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불교칼럼] 성문승(聲聞乘), 연각승(緣覺乘), 보살승(菩薩乘)은 일체중생(一切衆生)을 제도(制度)하는 것이다

편집부 승인 2024.10.11 15:26 의견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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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사의창 2024년 10월호=김동식 칼럼니스트] 부처님의 교법(敎法)을 학자(學者)들이 분류(分類)한 것을 보면 거의 비슷하다.
이승(二乘)이란 두 가지 교법을 말하는데 하나는 성문승(聲聞乘)과 연각승(緣覺乘)이고, 다른 하나는 성문승(聲聞乘)과 보살승(菩薩乘)으로 분류(分類)한다.
이렇게 불교사(佛敎史)의 발전에 등장(登場)하는 이상(異狀)과 그들이 의지(意志)하는 가르침에 따라 성문승. 연각승. 보살승이라는 삼승(三乘)이 생겨났다.
여기서 이승(二乘)이란 성문승(聲聞乘)과 연각승(緣覺乘)으로 혼자 본뇌에서 벗어나는 것을 목표(目標)로 하기에 소승(小乘) 되고, 보살승(菩薩乘)은 일체중생(一切衆生)을 제도하는 하는 것을 목적(目的)으로 하기에 대승(大乘)에 해당된다.
초기 불교의 성문과 부파불교의 연각, 초기 대승불교의 보살로 대변되는 삼승은 모두 하나의 방편에 불과하다. 소승에 해당되는 성문승과 연각승은 열반과 생사를 분별해서는 성립할 수 없으며, 대승에 해당되는 보살승은 열반과 생사를 분별해서는 성립할 수 없기 때문에 이 두 승은 전혀 다른 방향으로 가고 있는 것이다. 그러나 그 각각의 방편을 버리고 진실한 세계, 즉 오직 하나의 수레인 일승(一乘)으로 돌아가는 그것이 바로 부처님이 타는 수레인 불승(佛乘)이라는 것이다.
일승(一乘)은 일체중생(一切衆生)이 모두 성불(成佛)한다는 견지에서 이들을 구제하는 교법은 하나뿐이고 절대 진실한 것이다. 즉 이 말은 삼승(三乘) 모두가 방편(方便)이고 모두가 부처님이 되는 것을 궁극적인 목적으로 삼는 것만이 참된 진실(眞實)이라는 의미를 갔고 있다.
이처럼 차별적(差別的) 방편을 버리고 진실의 세계로 돌아와 삼승(三乘)이 모여 하나 되는 것을 희삼귀일(喜三歸一)이라 한다.
<법화경>에서는 사람의 자질이나 능력에 따라 성문, 연각, 보살 등 각각의 고유한 실천법이 있기 때문에 삼승은 일승으로 나가기 위한 방편이라고 말하고 있다.

《삼승(三乘) 교법(敎法)》
부처님은 깨달으신 후 과거 부처님들은 전법(傳法)을 어떤 방편으로 쓰셨을까? 하고 생각해 보시고 나도 그들처럼 내가 얻은 법을 삼승으로 설(說)하리라 하셨다. <법화경 제1권 방편품>
삼승(三乘)으로 설(說)한다는 것은 부처님의 깨달음에 이르는 하나의 길을 셋으로 분별하여 삼승(三乘)을 설(說)한 것이다.
<법화경>에서는 삼승을 소가 끄는 수레에 비유하여 설명하였다.
승(乘)이란 수레와 같은 것을 탄다라는 의미를 지니고 있으므로, 삼승이란 3가지의 탈것이라는 뜻으로 삼차비유(三車比喩)라 한다.
여기서 탈(乘) 것이란? 불교의 궁극적 경지인 깨달음의 세계로 가기 위해서 의지(意志)해야 하는 가르침을 수레에 비유(比喩)한 것이다. 깨달음이란? 곧 차안(此岸)의 세계에서 피안(彼岸)의 세계로 가는 것이기 때문에 깨달음의 세계로 인도(人道)하는 가르침을 탈(脫) 것이라는 의미(意味)를 가진 수레나 지혜(知慧)의 배(倍)로 비유(比喩)한 것이다.
그런데 <법화경>을 보면 여기에 그치지 않고 또 하나의 힘센 수레를 등장시켜 설명하였는데 바로 대백우(大白牛)라는 이름의 크고 힘이 센 수레이다. 그것이 바로 <법화경>의 핵심 사상인 불승(佛乘) 또는 일승(一乘), 일불승(一佛乘)을 상징하며 일승불(一乘佛)로 부르기도 한다.
① 양차(羊車). ② 녹차(鹿車). ③ 우차(牛車). ④ 대백우(大白牛)

1) 성문법계(聲聞法界)·성문승(聲聞乘)
해탈(解脫)을 위하여 불(佛)의 성교(聖敎)에 따라 사제(四諦)의 관법(觀法)을 닦는 경계

성문승은 ‘소리를 듣는 것을 탄다.’라는 의미로 사성제(四聖諦)의 법문에 의지하는 것을 말한다. 즉 부처님의 교법인 사성제와 팔정도를 닦아 아라한의 깨달음을 얻게 하는 교법이다.
성문승은 해탈을 위하여 부처님께서 말씀하신 가르침에 따라 주로 사제관법(四諦觀法)을 닦는 경계이다. 성문부터는 벌써 성자의 지위에 들어간 성인이다. 그런데 성문법계는 사제 법문 가운데서도 아직은 무생사제(無生四諦)나. 무량사제(無量四諦)나. 무작사제(無作四諦)의 정도는 아니고 생멸사제(生滅四諦) 정도는 아니고 생멸사제(生滅四諦) 정도이다. 실제로 고(苦)도 있고 고의 원인이 되는 집(集)도 있고 또는 시제로 멸도 있고 실제로 닦는 도(道)도 있다는 곧 상대적으로 고집멸도(苦集滅道)가 실존적으로 있다는 차원의 가르침을 받고서 닦아 깨달은 하품(하품)의 성인 성인경계가 성문법계이다.
성문승이란 석존의 음성을 들은 불제자를 말하며, 부처님께서 설하신 사성제 팔정도를 듣고 이를 관(觀)하여 해탈에 이르는 것을 말한다. 즉 이를 닦아 열반을 증득하는 길이다.
첫 번째가 양차(羊車)로 양이 끄는 수레이다 보니 힘이 약하다. 이것이 초기 불교의 이상이었던 성문들을 상징하는 것으로 부처님 제자가 타는 수레라는 의미를 담고 있다.

2) 연각법계(연각법계)·연각승(연각승)
해탈(解脫)을 위하여 닦는 도인(道人)의 경계

연각승이란 해탈을 위하여 ‘인연(因緣)을 깨닫는 것을 탄다’라는 뜻으로 스승을 찾지 않고 스스로 십이인연법(十二因緣法)을 잘 관찰(觀察)하여 알고 깨달음을 성취(成就)해 가는 교법(敎法)이라고 한다.
이것은 해탈을 위하여 닦는 도인의 경계이다. 부처님이 12인연법(十二因緣法)을 깨달으신 후 우리에게 메시지(message)를 주신 것이다. 즉 인생의 본질이 허망하니 집착에서 벗어날 줄을 알아야 도(道)에 갈 수 있다.
두 번째가 녹차(鹿車)로 사슴이 끄는 수레로 짐을 많이 실을 수는 없어도 양보다는 힘이 뛰어난 부파불교 시대의 이상이었던 연각을 상징하는 것이다. 그래서 연각승을 벽지불(支佛) 또는 독각승(獨覺乘)이 라고 부르는데 말 그대로 혼자서 깨닫는 자의 탈 것이란 뜻이다.

3) 보살법계(菩薩法界)·보살승(菩薩乘)
무상보리(無上菩提)를 위하여 육도만행(六度萬行)을 닦는 경계

보살승이란 많은 사람들을 구제하는 것을 목적으로 하는 보살들이 수행하는 육바라밀 등의 법문을 말한다. 특히 보살승은 많은 사람들을 부처가 되게 해 불승이라고도 한다.
과거 전생에 선근이 많아서 자기만 공부하는 것이 아니라 남과 더불어서 공부하는 분들이다. 현대의 혼란한 사회에 있는 불자들은 대체로 보살 후신(後身)이다. 자기가 공부를 해서 좀 알면 머물지 않고, 무상보리를 위하여 성불까지 쉬지 않고 육바라밀을 닦는 분들이시다.
보살승이란 보살이 탈것이라는 의미로 큰 수레(大乘)를 타는 구도자가 의지해야 할 6바라밀(六波羅密)을 닦아 깨달음을 구하는 길이다.
세 번째가 우차(牛車)로 소가 끄는 수레이기 때문에 튼튼하고 많은 짐을 실어 나를 수 있다. 이것이 바로 초기 대승불교의 이상인데 보살을 상징하는 것으로 육바리밀(六波羅密)에 의지하여 자신과 남을 해탈케 하고 마침내 성불(成佛)하는 것을 이상으로 삼는다.

4) 불법계(佛法界)·불승(佛乘)
자각가타(自覺覺他). 각행궁만(覺行窮滿)의 경계

부처는 자각이라 스스로 깨달아 증득하고, 각타라 남도 깨닫게 해주는 것이다. 따라서 우리는 일체종지(一切種智)를 다 갖추어야 부처를 성취할 수 있다.
네 번째가 대백우(大白牛)로 크고 힘이 센 수레이다. 즉 부처는 자기도 남도 깨닫게 하는 것이 궁만(窮滿)하여 끝까지 완전무결(完全無缺)하다.
불교에서는 우리와 같은 범부중생(凡夫衆生)들 외에 깨달음의 정도에 따라서 성문승(聲聞乘). 연각승(緣覺乘). 보살(菩薩)이라는 성인들이 있는데 이들의 깨달음도 완전하지 못한 깨달음이므로 부처라 하지 않는다. 즉 성문(聲聞)이나 연각(緣覺)의 도인(道人)들은 겨우 자기 밖에는 못 깨닫는 단계이고, 보살(菩薩)은 자기도 남도 깨닫게 하지만 아직 원만하지 못한 것이다. 그래서 내가 얼마나 남한테 잘 베푸는가? 인욕은 얼마나 하는가? 선정은 잘 하는가? 용맹정진은 얼마나 잘 하는가를 확실하게 점검하여 진취적이고 발전적으로 실행하여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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