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불교칼럼] 혹(惑)에서 업(業)을 업(業)에서 고뇌(苦惱)를 상통(相通)하여 생사(生死)를 유전(流轉)한다

편집부 승인 2024.07.05 15:13 의견 0

[시사의창 2024년 7월호=김동식 칼럼니스트] 생사(生死)에 유전(流轉)하는 인간의 모양을 셋으로 나눈 것으로서 혹(惑). 업(業). 고(苦) 이 세 가지가 우리 인간들의 생활 속에서 톱니바퀴가 서로 맞물려 돌아가듯 끊임없이 나타내는 것으로 능통(能通)의 뜻을 가지고 있으며, 그 뜻은 혹(惑)에서 업(業)을 업(業)에서 고(苦)를 불러내어 전전상통(轉轉相通)하여 생사를 되풀이한다는 뜻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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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혹도(惑道)
미혹(迷惑)이라고도 하는데 우주(宇宙)의 진리(眞理)를 알지 못하고 무명(無明)하고 무명(無明)의 무지(無知)로 인하여 번뇌(煩惱)와 망심(妄心)으로 지혜가 병들어 있는 우치(愚癡)로 사물(事物)의 진상(眞相)을 명확(明確)히 알지 못하기 때문에 미혹(迷惑)이 일어나 어두움이 생기는 것이다. 즉 우주(宇宙)의 진리(眞理)와 낱낱 사물(四物)의 진상(眞相)을 알지 못하는 데서 일어나는 망심(妄心) 곧 번뇌(煩惱)인 것이다.

2) 업도(業道)
업(業)으로부터 몸과 입과 뜻으로 짓는 선악(善惡)의 행업(行業)은 사람으로 하여금 6취(趣)에 가게 하므로 도(道)라 한다. 이것은 망심(妄心)으로 일어나는 것으로 속담에 “첫 잔은 사람이 술을 마시고, 두 잔째는 술이 술을 마시고, 석 잔째는 술이 사람을 마신다”고 한다.
이것을 혹(惑)이라 하며, 한 번 미혹(迷惑)이 생기면 술이 술을 먹게 되어 흐리멍텅하게 되고, 마침내 여러 가지 사고를 일으키게 된다. 그래서 남에게 폐를 끼치게 되고 자기 자신도 육체적 정신적 물질적 즉 몸도 마음도 괴롭게 되고 경제적 고통(苦痛)도 받게 되며 이것을 소위 업장(業障)이라 한다.

3) 고도(苦道)
번뇌로부터 몸과 입과 뜻으로 짓는 업(業)을 일으키고 업(業)으로 말미암아 3계(三契) 6도(六道)의 고과(苦果)를 받는 것이다.

마음을 괴롭게 하여 편안치 않게 하는 ‘상(像)’이며 또는 고뇌(苦惱)라고도 한다. 술이 깨었을 때는 술의 해독을 절실히 느끼며 다시는 술을 마시지 않겠다고 맹세하지만 기회(機會)가 생긴다든가 기회를 만들어서 마시게 되므로 또 여러 가지 사고를 일으키고 자기 사진을 괴롭히는 악순환을 계속하게 되는데 이것이 고뇌(苦惱)인 것이다. 결심하고 금주하지 않는 한 일생 동안 되풀이하게 되므로 이것이 미혹(迷惑)과 업장(業障)과 고뇌(苦惱)의 관계이다.

마치 술꾼의 일생과 같이, 우리들도 또 한결같은 짓을 몇 번이고 거듭하고 있는 것이다. 그러니 무명에서 출발한 우리들의 인생이 고뇌라는 것은 당연한 것, 무명의 무지를 근본적으로 끊어버리지 않는 한 고뇌의 세계는 언제까지나 무한히 전개해 가는 것이므로 따라서 처음부터 무명이 없으며, 무명이 다함도 없으며, 자연히 늙고 죽음도 없으며, 늙고 죽음이 다함도 없게 되는 것이다.
지금부터 1200여년 전 중국(中國) 삼론종(三論宗)의 종주이신(宗主以身) “가상대사(嘉祥大師)”가 열반(涅槃) 하실 때 지은 시(詩)를 소개한다.

합치대모자(盒齒戴毛者) 무애생불포사(無愛生不怖死)
이(齒)와 모발(毛髮)을 가진 자(者), 생을 사랑하고 죽음을 겁내지 않는 자(者) 없도다.
사의생래(死依生來) 오약불생(吾若不生)
죽음은 삶으로부터 오느니, 내가 만약에 나지 않았던들 어이 죽음이 있을 손가.
인하유사(因何有死)
죽음은 삶으로부터 오느니,
선견기초생지종사(宣見其初生知終死) 응제생물포사(應生物怖死)
내가 만약에 나지 않았던들 어이 죽음이 있을 손가. ‘나는’ 것을 보거든 마침내 ‘죽음’ 있음을 알고, 마땅히 ‘난 것’을 슬퍼하라, ‘죽음’을 겁낼 것은 없느니라.

이 시(詩)가 담는 의미는 우리에게 무엇을 말해 주는 것일까?
죽음이 삶으로 해서 오는 것이니 사는 것만이 즐겁고, 죽는 것만이 슬픈 것이 아니라는 것이다. 그러나 우리 범부(凡夫)들은 산다는 것이 기쁘고 죽는다는 것은 슬픈 것이다.

생사일여(生死一如)를 깨친 사람일지라도 삶은 좋은 것이고 죽는 것은 슬픈 것이다. 문제는 인연으로 인하여 오는 것이기 때문에 집착하지 말고 단념할 줄 알아야 한다.
또 다른 시(詩)는 「봄(春)을 찾아 진종일 헤매었어요, 짚신이 다 닳도록 헤매었어요.
뜰 앞 매화(梅花)나무가지 끝에 봄이 달려 있는 것을...」
한번쯤은 여기 저기 찾아 헤매어 볼 필요도 있겠지만, 참으로 영혼의 고향은 필경(畢竟) 내 마음 속에 있는 것이다.

집 앞에 매화꽃이 웃고 있는데, 산 너머 들 밖으로 찾아다니는 우리들이니 우는 것도 우리요, 웃는 것도 자기(自己)입니다. 번민(煩悶)하는 마음, 즐거워하는 것도 마음이다.
이 마음을 밖으로 하고, 자기 자신을 등한히 한다면 깨달음을 어디서 구하겠는가?
부처님께서는 인간의 괴로움은 어찌해서 생기는가, 어떻게 하면 그 괴로움을 해탈(解脫)할것인가, 하는 이 중대한 문제를 무명을 근본으로 해서 노사로 가는 길을 걸으셨고 동시에 노사를 기초로 해서 무명으로 가는 길을 걸어서, 여기서 십이인연(十二因緣) 모두가 마음에 달려있다고 하는 깨달음의 경지에까지 도달했으며, 결국은 마음이 미혹돼 있으면 중생이요 이 마음을 깨치면 곧 부처님인 것이다.

중생(衆生)도 부처님도 곧 이 마음 속에 있는 것이니 작은 나에 집착(執着)되어 있는 한 인생(人生)은 괴롭다. 그러나 여기서 한번 작은 나의 결박(結縛)을 끊고 이 마음을 깨친다면 일체(一切)의 괴로움은 어느덧 사라지게 된다는 것을 부처님은 우리에게 가르쳐 주고 계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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