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영섭의 스포츠 칼럼] 1984년 LA 올림픽에 묻혀진 숨은 비화(祕話)

조영섭 승인 2024.06.13 14:24 | 최종 수정 2024.06.13 18:39 의견 25

[시사의창=조영섭 스포츠 전문기자] 1984년 7월 29일 상오 27세기 전(前) 그리스 펠로포네시아 평온에서 타올랐던 성화가 LA 메모리얼 콜로시엄 성화대에 태양열로 점화돼 제23회 올림픽의 막이 오르고 16일간의 대장정이 시작된다. 이번 올림픽은 소련을 비롯한 공산권 17개국이 불참에도 불구하고 세계 141개국 7천 8백 명의 선수들이 참가 올림픽사상 최대규모를 자랑했다.

LA 올림픽 금메달 후보 레슬링 손갑도 방대두 양궁 김진호 복싱 김광선 허영모(좌측부터)


차기 올림픽 개최국인 한국은 이번 대회에 양궁 레슬링 복싱등 메달종목을 포함한 21개 종목 2백85명의 올림픽사상 최대의 선수단을 출전시켜 최소한 3개의 금메달을 획득 종합 10위권을 겨냥했다. 올림픽 출전 200일을 앞두고 한 신문사에서 국내의 최고 체육전문가들이 집결 285명의 출전 선수 중 엄선(嚴選)한 강력한 금메달 후보 5명의 선수를 발표한다. 주인공은 1979년 여고생의 몸으로 제30회 베를린 세계 선수권대회에서 기록적인 5관왕을 달성한 양궁의 김진호를 비롯 레슬링의 손갑도와 방대두 복싱의 허영모와 김광선이다.

LA올림픽 금메달 신준섭(복싱) 김원기 유인탁(레슬링) 서향순 (양궁) 안병근 하형주(유도)(좌측부터)


결론부터 말하면 5명의 금메달 후보 중 LA 올림픽에서 금메달을 획득한 선수는 단 한 명도 없었다. 1948년 런던올림픽에 처녀 출전한 한국복싱은 1956년 멜버른 올림픽에서 송순천 1964년 동경올림픽에 정신조 1968년 멕시코 올림픽에서 지용주 등이 금메달 일보 직전에서 패한 전력(前歷)이 있었다. 전년도(1983년) 로마월드컵대회에서 복싱사상 최초로 메이져 대회( 올림픽. 월드컵. 세계선수권) 대회 우승자 라이트 플라이급의 김광선은 한번 맞붙어 패했던 쿠바의 라파엘 세인즈가 불참 무주공산(無主空山)에 무혈입성(無血入城)을 노렸다.

1회전 상대는 홈링의 폴 곤잘레스. 이 대결에서 170cm 장신의 곤잘레스의 라이트 일격에 당한 한차례 녹다운에도 불구하고 라이타돌 김광선은 별명답게 막판 활화산처럼 터지는 맹렬한 기세로 상대를 몰아붙였지만 5:0 판정패를 당해 탈락한다. 1983년 로마월드컵 대회 결승(플라이급)에서 허영모를 꺽은 쿠바의 페드로 레예스가 불참한 가운데 강력한 금메달 후보로 출전한 당대 최고의 테크니션 허영모는 준결승에서 미국의 스티브 맥크로리와 금메달을 향한 일전을 펼칠 것으로 예상한다.

그러나 허영모는 목적지로 출발하기 이틀 전 동료 복서와 가볍게 맥주를 마시다 감기몸살로 전이(轉移)되는 돌발사태가 발생한다. 결국 LA로 향하는 기내(機內)에서 도핑테스트 때문에 약도 복용 (服用) 못하고 이불을 몸에 둘둘 감고 미국에 도착한다. 그리고 최악의 상태에서 경기에 출전 8강에서 터키 선수에게 판정패하면서 고개를 숙였다. 이 같은 내용은 허영모가 소천하기 1년 전 필자와 담화에서 밝힌 내용이다. 여담이지만 페더급에 출전한 복병(伏兵) 박형옥도 이번 올림픽에 억울한 판정을 당한 희생자 중 한 명이다.

8강에서 박형옥은 베네주엘라의 테리사에게 3회 결정적인 한차례 다운을 탈취 3:2 판정승을 거두면서 동메달을 확보한다. 그러나 LA 올림픽 때부터 심판의 부당한 채점을 방지하기 위해 현행 5심제와 별도로 5인의 배심원(陪審員)제도를 변칙적으로 운영했다. 우선 1차적인 심판진의 3:2 판정은 2차에서 시행되는 배심원들의 판정이 0:5 또는 1:4 판정이 나올 경우 승패를 뒤집을 수 있는 제도인데 이 제도에 의해 박형옥이 희생양이 되고 말았다.

헤비급에 출전한 이태리의 안젤로 무조네는 미국의 헨리 틸만에 3:2 판정승을 거뒀지만, 배심원 판정에는 0:5로 패해 피눈물을 흘리며 퇴장했다. 라이트 웰터급에 출전한 김동길도 우세한 경기를 펼치고 1:4 판정패를 고개를 숙였다. 배심원 판정도 1:4로 동일하게 나왔다. 이 두 선수의 억울한 패배는 신준섭의 금메달획득에 소리 없는 일조(一助)를 해 정부 수립 후 최초의 복싱 금메달은 신준섭에 의해 탄생했다. 이 같은 내용은 신준섭이 현장 인터뷰에서 직접 밝힌 내용이다.

1983년 전북대표로 출전한 신준섭과 필자(우측)


신준섭은 사실 국내선발전에서 장성호(목포대)에 논란이 많은 판정 끝에 올림픽에 승선(乘船)한 복서였다. 올림픽 미들급 결승전에서 신준섭과 맞대결할 미국의 버질힐 그는 8강전에서 스카도(유고)에게 사실상 패한 경기를 펼치고도 결승에 올라온 복서였다. 스카도는 83년 로마월드컵 4강전에서 신준섭에 5:0 판정패를 당한 레제피(유고)를 자국 올림픽 선발전에서 꺾고 출전한 복서였다.

버질힐과 대결에서 신준섭(우측)의 금메달이 확정되는 순간


신준섭은 버질힐과 펼친 결승전에서 일진일퇴의 치열한 접전을 벌인 끝에 3:2 판정승을 거둔다. 당시 타이완과 루마니아 주심은 60:58 59:58 신준섭 우세로 채점을 했지만 서독과 모로코 주심은 59:58 버질힐의 우세로 판정했다. 캐스팅 보트(Casting vote)를 쥔 튀니지심판이 59:59 동점에서 신준섭 우세 판정을 내리면서 한국복싱사상 최초의 올림픽 탄생의 사막이 열렸다.

복싱 사상 최초의 올림픽 금메달 신준섭


비교적 많은 행운이 함께한 신준섭의 올림픽 금메달 탄생 이면(裏面)에는 훈련과정에서 그가 몸소 보여준 금메달을 향한 초인적(超人的)인 투혼과 짐념은 상상을 초월할 정도로 악착같고 집요했다. 또한 신준섭은 1983년 스웨덴 덴마크 핀란드 등을 5개국을 돌면서 전지훈련을 겸한 국제경기에 참가(핀란드 템머 대회)에 참가 3연속 RSC패를 당한 상흔(傷痕)을 딛고 창출한 금메달이라 더욱더 가치 있고 의미 있는 금메달이었다.

경천동지(驚天動地)할 만한 업적을 창출한 복서 신준섭의 뒤안길에는 보이지 않는 노력이 숨어있음을 우리 복싱인들이 결코 잊어서는 안 된다. 진정한 노력은 결코 배반하지 않는다는 스포츠 세계 불변의 진리를 재확인시켜준 이 시대의 진정한 복싱영웅 신준섭의 건승을 바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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