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영섭 스포츠 컬 럼 ] 복싱을 진정으로 사랑한 열혈남아 방송인 임성훈
조영섭기자
승인
2024.10.04 10:18
의견
18
[시사의창=조영섭 기자] 아주 오래전 복싱경기장에서 필자의 시선을 사로잡는 말쑥한 양복 차림의 중년 신사가 시야에 포착된다. 주인공은 방송인 임성훈씨 였다. 그는 메이크업 없는 맨 얼굴로 나 홀로 경기장에 입장 꼿꼿히 선체로 복싱경기를 직관하고 있었다. 반가운 마음에 필자는 정중하게 명함을 드리면서 좌석을 제공했다.
잠시 후 지금도 체육관에서 운동을 하고 계시냐고 묻자 그는 그렇다고 화답을 한다. 사실 만인들에게 얼굴이 알려진 각계각층의 공인(公人)들이 복싱경기장을 찾는 경우는 더러 있었다. 그러나 대부분 가족들과 아니면 지인들과 함께 어울려 참관하는 경우가 대다수였고 임성훈 씨처럼 단독으로 입장 참관하는 경우는 극히 드물었다. 이는 상식적으로 생각할 때 용광로(鎔鑛爐)보다 뜨거운 복싱에 대한 열정이 없으면 실행할 수 없는 파격적인 행동이었다. 만일 임성훈씨가 필자의 글을 탐독한다면 그때 필자와 짧은 경기장에서의 만남을 기억하리라 믿는다.
사실 필자와 임성훈씨와 조우(遭遇)는 초면이 아니었다. 지금으로부터 35년전 홍수환 챔프가 상계동에서 체육관을 개관할 때 그때 그곳에 참석한 임성훈씨를 그때 인사를 했던 인연이 있었다, 당시 현장에서 임성훈씨는 현역에서 무패로 은퇴하고 한국관 영업부장으로 활동하고 있는 권철을 보자 반색을 하면서 왜 뛰어난 재능을 뒤로하고 현역에서 일찍 은퇴했냐고 말하면서 진한 아쉬움을 표했다.
곁에서 그 짧은 한마디를 경청한 필자는 복싱에 대한 그의 깊은 사랑과 뜨거운 애정을 온몸으로 느낄수 있었다. 근자(近者)에 홍수환 챔프는 필자와 담화에서 내 친구 성훈이는 중학 시절 태권도를 경복고에 입학해서는 성동중앙체육관에서 복싱을 배웠다. 그리고 방송 활동을 하면서는 망중한(忙中閑)을 이용 강남에 위치한 하얀손 복싱 체육관에서 복싱을 쉼없이 수련한 복싱의 열정이 넘치는 친구라고 말했다.
연세대학(사학과) 재학시절엔 응원단장으로 활동한 임성훈씨의 지난 경력을 밝힌 홍수환 챔프는 더불어 그 친구는 대단한 오토바이ㅡ광이라고 말하면서 우리 모친(황농선 여사) 칠순 잔치에도 흔쾌히 참석한 절친이라고 밝혔다. 글을 쓰면서 홍 챔프가 임성훈씨가 연세대 출신이라고 말하는 순간 불쑥 떠오르는 생각은 MC 임성훈씨의 모교인 연세대 출신중에 1세대 아나운서 임택근을 비롯 손범수 백지연 황현정 윤인구 전현무 손범수 차인태 김동건 같은 유명 아나운서들이 유난히 많이 포진되어 있음을 글을 쓰면서 새롭게 깨닫는다. 한편 중앙고 출신 홍수환 챔프와 같은 1950년생인 임성훈은 조용필과 같은 동갑으로 그가 방송에 본격적으로 출현(出現)한 해는 1976년이다. 그해에 시골길이라는 대뷔곡을 불러 이곡이 공전의 히트를 치면서 전국에 얼굴을 알렸다.
그후 영역을 넓혀 타고난 순발력과 재치 그리고 시청자들을 편안하게 이끌어가는 공감 화법으로 1980년대부터 오늘에 이르기까지 프로그램 진행자인 간판 MC에 정착 큰 인기를 누리고 있다. 한편 임성훈의 절친 홍수환 챔프도 1976년 임성훈의 히트곡 <시골길>이 전국에 울려 퍼지던 그해 5월 WBC 밴텀급 챔피언을 지낸 47전 43승 (31KO) 4패를 기록한 태국의 별 베니세 보코솔과 동양 밴텀급 타이틀전을 벌여 12회 판정승을 거두고 14개월전 LA에서 자모라에 당한 상흔(傷痕)을 말끔하게 치유하면서 재기의 발판을 마련한 의미 있는 한해였다.
자기가 맡은 분야에서 독보적인 존재로 생존하려면 우연한 영광은 절대 없다. 천번의 연습을 <단> 만번의 연습을 <련>이라 할 때 이를 통해 반복적인 단련(鍛鍊)을 해야만 비로소 자기가 맡은 분야에서 월계관을 쓸 수 있다. 이는 세상사 모든 일이 인과응보 자업자득으로 연결되어 있기 때문이다. 끝으로 소중한 정보를 제공해주신 홍수환 챔프에게 감사함을 전하면서 더불어 방송인 임성훈씨의 변함없는 복싱 열정에 다시 한번 격한 응원의 박수를 보낸다.
저작권자 ⓒ 시사의창, 무단 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