 가득하다. 하늘은 조심스럽게 선홍색으로 변한다.
하늘은 일몰의 경치를 허락했다. 70여 km나 떨어져 있는 바다지만 너울조차 일지 않는 고요한 바다, 금빛을 뿌려 놓은 바다와 분홍 꽃을 날리는 듯한 붉은 구름, 하얀 등대는 화사한 신부의 얼굴빛으로 변한다.
고요일까, 적막일까, 그것들이 허공을 채우더니 머리와 마음이 비워지는 듯하다.
명상이다. 이것이 명상이다. 해가 수평선 아래로 들어간다. 나에게 가장 아름다운 등대가 되어버린 어청도 등대 뒤로 한 날의 푸르름이 저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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