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사의창=조영섭 스포츠 전문 기자] 가끔 천호동에 위치한 캡틴 복싱체육관을 운영하면서 유원대 복싱부를 총괄하고 있는 이동포 감독을 만나면 음악 삼매경(三昧境)에 빠진 그를 종종 목격하곤 한다. 1967년 경북 안동 출신의 이동포 감독은 사람됨이나 몸가짐이 점잖고 예의가 바른 전형적인 잰틀맨 (Gentleman)이다.
2009년부터 사업을 접고 복싱체육관을 운영한 이 감독은 자신만의 경영철학으로 주변체육관을 압도 홀로서기에 성공한 복싱인이다. 이를 전환점으로 그의 명성을 듣고 찾아온 MMA에서 활약한 방태현과 양해준을 지도하면서 그들의 복싱 스킬을 한 단계 도약시키면서 지도력을 검증받았다.
이중 방태현은 코리아 콘텐더 최종결승에서 윤석현과 명승부를 펼친 UFC 챔피언이었다. 2016년 이동포 유원대 감독은 제42회 대통령배 전국선수권대회 2018년 제50회 전국 중고 신인대회에서 종합우승과 함께 최우수지도자상을 휩쓸면서 주가를 높혔다.
이후 이동포 감독은 쉼 없이 선수들을 발탁 조련하면서 4명의 선수들을 국가대표 상비군에 발탁시켜 명불허전(名不虛傳)의 관장임을 재확인시켜주었다. 평범한 사설체육관에서 출발 신생팀 유원대 복싱부 감독에 임명되면서 좀처럼 이룩하기 힘든 게 쉽지 않은 형설지공 (螢雪之功)의 업적을 창출해낸 것이다.
이에 부응한 유원대학 경찰 소방행정학부 우태석 한상철 두 분의 교수가 올해부터 유원대학에 입학하는 복싱부 학생들에게 장학금 지급을 시행 이동포 감독에게 힘을 실어주었다. 유원대 복싱선수들은 이들이 대학 졸업 후 경찰관 교도관 국정원 수사기관 등 폭넓고 다양하게 자신의 진로를 선택 취업할 수 있는 특혜가 주어지는 대학이다.
이런 전력을 지닌 이동포 감독과 지난 주말 남양주시에 위치한 가수 김장수 선배가 운영하는 고풍이 감도는 높은음자리 라는 라이브 카페를 찾았다.
필자는 가수 김장수 선배와 수년 전 복싱 경기장에서 만나 30분간 대화를 나눈 적이 있었다. 그때 그는 필자에게 자신이 부산 동의대 체육학과 출신이라고 말하면서 기탄(忌憚)없이 대화를 나눈 첫 인연이 있었다.
그리고 동행한 이 감독은 김장수 선배가 운영하는 남 양주시에 위치한 카페(높은음자리)에 수차례 들려 얼굴을 익힌 지인이었다. 가수 김장수는 1985년 대학가요제에서 바다에 누워 라는 곡을 열창 대상을 수상하면서 데뷔한 가수다.
당시 김장수는 동의대에 3학년에 재학 중인 학생이었다. 배철수가 부른 히트곡 ‘새가 되어 날으리’ 를 직접 작사 작곡한 김장수는 1984년 대학가요제에서도 소꿉친구라는 곡을 직접 작사 작곡 동상을 수상하기도 했다. 1958년 부산태생의 김장수는 초등학교 시절 태권도 공인 2단의 실력을 보일 정도로 운동신경이 탁월한 소년이었다.
동래중에 진학한 김장수는 100m를 12초대에 주파할 정도로 빠른 스피드를 주무기로 축구선수로 활약했다. 동래중은 이차만 박성화 박성인 최용수 등 명선수들을 배출한 축구 명문이었다. 그러나 김장수는 졸업을 앞두고 복싱으로 종목을 전환한다, 그가 선택한 체육관은 부산 충무동에 위치한 극동체육관이었다.
그곳에서 4살 어린 장정구 챔프를 만난 지난날들을 그는 가감 없이 회고했다. 1976년 김장수는 부산공고에 진학 이번엔 체육관을 부산 한일체육관으로 옮겨 복싱을 지속적으로 배우고 익힌다, 그의 복싱 사랑을 엿볼 수 있는 대목이다.
부산공고는 프로야구 롯데 자이언츠 감독을 역임한 김명성 감독의 모교이다. 투수 김명성은 1963년 부산공고 재학시절 제8회 청룡기대회에서 황성록 이재우의 타선 폭팔 에 힘입어 우승과 함께 MVP를 차지하면서 모교에 창단 첫 우승을 선물한 야구선수다.
한편 김장수가 속한 한일체육관은 그해 몬트리올 올림픽에 복싱 국가대표 출전한 최충일이 소속된 체육관이었다. 김장수는 1년 선배인 최충일이 속사포처럼 뿜어내는 스트레이트를 생생하게 기억하고 있었다. 김장수는 고등학교 2학년 때 음악에 심취 복싱을 접고 나이트클럽에서 가발을 쓰고 노래를 부르면서 천부적인 음악성을 발휘한다.
그리고 군 복무를 마치고 1983년 부산 동의대 체육학과에 수석으로 합격한 김장수는 동의대 통기타동아리 무드(MOOD)에서 활동한다. 그리고 1985년 제9회 MBC 대학가요제에 높은음자리라는 그룹을 결성 임은희 양과 함께 바다에 누워 라는 곡을 불러 본선에서 영예의 대상(大賞)을 수상한다.
이동포 관장과 심도 높은 대화를 나누던 김장수에게 가장 친하게 지내는 동료 가수가 누구냐 란 필자의 질문에 그는 일말의 망설임도 없이 바람바람바람을 부른 김범용과 인생은 미완성이란 곡을 부른 이진관을 꼽았다.
이중 이진관은 수년 전 필자의 3차례 만나 함께 식사하면서 담화를 나눈 가수였다. 그래서인지 그의 이름이 호명되는 순간 무척이나 기뻤다. 이진관도 김장수처럼 솔직담백한 성품으로 쾌활한 성품을 지닌 가수였다. 1958년 전북 군산 출신의 이진관은 부초를 부른 박윤경 목로주점을 히트시킨 이연실과 더불어 군산이 배출한 3대 가수 중 한 명이다, 이진관 역시 중학 시절 씨름선수로 활약하면서 이리 농고에 특기생으로 입학이 내정된 선수였다.
우여곡절 끝에 서울에 입성한 이진관은 가요계에 데뷔 5년 세월을 무명가수로 활동하다 1985년 언더그라운드 생활에 종지부를 찍는 노래 인생은 미완성이란 곡이 빅히트를 치면서 반전에 성공한다. 서정적인 멜로디에 단순하고 고운 선율로 누구나 쉽게 따라부를 수 있는 대중성 높은 그 노래는 그해 KBS 가요톱텐에서 3주 연속 1위를 차지하면서 이름을 알렸다.
58년 개띠생 김장수 이진관 두 가수가 바다에 누워 란 곡과 인생은 미완성이란 곡을 각각 부르면서 그들의 인기가 미사일처럼 폭발적으로 치솟아 오른 1985년 필자는 용인대 2학년에 재학 중인 프로복서였다.
그러나 무리한 훈련에 그만 골수염(骨髓炎)에 걸려 정강이뼈 상당 부분을 깎아 내는 수술을 하고 4개월에 걸쳐 퇴계로 대혜의원에 입원해 있었다. 가수 심수봉은 지난날 회고에서 그녀가 병원에 입원했을 때 외로운 병실에 찾아와 기타를 쳐주며 그녀를 위로해주던 가수 나훈아가 있었다고 했지만 난 그냥 아무도 찾지 않는 외로운 병실에 짐짝처럼 처박혀 있었다.
고독과 외로움에 묻혀있던 그때 1985년 가요계에 대표적인 히트곡인 이선희의 J에게 해바라기의 ‘모두가 사랑이예요’, 김원중의 ‘바위섬’이란 곡이 이진관의 ‘인생은 미완성’, 김장수의 ‘바다에 누워’란 곡과 함께 날 위로해주던 대표적인 히트곡이었다.
그리고 6개월이 지난 1985년 12월 13일 대구에서 재기전을 펼쳐 생애 최초로 KO패를 당하면서 2년 3개월이란 짧은 현역생활에 종지부를 찍고 말았다. 공교롭게도 12월 13일 그날은 가수 김장수의 27번째 맞이하는 생일이었다.
김장수가 부른 ‘바다에 누워’란 곡은 1980년에 박해수라는 시인이 발표한 시집(바다에 누워)에 실린 작품이다. 이 곡을 작곡한 김장수는 1986년 KBS 가요톱텐에 5주 연속 1위를 차지하면서 영예의 골든컵을 차지했다. 탄력을 받은 김장수는 ‘나 그리고 별’이란 신곡을 발표 이 곡이 그해 가요톱텐에서 2주 연속 1위를 차지 그는 연타석홈런을 때리면서 식을 줄 모르는 폭발적인 인기를 과시했다.
그리고 새벽새 ‘외로운 밤은 싫어’라는 곡을 발표 이 곡이 연달아 히트하면서 톱가수 반열에 올라선다. 그러던 1987년 어느 날 현재의 아내 이희정 여사를 만나면서 사랑을 위해 김장수는 모든 것을 접고 사실상 가요계를 떠난다.
그의 이야기를 들으면서 사랑하는 심프슨이란 여인을 위해 왕관을 버린 영국의 왕세자 에드워드 8세의 러브스토리가 불현듯 스쳐 지나갔다. 김장수는 대화가 무르익을 무렵 이동포 감독에게 신곡 이 사람을 들려주었다.
4년간의 숙성기간을 걸쳐 발표한 신곡이 사람이란 곡을 청취한 이 감독은 멜로디가 감미롭다고 말하면서 느낌이 아주 좋다고 격하게 표현했다. ‘보석 같은 이 사람을 오래오래 갖고 싶어요. 내 모든 걸 다 잃어도 이 사람만 있으면 돼요.’로 시작되는 가사는 아내에 대한 지고지순한 순애보(殉愛譜) 적인 사랑과 굴곡(屈曲) 많은 오랜 세월을 묵묵히 인내하면서 살아온 아내에 대한 고마움을 담은 곡이다. 끝으로 남양주에서 높은음자리라는 라이브 카페를 운영하면서 인생 3막에 화려한 시동(始動)을 건 높은음자리 김장수와 이동포 감독의 건승을 바란다.
창미디어그룹 시사의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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