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영섭의 스포츠 칼럼] 1980년 대한체육회 최우수선수로 선정된 자랑스런 복서 김인창

조영섭 승인 2024.08.07 09:40 | 최종 수정 2024.08.07 23:20 의견 27

[시사의창=조영섭 스포츠 전문 기자] 지난 7월 27일 남양주 시장 배 생활 체육대회가 퇴계원읍 다목적회관에서 펼쳐져 참관을 했다. 경기장에서 귀한 복싱인들을 여러 명 만났다. 그중 대표적인 인물은 현재 남양주시 와부읍에서 덕현 복싱체육관을 운영하는 김인창이었다.

김인창관장과 이재훈 본부장(우측)


전 아마추어 국가대표로 활약한 김인창은 묵직한 한방은 없어도 폭넓은 시야를 바탕으로 컴퓨터처럼 정교한 복싱을 펼쳐 80년을 전후하여 한 시대를 풍미한 스타 복서였다. 경기장에 절친 이재훈과 함께 도착한 김인창은 관계자들과 인사를 나누었다.

김인창과 간담상조(膽相照)하는 절친 이재훈은 홍순만 관장이 운영하는 영등포 체육관 출신이다. 이 체육관은 김진길 김춘석 김현치 황순철 전학수 이필구 박대천 이만덕 등 기라성 같은 복서들을 배출한 명문체육관이다.

복서 이재훈은 플라이급과 밴텀급에서 국가대표로 활약하면서 이장수(동아대), 김창석(육군), 곽동성·김운석(원광대), 천흥배(조선대), 임병진(중앙대) 등 정상급 복서들을 차례로 제압 1975년 제5회 대통령 배 1976년 몬트리올 올림픽 3차 선발전 1978년 방콕아시안게임 4차 선발전 1978년 제59회 전국체전에서 차례로 우승을 차지한 파이터였다.

현장에는 김인창의 고교(한영고)와 대학(한국체대) 후배이자 이번 대회를 주관한 남양주시 복싱협회 김종원 사무국장이 한국체대 81학번 동기인 이성희(서울체고) 김성길(숭덕공고) 등 동료들과 함께 참석했다. 이 세 명의 복서들은 고교 시절 숙적이자 라이벌이었다.

김종원 김성길 이성희 한국체대 동기(좌측부터)


이들 중 선두주자는 김성길이었다. 현재 성남시 서현동에서 복싱체육관을 운영하는 김성길은 숭덕공고 3학년인 1980년 제4회 김명복 박사 배에서 우승을 차지했다. 천부적으로 복싱 감각이 탁월한 그는 각종 선발전에서 변정일(동국대), 남성희(경상대), 주윤상(경희대), 박대호(동아대) 등 정상급 복서들을 잡고 1986년 국가대표로 발탁되었다.

이를 발판으로 인도네시아 대통령 배와 태국 킹스컵 세계 군인선수권 대회에 참가 기념비적인 국제대회 3관왕을 달성했다. 이런 화려한 경력을 보유한 김성길도 1980년 전국체전 서울시 선발전에서 이성희(서울체고)에게 판정패 출전권을 상실했고 전국선수권 대회에서는 김종원(한영고)에 판정패 메달권에서 탈락했다.

박영배 차기회장과 김종원 사무국장(우측)


당시 두터운 선수층을 한눈에 알 수 있는 장면이다. 한편 김종원 사무국장은 복싱 볼모지 남양주시 발전을 도모하기 위해 자신의 직계선배인 김인창과 한영고 1년 후배이자 올 11월 남양주시 복싱협회 회장으로 내정된 박영배 씨와 연합전선을 형성 복싱 저변(底邊) 활성화를 위해 이번 대회를 개최했다.

엘리트 코스인 한영고 경희대를 거친 박정배 남양주시 복싱협회 차기 회장은 복싱 열정이 높은 복서 출신이다. 그는 필자와 담화에서 복싱인의 한사람으로 이 고장 복싱발전을 위해 열정을 불태우겠다고 역설했다. 각설하고 이번 주 스포츠 칼럼 주인공 김인창은 1957년 강원도 화천 출신의 아마추어 국가대표로 70년대 말과 80년대 초를 주름잡았던 명복서였다.

유소년시절부터 주력이 남달랐던 김인창은 이를 바탕으로 1973년 복싱을 배우기 위해 서울로 상경한다. 김인창이 서울에 입성 처음으로 입관한 체육관은 이창길이라는 올림픽 대표가 소속된 동근 체육관이었다.

이곳에서 그는 후에 심판으로 활약하는 이광우 사범의 지도를 받으면서 한 뼘씩 성장한다. 그리던 어느 날 이광우 사범이 경흥 체육관으로 자리를 옮기면서 그 역시 그의 복싱의 뿌리가 되는 경흥 체육관으로 옮겨 복싱을 배운다.

1974년 한영고에 입학 그해 서울 신인대회에 출전 밴텀급에서 우승을 차지한 김인창은 그해 10월 친선경기에서 육군대표 김창석에게 2회 RSC로 패하는 등 2년 동안 별다른 활약을 보여주지 못했다. 1976년에 들어서면서 드디어 김인창은 만개(滿開)한 기량을 선보인다.

제26회 학생선수권대회와 제6회 대통령 배를 비롯 그해 벌어진 각종 전국대회를 모조리 석권하면서 주목을 받는다. 그해 12월 문화체육관에서 제30회 전국선수권 대회가 열린다. 김인창은 발레리나 같은 발놀림에서 속사포처럼 품어내는 카운터로 결승에 진출한다. 결승전 상대는 그해 벌어진 몬트리올 올림픽에 출전(페더급) 8강에 올랐던 국가대표 간판 최충일(대우개발)이었다.

국내에서 카운터를 가장 잘 때리는 김인창은 국내에서 스트레이트를 가장 잘 때리는 최충일에 4:1 판정패를 당하면서 분루(憤淚)를 삼킨다. 이때 김인창의 화려한 테크닉에 매료되어 경기를 감명 깊게 관전한 김택수 복싱협회장의 천거(薦擧)에 의해 김인창은 태릉선수촌에 전격 합류한다.

선수촌에 입촌한 김인창은 전 종목 국가대표 선수들이 주말마다 실시하는 불암산 크로스컨트리에서 육상의 구본칠 등을 제치고 전체 1등으로 달리면서 주력과 지구력에서 발군(拔群)의 활약을 보였다.

동반 금메달을 획득한 최충일과 김인창(우측)


1977년 한국체대에 진학한 김인창은 박형춘 감독의 세심한 지도를 받으면서 그해 11월 제1회 김명복 박사 배 결승에서 장래가 촉망받던 유망주 조용래(경남대)에 판정승을 거두면서 주목을 받는다. 1978년 방콕아시안게임에 선발전에서 화염방사기처럼 무서운 화력을 뿜어내는 유흥석(수원복싱)을 판정으로 잡아내면서 출전권을 획득한다.

북한의 김동훈과 대결하는 김인창(좌측)


그리고 본선에서 북한의 김동훈을 비롯하여 파키스탄 필리핀 태국 선수를 차례로 잡고 감격적인 금메달을 획득한다. 김인창의 라이벌이었던 최충일도 라이트급에서 금메달을 합작 국위를 동반 선양했다. 금메달을 획득하고 돌아오자 AIBA(국제복싱협회)에서 발표한 라이트 웰터급 세계랭킹 7위에 진입한다.

1979년 10월 뉴욕에서 개최된 제1회 월드컵대회에 출전한 김인창은 홈 링의 스티플즈에게 판정패를 당한다. 이때 김인창은 현격한 기량 차이를 실감하고 체급을 라이트급으로 내린다. 우물안 개구리임을 자각(自覺)한 것이다.

1980년 모스크바 올림픽에 포커스를 맞추고 배수의 진을 친 김인창은 라이트 웰터급 한계체중에서 3.5kg을 더 감량해야 하는 고통 속에 몸을 던진다. 극심한 진통의 과정에서 그는 창조의 에너지를 쉼 없이 발산 마지막 남은 땀 한 방울까지 소진시키는 투혼을 보이면서 1980년 8월 제10회 대통령배 대회에서 출전 금메달을 획득한다.

그리고 이어진 모스크바 올림픽 선발전서 천재 복서 김동길에 2차례에 걸친 맞대결에서 판정승을 거두고 올림픽호에 승선한다. 그러나 모스크바 올림픽은 소련의 아프카니스탄 침공으로 인해 소련과 대립각을 세우던 미국을 비롯한 자유 진영의 국가들이 불참 그해 9월 케냐에서 75개국이 참가한 대체올림픽(골든컵)이 개최된다.

7명이 출전한 한국팀은 라이트급에 출전한 김인창이 미국 서독 필리핀 케냐 선수를 차례로 잡고 대망의 금메달을 획득 올림픽에 출전하지 못한 아쉬움을 달랬다.

특히 결승전에서 아프리카선수권 최우수 복서 출신의 패트릭 와웨루(케냐)를 판정으로 꺾은 경기는 압권이었다. 탄력을 받은 김인창은 그해 11월 LA시장배 대회에서 3연승을 질주 우승컵을 들어 올리면서 1980년 대한체육회가 선정한 최우수선수상을 받는다.

복싱인으로는 1956년 멜버른 올림픽 밴텀급에서 은메달을 획득한 송순천에 이어 2번째로 수상한 감격스러운 장면이었다. 그리고 1981년 4월 체육인 중 최고의 상인 제19회 대한민국 체육상 수상자로 선정되어 부상으로 2백만 원을 받았다.

현역에서 은퇴한 김인창은 군 복무 후 프로스펙스 판촉부에서 업무를 보면서 복싱과의 인연을 이어간 그는 2007년 남양주시에서 덕현 체육관을 개관 후진 양성에 몰두하고 있다. 품격 높은 인품으로 후배들에게 존경과 사랑을 받는 김인창 관장의 무궁한 건승을 바란다.

창미디어그룹 시사의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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