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두섭의 여행스케치] 변화되는 환경의 상황에서 만들어지는 작가의 생각

나의 주변에서 이루어지는 것들은 아무도 모른다

편집부 승인 2024.09.06 18:26 의견 0

더위가 기승을 부리고 있다. 밤이 되어도 숨이 막히는 더위는 좀처럼 가시질 않는다. 매스컴에서는 열대야의 더위가 왜 지속되는지를 설명하고 기록을 경신할 것인지에 관한 관심을 이야기하고 있다. 더 이상 참을 수 없다는 마음이 들게 된 오늘, 118년 만에 가장 긴 열대야라고 보도되었다. 그 소식을 접하는 순간 겹겹의 희망이 사라지는 느낌. 한숨이 나온다. 그러나 어쩌겠는가. 퍼질 수는 없다고 다짐하며 붓과 물감을 꺼낸다. 직업병이겠지. 사람들이 이런 무더위에 인내하며 일을 하듯이 나도 습관적으로 그림을 그리려고 물감을 짜놓는다. 하얀 바탕의 파렛트에 여러 색을 배치한다. 보통의 경우 노란색을 중심으로 우측으로는 연두, 초록, 파랑 계열의 색들이 배치되고 좌측으로는 주황, 빨강, 갈색, 고동을 배치해 두면 비 온 뒤 파란 하늘에 있는 아름다운 무지개를 보는 것 같은 설렘이 있다. 물감을 짜둔 것만으로도 아름다운 그림이 그려진 것 같은 느낌이다. 이런 감상법이 그 어렵다는 추상화를 보는 방법일 수도 있지 않을까.

<귀여리> 이두섭

[시사의창 2024년 9월호=이두섭 작가] 물감을 짜둔 후 갑자기 든 생각. 더위에서 용감하게 걷는 일을 새삼 느끼려 작업실의 문을 씩씩하게 열어젖히고 밖으로 나섰다. 치기 어렸던 젊은 화가일 때는 더우면 더운대로 추우면 추운대로 그것들을 두려워하지 않고 밖으로 나가 사생한 적이 많았다. 지금, 이번 여름의 열기는 겨울 난방기에서 뿜어져 나오는 듯한 열풍의 바람이 불었고 꿉꿉한 습기가 피부에 닿았다. 익숙하지 않은 거리의 풍경들이 불편하게 좀처럼 가까이 다가오질 않았다.

길을 나서서 많은 땀을 흘리며 걷다 보니 집 근처에서 제법 떨어진 귀여리에 오게 되었다. 경기도 광주시 남종면에 있는 귀여리에는 유명한 곳이 있는데 그곳이 물안개 공원이다. 물안개 공원의 원래 명칭은 귀여섬이었다. 건너편으로는 양수리와 팔당댐을 조망하며 넓은 강가에서 한적하게 나 자신을 바라볼 수 있는 곳이다. 물안개 공원의 나무들은 햇볕에 늘어져 있다. 그 나무들은 뜨거운 햇빛을 나와 함께 공감하며 작업에 대한 어떤 예지를 줄 수 있을까. 강의 끝자락을 향해서 걷고 또 걸었다. 강 건너편의 풍경들은 여름을 더욱 강조하고 있었고 바람이 만들어 내는 잔잔한 물결의 무늬는 바람의 길을 가시적으로 보여주고 있다.

강가의 작은 벤치에 앉았다. 그 벤치는 큰 나무 아래에 있어 두꺼운 그림자를 드리워줘서 아주라고 할 수 없지만 적당하게 시원한 자리를 만들어주었다. 이곳에서 여러 생각을 하는 중에 얼마 전 신촌에 있는 갤러리에서 보았던 도미니카 출신의 밀도 세발리에(Mildor Chevalier)라는 작가의 그림을 기억 속에 넣어 두었는데 그 작가를 떠올리게 되었다.

뉴욕에서 작품 활동하고 있는 그는 이민자의 삶을 사는 화가이다. 정체성, 즉 소속감의 문제로 촉발되는 밀도 작가는 떠도는 자로서의 불안함을 작업 속에 녹여내고 있다. 내가 누구인지를 이야기해 주는 사람 없는, 스스로 자신을 지켜야 하는 절박한 상황을 알아줄 리 만무한 세상, 그곳, 험한 세상에 던져진 느낌이지 않을까. 그것의 불안함을 치료해 주는 유일한 안식처가 화면이었다고 한다. 그런 평화의 채널을 갖고 있는 그의 얼굴엔 절대 외로움이 승화되어 평온한 모습이 얼비쳤다.

<귀여리> 이두섭


어디를 도착하든, 희망의 땅이든, 의도하지 않은 장소, 그 어떤 형태의 땅이라도 우리가 느끼는 고독이 있을 수 있고 그런 것들을 통해 새로운 미술 언어를 만들어 내는 작가들은 세상에 없는 것들을 만들어 나가는 사람들이라 볼 때 이방인의 감성적 고통을 승화시켜 나가는 과정이야말로 구도자의 진리의 깨달음을 위한 과정과 별반 달라 보이지 않는다. 자신의 은밀한 경험과 환경을 통해 새로운 미술 언어를 그려내고 있는 말도 작가, 결국 이민자라는 신분은 새로운 것을 찾아 쟁취하려는 도전적 경로에 서 있지만 스스로가 느끼는 심리적 불안도 만만치 않았을 텐데 그것을 극복해 나가는 과정을, 그 비밀스러움을 누가 알아주겠는가.

예술의 목적이란 무엇일까를 생각해 본다. 삶이란 예술이라는 행위보다 상위에 있는 무척 중요한 부분이다. 예술은 삶의 일부분에 있을 뿐이다. 그러한 중요한 자기 삶에 좌표를 찍기 위해 예술은 어떤 역할을 해야 하는지 생각해 봤다. 삶의 중요성을 우선에 두고 생각해 볼 때 질문을 던지고 그 질문을 통해 관점을 확장시키는 것이 나의 진정한 발전과 성장이라 믿는다.

그림을 그린다는 개념보다 흐름이라는 유기적 현상에 신경쓰고 있다. 나 자신의 바깥쪽에 있는 것에 대하여. 현대 미술의 중요한 방점을 찍고 있는 얼굴 없는 낙서화가 뱅크시처럼 사회와 직접 연결되는 기민한 장소에서 작업은 나의 스타일이 아니므로 캔버스 안에 아무런 분노도 욕심도 희망도 절망도 없이 그림을 어떻게든 만들어 내야 한다. 그곳엔 평화만 있을 뿐 그 평화를 어떤 색이나 형태로 만들어 내느냐의 자세를 고민하며 많은 시간을 보내고 있다.

<귀여리> 이두섭


그림 그리기가 막연할 때는 일단, 그림과 맞닥뜨려 그림을 그리기 시작한다, 그러면 그 막연했던 그림이 나에게 말을 건다. 어떻게 그려 달라며 내 생각을 불러낸다. 그것의 시작이 그림에 몰입되는 시간이다. 자신만의 표현력을 극대화하는 것이 작업의 태도라 믿고 있는다. 어떤 사람은 묘사할 수 있는 능력이 있고, 어떤 사람은 빛을, 그 각자의 방법으로 자신의 표현 방법으로 구분하는 것도 좋은 작업의 자세인 것 같다.

내 일상에서 멀어져 낯선 곳으로 오니까 보이는 풍경들이 새로워서 좋다. 새로운 것들을 해석하는 조형 언어를 누가 알아주겠는가. 그래서 예술이라는 분야는 논리. 합리에서 탄생되기도 하지만 많은 부분 비논리와 불합리의 영역에서 감성에서 증폭된다고 믿는다. 오늘처럼 더운날 나를 볶아 새로운 생각으로 들어가는 날이 비합리의 태도인 듯.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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