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영섭 스포츠 컬럼] 나의 첫 작품 세계챔피언 최요삼 영원한 별로 빛나다

조영섭기자 승인 2024.09.05 10:31 | 최종 수정 2024.09.05 10:48 의견 22

[시사의창=조영섭 기자] 며칠전 필자가 운영하는 강동구 둔촌동 체육관에 손님 한 분이 방문했다. 본인을 시나리오 작가라고 신분을 밝힌 그 사람은 최요삼 복싱 스토리를 주제로 영화화(映畫化) 하려는 제작사에 일원이었다. 그는 거두절미하고 최요삼의 현역시절 숨은 비화 등 주요 부분의 밑그림을 그리려는 취지(趣旨)에서 필자를 찾아왔다고 밝혔다.

WBC라이트 플라이급 세계챔피언 최요삼


필자와 최요삼의 첫 인연은 지금으로부터 35년 전인 1989년 4월로부터 시작된다. 그해 2월 군 복무를 마치고 88 프로모션 심영자 회장의 부름을 받고 프로모션(관장 김철호)에 입성 그해 창단된 용산공고 복싱팀을 맡으면서 줄거리가 펼쳐진다. 당시 신입생으로 입학한 최요삼은 1973년 정읍 출신으로 1987년 영등포 중학교 2학년때 복싱에 입문 원진 체육관 김용석 사범의 지도로 1988년 김명복 박사 배(42Kg급) 에서 동메달을 획득한 클레버(Clever) 복서였다. 이듬해 용산공고 창단 코치로 임명된 필자의 지도를 받은 최요삼은 천부적으로 운동 센스와 체력이 뛰어난 발군의 복서였다.

6월에 개최된 학생선수권 출전한 요삼이는 준결승전 (45Kg급)에 진출 한정훈 사단의 대전체고 신은철에 판정패를 당했지만 소중한 동메달을 획득한다. 요삼이는 7월 화곡동 88체육관에서 벌어진 전국체전 선발전(45Kg급)에서 전국학생 신인대회 우승자 이근식(리라공고)과 치열한 타격전을 펼친 끝에 3ㅡ2로 고배를 마신다. 내용상 우세한 경기를 펼쳤지만 복싱계 마키아벨리라는 리라공고 사령탑 황철순이라는 명장의 인탠지블 파워(intang power) 는 에베레스트산보다 더 높았다.

1989년 화곡동 버스정류장에사 필자와 최요삼(우측)


27살의 새내기였던 필자는 그때 역사(?)는 밤에 이뤄진다는 현실을 깨달았다. 경기 후 요삼이와 난 화곡동에 있는 정류장에서 비통에 젖은 심정으로 버스를 타고 영등포 88체육관으로 돌아왔다. 그리고 1년이 지난 1990년 전국체전 선발전이 한국체대 복싱장에서 열렸다. 상대는 역시 리라공고 이근식이었다. 이근식은 그해 3월 제1회 회장배 전국선수권과 8월 세계청소년 선발전(페루)에서 우승을 차지한 2관왕의 관록이 묻어있어 난항(難航)이 예상됐다.

그러나 사즉생(死卽生)으로 무장한 요삼이는 복수혈전을 펼쳐 3ㅡ2 판정으로 이근식을 꺾고 우승과 함께 최우수상(MVP)을 받았다. 이때부터 그는 심영자 회장의 레이더망에 포착되어 각광을 받는다. 그리고 그해 8월 회장배 전국선수권대회에서 이광호(이리고)를 꺾고 우승을 차지하자 청주사대와 한국체대에서 스카웃 요청이 들어왔다.

그러나 그해 전국체전 본선 1회전에서 강원도 대표 차관철 에게 판정패를 당한다, 이 패배는 요삼이에게 엄청난 충격을 몰고 왔다, 하늘 높은 줄만 알았던 그가 땅 넓은 줄은 몰랐던 것이다. 경기 후 요삼이는 종적을 감추었다, 차관철에 당한 패배의 충격에 크게 낙심 사실상 복싱을 접은 것이다. 그렇게 2년이란 시간이 흐른 1993년 4월 어느날 요삼이가 날 찾아왔다. 복싱계 컴백을 선언한 것이다. 그런 요삼이를 곧바로 나는 워커힐 APT 22동 1002호에 입촌시켰다. 그곳은 심영자 회장이 선수들의 숙식을 위해 제공한 합숙소였다.

프로에 전향하기위해 찾아온 최요삼과 필자(우측)


요삼인 그해 7월 프로 대뷔전을 펼쳐 4회 판정승을 거두고 서전을 장식한다. 그리고 1994년 1월 MBC 신인왕전에 출전 라이트 플라이급에서 우승과 함께 우수신인왕에 뽑혀 기대에 부응했다. 그러던 1995년 6월 어느날 필자가 천안에 있는 충의 소년원 교도소로 복싱강사로 이적하면서 요삼이는 세계적인 트레이너 이영래 사범의 지도를 받으면서 기량이 일취월장한다.

그는 한국챔피언 동양 챔피언 세계챔피언에 순차적(順次的)으로 정상 정복에 성공 자신을 발탁 투자한 심 회장의 노고에 보은을 했다. 2000년 10월 16일 서울체고에 근무하던 필자가 강동구 둔촌동에 체육관을 개관할 때 WBC 라이트 플라이급 챔피언 요삼이도 참석 자리를 빛내주었다. 그날은 요삼이의 27번째 음력생일이었다. 여담이지만 요삼이는 불운의 챔프였다.

1993년 mbc신인왕전에서 필자 최요삼 이종성회장(우측)


IMF와 대란과 맞물려 스폰서를 구하지 못해 2년 4개월 동안 단 3차례의 방어전 밖에 치루지 못할 정도로 시대를 잘못 만난 불운의 아이콘 이었다. 2002년 월드컵 열기가 서서히 식어가던 그해 7월 4차방어전에서 멕시코 복서에게 벨트를 푼 요삼이는 고토회복(故土回復)을 위해 2007년 WBO 인터네셔날 타이틀을 획득하면서 다시 한번 세계정상을 노렸지만 예기치 못한 사고로 2007년 12월 25일 경기에서 35년의 짧은 생애를 끝으로 우리 곁을 떠나갔다. 세월이 흘러 그의 전담 트레이너 이영래 사범도 그를 후원했던 심영자 회장도 시간이라는 모래밭에 발자욱을 남기고 모두 떠나갔다.

문득 프랑스의 낭만파 시인 빅토로 위고의 어록이 떠오른다. 어제는 싸우는 것이고 오늘은 이기는 것이다, 하지만 마지막에 모두가 죽는 것 그것이 바로 인생이다. 끝으로 최요삼 챔프의 편안한 영면을 기원한다.

조영섭 기자 6464ko@naver.com

창미디어그룹 시사의창

저작권자 ⓒ 시사의창, 무단 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