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영섭 스포츠 컬럼] 복서 지망생에서 올림픽 레슬링 금메달로 변신한 한명우

조영섭기자 승인 2024.08.19 10:28 | 최종 수정 2024.08.19 10:34 의견 18
복서 지망생 한명우 체육인회 사무총장

88년 서울올림픽 레슬링 금메달 한명우선수


[시사의창=조영섭 칼럼니스트] 지난 주말 대한체육회 산하(傘下) 한국 체육인회 한명우 사무총장의 연락을 받고 이동포 유원대 복싱 감독 상계 백병원 협력 진료 센타 이해정 팀장과 함께 대한체육회를 방문 1층 식당에서 한명우 총장과 오찬을 하면서 담화를 나눴다.

한명우 총장은 대한민국 체육발전을 위해 우리에게 한국 체육인회에 가입을 권유했고 우리는 스스럼없이 흔쾌히 승낙했다. 식사 후 한국 체육인회 사무실에서 들렸다. 그곳에서 허창봉 체육인회 사무국장과 유재충 체육인회 실무 부회장을 만났다.

허창봉 사무국장 한명우 사무총장 유재충 부회장(좌측부터)


1941년 강원도 홍천태생의 허창봉 국장은 한국스포츠계 역사의 살아있는 전설이다. 1970년 대한체육회에 경기과장으로 입사 30년이란 세월에 걸쳐 벌어진 올림픽 세계선수권 아시안게임 등 각종 국제대회에서 치뤄진 전 종목 선수들의 기록을 작성 여러권의 책을 저술한 한국체육사의 산증인이다.

1948년 전북 익산태생의 유재충 체육인회 실무 부회장은 1988년 남자 헨드볼 팀이 남자 구기 종목 사상 최초(最初)로 첫 은메달을 따내며 기념비적인 업적을 창출할 때 대표팀 감독을 역임한 분이다

사람들은 누구나 최초이자 최고이고 싶어한다, 그러나 최고는 언제든지 바뀔수 있지만 최초는 영원이 지워지지 않는다, 그래서 남자팀 구기 종목 사상 최초로 세계대회(올림픽)에서 은메달을 획득한 유재충 감독이 지휘봉을 잡은 남자 헨드볼 팀이 더욱더 자랑스럽게 느껴진다. LA 올림픽때 11위의 성적을 낸 남자 헨드볼은 당초 목표 6위권 진입이 나태 내듯 메달권진입을 예상하는 사람은 전혀 없었다.

그러나 예선전에서 유재충 감독이 주도면밀한 용병술을 발휘 동구권의 강호 동독 체코 헝가리를 차례로 꺾는 돌풍을 일으키며 값진 은메달을 수확했다. 이날 동석한 이해정 팀장은 김덕팔 김성은 김동길 문성길과 함께 복싱 백년사에 아시안게임 2연패를 달성한 역대급 복서다. 1982년 뉴델리 아시안게임에서 허영모와 함께 금메달을 획득 이 시대 최후에 고교생 금메달리스트로 등재된 이해정은 86년 한국 아마복싱이 전 체급 석권 신화를 창출할 때 주역으로 대회가 끝나고 곧바로 은퇴를 선언했다.

홍콩 최고의 부자 리자청의 방에는 지지(知止)란 족자가 걸려있다. 직역하면 멈춤을 알아라 란 뜻이다. 최고의 추진력을 얻기 위해선 멈춤이란 재충전의 시간을 가져야 한다. 이처럼 88년 서울올림픽을 코앞에 두고 적당한 선에서 과감하게 물러나는 것을 가장 먼저 실행한 복서가 복싱계 허구연으로 부르는 이해정이었다,

그는 우리가 생각하는 것 만큼 인생은 짧지 않다. 나름 엘리트 코스인 서울체고 한국체대를 졸업했지만 진정한 인생의 승부는 복싱을 접은 인생 2막에서 결정된다 생각하고 미련 없이 글러브를 벗었다고 말했다.

이동포 유원대 복싱감독 한명우 사무총장 이해정 백병원 팀장(좌측부터)

이동포 유원대 복싱감독과 한명우 사무총장(좌측부터)


현재 유원대 복싱 감독을 역임하고 있는 이동포 감독은 수 년전 필자가 운영하는 복싱체육관에서 한명우 총장을 만난 인연이 있었다. 1967년 안동 출신의 이동포 유원대학 복싱 감독은 제42회 대통령배 전국선수권대회에서 유원대학이 종합우승을 차지하면서 최우수지도자상을 받은 복싱 인이다. 충북 영동군에 위치한 유원대학은 야구 태권도 복싱 사격 등 운동부를 육성하는 대학이다.

이들 유원대학 운동부 학생들은 대학을 졸업하면 경찰관 소방관 교도관 장교 수사기관 경호 업체 등 60개의 기업과 M.O.U가 체결되어 학생들은 유원대학을 졸업 후 자연스럽게 전원취업이라는 특혜(特惠)가 주어지는 대학이다.

레슬링 올림픽 금메달 한명우 양정모(우측)


한편 오늘 귀한 자리를 제공한 한명우 사무총장은 1956년 충남 당진군 송악면 벽지에서 태어났다. 그는 천부적으로 유소년시절부터 파워가 출중 턱걸이를 한번에 50개를 할 거뜬히 할 정도로 팔근육이 천부적으로 발달 되었다. 그때 그의 꿈은 복싱 국가대표였다. 그래서 그는 이를 실현하고자 다니던 학교(당진상고)를 그만두고 1974년 상경 남산 공전에 입학한다. 그 학교에 복싱부가 있다는 말을 듣고 즉시 행동으로 옮긴 것이다.

친구들보다 2년 늦은 입학이었지만 꿈은 부풀었다. 그러나 당시 레슬링협회에서 주관하고 태능 선수촌에서 실시하는 우수선수 발굴 프로젝트에 그의 표현대로 친구 따라 얼떨결에 응시, 단번에 합격함으로써 복서로의 꿈과 야망이 사라진다.

사실 레슬링이라는 종목은 한국스포츠사상 최초로 세계선수권대회(1966년 미국 톨레토)에서 장창선이 우승을 차지했고 올림픽에서도 양정모가 역시 한국스포츠사상 최초로 금메달(1976년 몬트리올)을 획득 대한체육회에서 메달육성 최우선 종목으로 채택되었다. 그래서 체육회에서 관심을 갖고 제2의 장창선과 양정모를 발굴하기 위해 열성적으로 집중투자한 종목이 바로 레슬링이었다.

레슬러로 변신한 한명우는 우월한 피지컬을 바탕으로 1982년 뉴델리 아시안게임에 출전 74Kg급에서 국가대표로 선발된다. 그러나 협회에서는 한명우대신 고진원을 편법으로 아시안게임에 출전시킨다. 보이지 않는 압력에 밀려 출전이 좌절된 것이다. 하늘이 무너져 내리는듯한 치솟는 배반감에 분노한 한명우는 레슬링을 곧바로 접고 주 종목인 복싱으로 전환한다.

어느 누군가의 말처럼 한국 스포츠 종목은 양궁을 제외하곤 모두다 썪었다는 말이 가슴에 와 닿는 대목이다. 한명우는 82년 겨울 어느날 유원건설 복싱체육관에 입관한다. 그 체육관은 아마츄어 국가대표 김치복 관장이 운영하는 복싱체육관이었다. 2년후 개최되는 LA 올림픽에 포커스를 맞추고 복서 한명우는 김 관장의 지도를 받으면서 급성장을 한다,

무쇠 턱 무쇠 다리 그리고 로케트 주먹으로 무장한 한명우는 스파링을 하면 상대 복서들이 총맞은 노루처럼 퍽퍽 떨어질 정도로 우월한 피지컬을 과시하면서 유망주로 급부상한다. 그렇게 5개월의 시간이 흐르면서 한명우는 복서로서 완성도가 구축된다.

허영모 박형춘선생 이해정(좌측부터)


그러던 어느날 서울시 레슬링협회 관계자들의 간곡한 설득에 그가 순응하면서 원대 복귀한다. 그리고 프랑스와 캐나다에서 개최된 국제대회에서 주종목인 74Kg급 에서 우승을 차지하면서 LA 올림픽 금메달 획득을 위한 워밍업을 마친다.

그러나 LA 올림픽 본선 4회전에서 핀란드 선수에 한 포인트차로 패하면서 메달권에서 탈락한다. 경기가 끝나고 한명우는 메달권에서 동반 탈락한 복싱의 문성길과 함께 배를 타고 홍도에 들어간다. 바닷가에서 한 잔술에 설움을 타서 마시던 한명우는 순간 울컥한 마음에 바닷물을 향해 투신한다.

삽시간에 벌어진 돌발상황이었다, 그때 곁에 있던 문성길이 득달같이 달려들어 구출, 한명우는 구사일생으로 생명을 건진다. 한명우는 30세에 맞이한 86아시안게임도 사실 힘겨웠다. 스포츠 세계에서 늙어서 능력이 감퇴 되는 에이징커브(Again Curve)가 찾아온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는 노장의 초인적인 투혼을 발휘하면서 매게임 체력의 한계를 극복 금메달을 획득한다.

대회를 마치고 무릅 연골제거와 인대수술을 한 그는 현역에서 은퇴를 결심한다. 그러나 협회에서 플레잉 코치를 제안 선수들의 스파링 파트너역활을 하면서 선수 생활을 연장해 나간다. 88서울올림픽을 앞두고 82Kg급으로 월장 올림픽 선발전에 출전한다. 선발전에서 10년후배 이자 스피드가 발군인 이동우(한국체대) 5년 후배이자 체력이 천하장사인 오효철(주택공사)등 신진세력들과 물고 물리면서 나란히 1승1패를 기록한다. 당시 올림픽 복싱 밴텀급 선발전에 출전한 허영모 변정일 서정수가 모두 1승 1패를 기록한 상황과 똑같았다.

결국 레슬링 협회에서 한명우의 풍부한 경험과 관록을 높이 평가 올림픽호에 합류시킨다. 반면 복싱계에서는 혀영모를 퇴물(退物) 취급 국제무대에서 더이상 경쟁력이 없다는 이유로 제외시켜 레슬링협회와 묘한 대조를 이뤘다.

사실 32살의 한명우는 국가대표에 발탁된 사실만으로도 그는 자신과의 싸움에서 승리한 진정한 승부사였다, 올림픽 본선에서 동서유럽과 미국의 초일류선수 24명이 도전장을 던진 각축장에 한명우는 4차전에서 이토(일본)의 머리에 버팅을 당해 이마에 여덟 바늘 꿰매는 고통속에서도 4ㅡ0 판정승을 거두고 결승에 진출 결국 터키의 네스미 겐칼프에 판정승을 거두고 금메달을 획득 15년간 펼쳐진 길고 긴 한명우의 레슬링 역사에서 화룡점정(畵龍點睛)의 대미를 장식한다.

은퇴 후 레슬링협회 전무를 거쳐 2008년 북경올림픽부터 해설위원으로 위촉된 그는 1994년 히로시마 아시안게임 코치를 거쳐 얼마전 한국 체육인 회 사무총장으로 임명되어 새로운 모습으로 우리 곁으로 다가왔다. 움직이는 사서삼경(四書三經)이라 불릴 정도로 박학다식한 그의 건승을 바란다.

조영섭 기자 6464ko@naver.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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