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화제의 인물] ‘안병진 도자 옻칠 展’에서 만난 안병진 교수가 말하는 42년의 도예 여정

안병진 도예가 “누가 훔쳐가는 도자기를 만들면 성공이다.”

편집부 승인 2024.09.06 12:34 의견 0

지난 8월 10일, 여주 빈집예술공간에서 진행하고 있는 ‘안병진 도자 옻칠 展’에 다녀왔다. 기자의 연락을 받고 작업장에서 전시장으로 급히 나온 안 교수는 소탈한 모습과 달리 열정적인 작품 설명으로 도자(陶瓷)에 문외한인 기자의 눈과 귀를 뚫어줬다. 도예(陶藝)를 시작한 지 42년째, 26번의 개인전을 연 안병진 교수는 단국대학교 도예학과 1기 학사, 석사를 거쳐 조형대학원에서 박사 과정을 수료한 한국 도예계의 산증인이다. 젊은 시절부터 도예에 대한 열정으로 살아온 그의 삶과 예술은 단순한 도예를 넘어 끊임없는 자기 발전을 이루며 전통과 현대를 아우르는 작품 세계를 창조했다. 후학 양성에도 힘을 기울인 안 교수는 제자들이 이제는 한국 도예계를 이끌어가는 핵심 작가로 성장했다며 흐뭇함을 감추지 못했다. 예술에 대한 깊은 사랑과 노력으로 42년의 도예 여정을 걸어온 안병진 교수의 삶과 철학을 들어본다.

도예가 안병진 교수


[시사의창 2024년 9월호=김성민 기자] 도예를 시작한 계기는
1919년생인 선친(先親)이 일제 강점기에 동경예술대 조각과를 졸업한 대한민국 조각계의 1세대셨습니다. 어릴 적에 선친의 조각을 옆에서 지켜보거나 단순 작업을 도와드리면서 자연스럽게 예술에 대한 잠재력이 응축되지 않았나 생각합니다.
제가 고등학생 시절 단국대학교에 재직 중이던 선친이 단국대학교 상징인 곰상을 조각하고 계셨어요. 어느 날 선친께서 수원 시립미술관에서 도자기 전시회가 있으니 가서 보고 마음에 드는 도자기 한 점을 가져와 보라고 하셨지요. 전시회에 갔더니 마음에 드는 달항아리 작품이 있어 골랐습니다. 그랬더니 선친의 제자였던 홍승인 도예가(전 경기미협 지부장)께서 “네가 이걸 어떻게 알아서 골랐니?”라며 놀라시더라고요. 백자 달항아리를 가져와 선친께 드렸더니 “좋은 그림이 그려져 있는 화려한 작품들이 많을 텐데 왜 이걸 가져왔어?”라고 물으셨어요. 그래서 제가 “형태가 좋고 아무것도 없이 깨끗해서 골랐습니다.”라고 답했더니 선친께서 “단국대학교에 도예과가 신설되는데 거기 한번 가볼래”라고 넌지시 권하시더군요. 그래서 결국 단국대학교 도예과 1기로 입학하면서 도예의 길로 접어들게 됐습니다.

학교생활을 추억한다면
도예과 입학하면서 도예가 저와 궁합이 잘 맞는다는 걸 새삼 느꼈습니다. 학교생활 4년 동안 집에 가는 날이 한 달도 채 되지 않을 정도로 도예에 완전히 미쳐 지냈습니다. 학교에서 먹고 자는 생활을 하면서 방학 때도 교수님에게 불려가 작업을 했습니다. 결국 학교생활의 추억은 물레 돌리는 작업 외에는 거의 없다고 봐야겠죠.


졸업 후 활동은
87년도에 88올림픽 기념 문화올림픽이 처음 열렸습니다. 이때 물레 돌리는 대회에 출전해 종합대상을 받았고 이 장면이 당시 극장에서 영화 시작 전 보여주던 대한뉴스에 계속 나오던 시절도 있었습니다.
1998년도부터 2016년까지는 여주대학교 교수로 재직하면서 후학을 양성했습니다. 교수 임용이 대부분 40대였는데 저는 33살에 교수로 임용됐으니 굉장히 빨랐죠. 이때 가르쳤던 제자들이 지금은 한국 도예계에서 중추적 역할을 하고 있어 감사한 마음으로 지켜보는 것도 저의 보람입니다.
이외에도 기획 프로듀서, 초대작가, 각종 대회 심사위원 및 운영위원으로 활동하고 있습니다.

안 교수님 작품에 영향을 가장 많이 끼친 분은
그 시절 동경예대 조소과를 졸업하신 저의 선친 안찬주 조각가께서 저에게 예술가의 끼를 물려주셨다고 한다면 단국대 도예과를 만드신 故 김석환 교수님은 저를 지도해주시고 지금까지도 제 작품에 영향을 끼치는 분입니다. 지금은 고인이 되셨지만, 안양에 돌석 도예박물관을 설립하셔서 50여 년간 전념하신 도예작품을 전시하셨지요. 은사이신 김 교수님 문하에 12년간 있으면서 제 작품 세계를 구축할 수 있었습니다.
그분은 “도자기를 빚을 때는 먼저 그릇의 형태를 예쁘게 만들어야 다음 작업을 이어갈 수 있다. 뼈대가 안 됐는데 옷을 아무리 잘 입혀도 소용없다”라고 가르치셨습니다. 또한 “이름 석자를 남기려 노력하지 마라. 네가 작업한 작품이 좋게 평가되면 다행히 이름 석자가 남을 것이요, 그렇지 않다면 어쩔 수 없는 것이다”라는 당부도 하셨습니다. 지금도 은사님의 말씀을 잊지 않고 살아가고 있습니다.


42년의 도예 여정이 쉽지는 않았을 텐데
지금까지도 쉽지 않은 여정이었지만 앞으로도 험한 길이 많이 남아 있습니다. 어쩔 수 없는 예술인의 길이자 숙명이지요. 하지만 아무리 어려워도 예술인의 자존심을 팔 수는 없습니다. 선친도 고생을 많이 하셨지만, 자식들에게 부끄럽지 않게 살려고 수많은 유혹을 뿌리치시는 모습을 본 제가 다른 생각을 할 수는 없지요. 대를 이어 도자기 작업을 하는 저의 자식에게 부끄럽지 않은 아버지로 살고자 노력하고 있습니다.
달항아리 백자는 배통(지름)이 46cm를 넘어야 제대로 된 평가를 받는데, 물레로 이 작업을 할 수 있는 사람이 많지 않습니다. 그래서 저에게 작업을 부탁하며 자기 이름을 새기려는 사람들로부터 돈의 유혹을 자주 받습니다. 하루 작업해주고 만만치 않은 돈을 벌 수 있는 일이지만 결국은 마이너 작가가 되어 선친뿐만 아니라 자식에게 누를 끼치는 일이니, 거절할 수밖에 없습니다. 앞으로도 유혹에 빠지지 않고 저만의 작품 세계를 구축해나갈 생각입니다.

도자에 옻칠 작업, 탱자나무, 금칠(금분) 등 특이한 점이 많던데
작품에 예술성을 가미하면서 부가가치를 높이고자 여러 콘텐츠를 시도하고 있습니다. 옻은 재배역사가 4천 년이 넘을 정도로 우리 민족과 밀접한 관계가 있는 식물로 고대 시대에는 방수용, 중세 시대에는 목재 보호제로 사용해 왔습니다. 현재는 농업용, 의료용, 화장품 등에 광범위하게 사용되는 유익한 물질입니다.
전 국토의 토양이 도자기를 만들 수 있는 대한민국이기에 도자기가 풍부한 현실에서 전시회에 백자를 출품했을 때 도자 애호가나 수집가들의 관심도가 떨어지지만, 도자에 옻칠과 탱자나무, 금분을 입히면서 관심도가 높아지고 있습니다. 당연히 부가가치도 높아져 안정적인 작품활동을 하는 데 도움이 됩니다. 옻칠 작업은 7번의 작업을 거치며 완성됩니다. 한 번 칠하고 사포로 면을 고르게 다듬고, 두 번 칠하고 다시 다듬는 작업을 반복합니다. 반복된 작업을 통해 작품의 완성도가 높아지는 한편 부수적인 효과로 저는 건강이 눈에 띄게 좋아졌습니다. 옻이 가진 면역력 덕분인지 감기 한 번 걸리지 않고 코로나도 비켜 갔습니다. 옻칠 도자기를 소장하신 분들도 같은 효과를 볼 수 있을 거라고 생각하고 있습니다.
달항아리에 얹혀놓은 탱자나무는 건조가 다 되면 금분을 할 겁니다. 탱자나무 가시는 건조가 완성되면 타어어를 뚫을 정도로 강도가 더 세집니다. 예로부터 액운을 물리치고, 외부의 침입을 차단하기 위해 사용한 탱자나무 가시와 도자의 결합은 소장가들의 정신적 건강에 도움을 줄 겁니다.
도자기 뚜껑 손잡이에 금칠한 물고기는 다산을 기원하는 의미가 있습니다. 더불어 길조인 물고기에 부를 상징하는 금까지 입혀 소장가들의 행운과 부를 상징하고 있지요.
이렇게 지난한 작품활동은 작품 소비자인 도예 소장가들에게 흔한 백자보다는 좀 더 특별한 작품을 소장할 기회를 제공함은 물론 도예작품의 영역 확장 등 여러 긍정적 효과가 있습니다. 교수 재직 시 제자들에게 “누가 훔쳐 가는 도자기를 만들면 성공이다”라고 가르쳤던 내용을 저 스스로 지키는 일이기도 합니다.


안 교수님의 작품을 소장하고 있는 곳은
많이 있습니다. 한국도자재단, 증권 위탁소, 대전담배인삼공사, 한국항공우주연구소, 한국원자력안전기술원, 서울 프레스 센터, 진로 문화재단, 영암 미술관, 경덕진 도자 미술관, 경덕진 도자 대학, 중국 용천 청자연구소, 단국대학교, 쏘노펠리체CC에 가시면 제 작품을 감상하실 수 있습니다.

3대째 이어지는 예술가 집안이라는데
1919년생인 선친은 평양 제일고 출신으로 동경예술대 조각과를 졸업하시고 단국대 상징인 곰상을 조각하신 분입니다. 그 당시에 큰 키에 도리구찌를 쓰시고 올림푸스 카메라를 들고 다니시는 멋쟁이셨죠. 미스코리아 심사위원장을 역임하신 선친은 하숙집 아들, 딸이 김옥길 이화여대 총장과 김동길 연세대학교 교수였어요, 그래서 김동길 교수는 선친의 후배이자 제자이며 김옥길 총장은 첫사랑 같은 좋은 친구로 지내셨어요. 김동길 교수 옆에 붙어 다니던 가수 조영남 씨가 선친께 형님이라 부르며 따랐던 기억도 있습니다.
제가 32살 때 첫 전시회를 열었는데 선친께서 오셔서 울더라고요. 선친은 생활이 어려워 개인전을 한번도 못하고 돌아가셨거든요.
이번에 홍대 대학원을 졸업하는 딸도 도자기를 하고 있지만 조형 쪽을 하고 있어요. 도예 작업은 물레와 조형, 이렇게 크게 두 분야로 나눌 수 있는데 저는 물레 작업, 딸은 조형 작업으로 작품을 만들고 있어요. 조형이라고 하면 물레와 무관하게 보이지만 딸은 여성에게 고난도 작업인 물레도 잘합니다. 고등학교, 대학교 시절에 발로 돌리는 전통 물레대회 최우수상을 수상할 정도로 실력이 있습니다. 도자기를 하는 사람의 기본은 물레이기에, 조형을 하더라도 물레를 익혀야 한다는 제 지론을 잘 따라준 덕분이라고 생각하고 있습니다.
또한 한국카톨릭미술가협회 안병철 회장이 제 형님입니다. 2014년 프란치스코 교황의 한국 방문 때 철거한 비무장지대의 철책선을 일부 구해서 가시면류관을 만들어 교황에게 봉헌했던 분입니다. 두 점을 만들어 하나는 로마 교황청에 있고, 또 다른 하나는 한국 카톨릭 교구에 있습니다.
이렇듯 선친의 예술적 DNA를 물려받은 형제들과 저의 딸까지 창작 작업을 하는 3대째 이어지는 예술가 집안이 맞습니다. 4대까지 이어질지는 아무도 모르지만, 우리나라 문화예술 발전에 기여하는 집안으로 기억되기를 바랍니다.

인터뷰 중인 안병진 교수(우측)와 시사의창 김성민 발행인(좌측)


앞으로 활동 계획은
나이 들어가면서 변화를 추구하는 건 일반적인 생각에서 상당히 부담스러운 일입니다. 60세가 넘어가면서도 변화를 추구하는 저에게 주변에서 우려의 시선을 보내고 있습니다. 지금까지 했던 것들을 정리하면서 조용히 가야 하는 시기라고 조언합니다. 하지만 제 생각은 다릅니다. 우리 이전 세대의 60세는 정리해야 할 시기일 수 있으나 100세 시대를 살아가는 지금, 60세는 새로운 도전을 꿈꾸어야 할 시기입니다. 지금까지 쌓아온 경험과 경륜을 바탕으로 새로운 예술 세계를 개척하고 발전시켜 후대에 물려줘야 할 책임이 있습니다. 나이가 들면서 정신이 더 맑아지고 하고자 하는 방향이 확실하게 정립되고 있습니다.
활동 계획 첫 번째는 앞으로 소외당하고 있는 물레 작업 발전과 활성화에 노력할 계획입니다. 우리 선조들이 발전시켜온 청자 백자를 만드는 데 기본인 물레가 발전해야 도예가 발전할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지금 도예를 하는 젊은이들이 결국은 물레를 다 배우는 시기가 도래할 겁니다.
두 번째는 대형 백자 작업을 할 계획입니다. 현재 소노펠리체CC가 소장하고 있는 3m 정도 되는 제 작품이 있지만 이보다 큰 4m, 5m 대형 백자 작업을 하고 싶습니다. 이를 위해 조만간 중국으로 갈 생각입니다.
현재 우리나라에는 불행하게도 3m 이상 되는 백자를 만드는 작가가 없습니다. 아마도 대형 가마가 한국에 없기 때문일 겁니다. 제가 중국에서 4m 가마까지는 봤는데 듣기로는 7m 가마도 있다고 합니다. 거기에서 대형 백자를 만들어 한국에서 전시를 꼭 해보고 싶습니다.
세 번째는 도예 작가들이 안정되게 창작활동을 할 수 있도록 갤러리 전속작가 제도 부활을 위해 노력하겠습니다. 예전에는 대기업들이 운영하는 갤러리에 전속작가 제도가 있어 전업 작가를 후원했었는데 지금은 사라졌어요. 작가들은 한 달에 생활비 2~300만 원만 있으면 창작에 전념할 수 있는데 그런 여건을 가진 작가들이 예상외로 적습니다. 결국은 창작할 시간에 공사판에 나가 아르바이트를 할 정도니까요. 대기업이 작가들에게 창작활동 할 수 있는 여건을 만들어주고 세제 혜택을 받는 제도의 활성화가 필요해 보여, 이를 위해 조그만 힘이라도 보탤 생각입니다.

창미디어그룹 시사의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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