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차중의 여행에세이] 새 세상의 염원, 운주사

편집부 승인 2024.09.06 18:20 의견 0
운주사 일주문


[시사의창 2024년 9월호=김차중 여행작가] 천 개의 탑과 천 개의 불상이 있었던 운주사 마지막 천 번째 불상은 일어서지 못한 것일까? 세 가지의 창건 설화가 있는 곳 신비로운 운주사 앞에 섰다. 도선국사가 창건했다는 이야기와 운주스님이 창건했다는 설, 그리고 마고할미가 세웠다는 이야기가 전한다. 도선국사는 고려 태조 왕건의 탄생을 예견한 우리나라 풍수지리의 원류이며 비보풍수 이론을 만든 통일신라 말의 고승이다. 그가 이곳을 비보 사찰로 세웠다고 전해지는데 이곳의 지형이 배 모양으로 되어 배의 돛대와 사공을 상징하는 천불과 천탑을 세웠다고 전한다. 우리나라의 동쪽에 산이 높아 한쪽으로 기울어질 수 있으니 배에 돛을 단 것이다. 풍수에서 비보(裨補)는 약한 기운을 돕고 강한 기운을 가라앉히는 것을 뜻하는데 기존의 지형에 숲이나 탑 등을 세워 균형을 맞추고 지형의 힘을 북돋아 주는 역할을 한다. 이런 방식으로 도선국사는 전국에 3,800개의 비보 사찰 터를 정했고 500개의 사찰을 창건했다. 이 기록은 굉연이 지은 "고려국사도선전"에 실려있다.

운주사9층석탑 보물 제796호


운주사는 황석영의 소설 "장길산"에 민중들이 새 세상을 꿈꾸며 천불천탑을 세웠다는 소재로도 쓰였다. 많은 이야기가 전해진다. 그렇지만 아직 운주사는 어떤 이유로 누구에 의해서 창건되었는지 기록을 찾을 수 없다. 한국신화의 창조의 여신 마고할미가 세웠을 수도 있다는 가능성도 배재할 수 없지 않을까?
한 발 한 발 신비로운 운주사 안으로 향한다. 천불천탑은 현재 93구의 석불과 21기의 석탑만이 남아있다. 동국여지승람에 기록된 일천 개의 석불과 석탑은 어디로 사라진 것일까? 천상 세계로 올라간 것일까? 소설로 인해 유명해지기 전까지 운주사는 숨겨진 사찰이었다. 오랜 기간 동안 이곳의 석물들은 사람들에 의해 어디론가 옮겨졌을 것이다. 평평하기도 하고 잘 다듬어져서 여러 곳에 활용되었을 것이다. 사라진 석물이 안타깝지만 불상과 탑이 남아있다는 것이 얼마나 다행스러운 일인가.

쌍교차문7층석탑


양쪽 산줄기의 골에 자리 잡은 절터는 세로로 긴 배의 윤곽이다. 대웅전은 가장 깊숙한 곳에 위치하고 일주문부터 본당 주변 그리고 양쪽의 언덕 곳곳에 탑과 석불이 자리한다. 양쪽의 산 위로도 탑 상단부가 고개를 내밀고 있다. 가장 큰 탑인 보물로 지정된 운주사 9층석탑이 가장 먼저 모습을 드러낸다. 각 층의 탑신마다 마름모 안에 꽃무늬가 그려있다. 틀림없이 사람이 만든 것이지만 천년이 넘는 세월 동안 자연에 동화되어 인위적인 느낌이 들지 않는다. 모든 석물이 그러하다. 탑신 앞면에는 'X'자 두 개가 있고 측면에는 마름모 문양이 세겨진 쌍교차문 7층석탑은 처음 보는 탑의 문양이다. 사람을 표현한 형상일까? 두 사람이 탑을 들어 올리는 모습이다.

와불, 비로자나불과 석가모니불


동쪽 언덕 아래는 여섯 구의 석불이 화산재와 돌덩이가 쌓여 만들어진 응회암에 기대어 있다. 이곳의 석불과 석탑은 대부분 납작한 응회암으로 만들어졌다. 납작한 석불이 많은 이유도 층으로 퇴적된 응회암이 많았던 이유일 것이다. 경내 어디선가 옮겨져 모인 석불은 60cm부터 2m가 넘는다. 나만의 해석이지만 4인 가족과 그들을 인도하는 승려가 부처님과 함께 두 손을 모으고 기도하는 모습이다. 그 위로는 자연 돌 그대로를 얹은 원초적 모습의 탑이 절벽 위에 가까스로 균형을 잡고 서 있는 모습이다. 가공되지 않은 탑은 무소유탑이라 불린다. 다른 절과 유사점을 찾아볼 수 없을 만큼 탑과 석불은 기이하기만 하다. 유일하게 광배를 지닌 불상을 지나 불탑 사이로 집 안에 부처의 모습이 보인다. 불상은 앞뒤 두 기로 서로 등을 맞대고 있다. 보물로 지정되어 있는 석조불감이다. 남쪽의 불상은 촉지를 하는 모습이고 뒤쪽의 불상은 두 손 모아 합장하는 모습이다. 불감이란 부처님을 모시기 위해 만든 집이나 방을 말한다.

운주사 특유의 불상


본당을 앞에 두고 와불을 향해 서쪽 언덕으로 향했다. 와불로 오르는 길은 약간의 산행이 필요하다. 그러나 그 길을 오르면 남매탑과 시위불 그리고 바위 그늘에 참선 중인 다양한 모습의 불상이 있다. 탑은 아래에 있는 것과 유사하지만 어느 절에서도 볼 수 없었던 시위불은 특별하다. 시위란 호위 무사 정도를 뜻한다. 현재 누워있는 두 기의 와불은 커다란 불상이 비로자나불, 좌측의 불상이 석가모니불이라고 한다. 우측에 노사나불이 나란히 누워있었는데 이 불상이 일어나서 현재의 시위불이 되었다는 설화가 있다.
와불에 도착했다. 이야기대로 비로자나불상과 석가모니불상이 나란히 누워있다. 도선대사가 새벽닭이 울어 일으켜 세우지 못했다는 전설이 맞는 것일까? 둘의 균형이 맞지 않은 것을 보면 시위불처럼 일으켜 세울 용도로 조각하여 놓았을 수도 있겠다는 생각이 들기도 한다. 그러나 하늘을 보며 누워 있는 모습도 어울린다. 천년이 넘는 세월 동안 비바람을 견디며 형체를 유지한다는 것도 놀라운 일이다. 곳곳에 상처가 남아있지만 두 얼굴의 미소는 평온하기만 하다. 와불을 뵈옵고 내려오는 길에 커다란 바퀴처럼 생긴 원형의 돌들이 놓여있다. 북두칠성을 형상화한 칠성바위이다. 다녀볼수록 신비스러운 사찰이다.

석조불감 보물 제797호


소설 ‘장길산’의 마지막 장은 운주사의 탄생 이야기로 장식된다. 나라를 잃은 후백제 유민들은 하룻밤에 천불천탑을 지으면 도읍지가 이곳으로 바뀐다는 이야기를 들었다. 수도가 바뀐다는 것은 세상이 바뀐다는 것이다. 민초들이 주인이 되는 시대가 온다는 것이다. 부처의 머리가 발 쪽보다 낮은 쪽으로 기운 것도 세상이 거꾸로 돌아가니 그렇게 조각한 것이다. 미륵을 일으켜 세울 차례다. 몇 번을 시도했지만 조금씩 들어 올려질 뿐이다. 이때 지쳐버린 한 사람이 닭 우는 소리가 들린다고 거짓을 외친다. 사람들의 힘을 모으느라 북으로 장단을 맞추던 사람이 체념 하여 북채를 던진다. 불상을 일으켜 세우던 사람들도 그 자리에 털썩 주저앉는다. 미륵을 일으켜 세우지 못한 채 모든 작업은 마무리된다. 세상은 바뀌지 않는다. 하지만 사람들은 새 세상이 올 것이라는 믿음을 버리지 않는다. 열두 권의 소설 장길산은 그렇게 운주사에서 끝을 맺는다.
나는 다시 이곳에 와서 93구의 석불과 21기의 석탑을 찾고 아직 제대로 느끼지 못한 운주사의 정취와 당시 민초들의 목소리와 곳곳에 간직한 수수께끼들을 하나씩 들어봐야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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