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사이야기] 국립민속박물관 터와 장충단에 얽힌 이등박문의 유령, 그리고 안중근

편집부 승인 2024.06.07 11:28 의견 0

국립민속박물관은 민속자료의 수집, 보존, 전시와 이와 연관된 체계적인 조사, 연구를 위해 설립된 문화체육관광부 산하 박물관이다. 국립민속박물관은 일제 강점기 철거 직전의 광화문을 살려낸 양심적인 일본인 민속학자 야나기 무네요시에 의해 창립된 조선 민족미술관이 모태이다. 그러나 실질적인 박물관의 시작 연도는 1946년 미군정시대에 개관한 국립 민족박물관으로 본다. 그 후 1950년 국립 민족박물관은 국립 박물관에 흡수 통합되어 남산 분관이 됐지만 1966년 한국민속 박물관으로 분리되었고 이후 1975년 한국 민속박물관으로 명칭 변경 후 1979년 국립 중앙박물관 소속으로 개편되면서 국립민속박물관이 되었다.

국립민속박물관 전경 (국립민속박물관 홈페이지)

[시사의창 2024년 6월호=민관홍(우리문화숨결 경복궁해설사)] 국립민속박물관은 그 위상이 바뀔 때마다 박물관의 위치와 사용하는 건물도 계속 바뀌었다. 1946년 개관 당시에는 남산 구 시정기념관(통감 관저), 1966년부터 1975년까지 수정전, 1975~1992년까지 경복궁 향원정 뒤편 구 국립현대미술관 건물(건청궁 터, 1998년 철거)을 사용해 오다가 1993년 2월 국립 중앙박물관이 용산으로 이전하면서 선원전 터에 있던 국립중앙박물관 건물을 이어받았다.
국립민속박물관으로 이용되는 건물은 경복궁 영역에 있는데 경복궁의 전각에 비해 5층으로 높고 화려하게 보인다.
경복궁을 입궁하여 광화문, 근정전, 사정전, 강녕전, 교태전을 지나 아미산 막다른 곳에서 동쪽으로 빠져나오면 신정왕후를 위해 지은 자경전 앞 담을 끼고 왼쪽으로 돌면 경복궁 전각에 비해 높다랗고 화려하게 보이는 국립민속박물관 건물을 볼 수 있다.
경복궁의 입장객에게는 기와에 단청을 칠한 전통적으로 보이는 건물의 외관이 높다랗게 보이니 ‘멋있다’라고 말하는 분이 많이 있다.
하지만 경복궁 해설을 주의 깊게 들으며 관람하는 관람객은 첫째, 경복궁의 건축 철학이자 조선의 건국 철학이 지나친 공역으로 백성을 피곤하게 하지 말라는 것. 둘째, ‘儉而不陋 華而不侈’(검이불루 화이불치): 검소하나 누추하지 않고 화려하나 사치스럽지 않다. 라는 철학에 걸맞지 않다. 라는 말을 하며 ‘아는 만큼 보이는 경지’를 보여준다.
지금의 국립민속박물관 건물은 경복궁 영역의 선원전 터에 일부 남아 있던 전각들인 경안당, 정훈당, 대향당 등 9동 106칸에 달하는 여러 부수적인 전각들이 있었던 곳이다. 이곳의 전각들은 일제 강점기와 6.25 전쟁의 참화 속에서도 다행히 살아남았는데 문화재 보존 의식이 전혀 없던 당시, 우리 손으로 철거하고 국립중앙박물관(1966년)을 건립하게 되었다.
당시 문화재관리국의 규정은 “건물 자체가 어떤 문화재의 외형을 모방함으로써 그 조합과 질감이 그대로 나타나게 할 것이며 여러 동이 조화된 문화재 건축을 모방해도 좋다.”라고 하였다. 국립중앙박물관은 건축 공모를 통해 짓기로 하였는데 위 규정에 대해 국내 건축가들은 창의력을 살릴 수 없다며 반발, 응모를 거부하여 겨우 10여 개의 응모작 중 강봉진의 설계안이 채택되었고 현재 국립민속박물관 건물이 그것이다.
국립민속박물관의 외관은 보기에는 그럴 듯 하나 조선의 궁궐 건립철학과도 맞지 않고 조선의 억불숭유의 국가이념에도 맞지 않는다. 법주사 팔상전(현존 유일 5층 목탑), 화엄사 각황전, 금산사 미륵전을 나열하듯이 지은 건물에 그곳으로 오르는 계단 상층은 근정전 월대 난간에 불국사 청운교와 백운교를 혼합하여 지은 표절을 확실하게 표방한 건물이다. 1960년대는 일본과 우리나라에서 콘크리트로 문화재를 복원하는 것이 유행이었었는데 일본의 구마모토성과 오사카성 한국의 광화문(1968년)이 대표적(현재는 2010.8.15. 목조로 복원)이며 그때 국립중앙박물관 건물도 거기에 편승하여 콘크리트로 짓게 된 것이었다.

안중근 기념관 내 안 의사 영정 ©연합뉴스


국립민속박물관 건물의 건립 이야기도 마음이 좋지 않은데 국립민속박물관 터에 얽힌 이야기는 답답하고 슬프고 화가 난다.
경복궁은 1910년 경술국치 이후 일제에 의해 7,700여 칸 전각의 70%를 일본과 조선의 실력자들에게 불하하여 매각하였고 1915년에는 조선의 일제 강점 이후에 조선의 발전상을 보여줄 목적으로 조선물산공진회를 열었다.
이때 경복궁 교태전 뒤쪽의 전각들을 철거하고 근정전 회랑의 행각들을 철거하였다. 1917년 창덕궁 화재 때는 경복궁의 강녕전과 교태전을 헐어 창덕궁 전각(희정당)의 복원에 사용하였다. 1926년에는 일제의 조선 박람회 개최로 대원군의 경복궁 영건 당시 전각의 15%만 남게 되었다.
경복궁 북동쪽에 있는 선원전은 한적한 곳에 있었고 선왕의 어진을 모신 왕실 개인 사당의 의미도 있어서 철거하면 조선인의 반발 우려 등으로 일제 강점 이후 비교적 오래 존치되었다.
하지만 일제는 1909년 10월 26일 이등박문이 안중근 의사에 의해 총살되고 1929년 이등박문의 사망 20주기를 맞아 남산 자락에 있던 장충단 위쪽에 이등박문을 기리는 일본 조동종의 사찰인 박문사를 짓기로 하였다. 이 일이 기가 막힌 것은 조선의 선왕들을 기리는 왕실의 개인 사당 격인 선원전의 전각을 뜯어 박문사를 짓는 데 사용하였고 그 터인 남산의 장충단은 고종황제가 갑오년(1894년) 이후 전몰장병들의 영혼을 달래주기 위해 만든 제단이었다. 지금으로 말하면 국립묘지라 할 수 있는 장소에 일본인이 국부로 여기는 이등박문을 기리는 박문사를 건립(1932년 10월 26일)하였으니 한국인의 입장으로 보자면 천불이 나서 몸에 불이 나도 모자랄 지경이나 현재까지도 이러한 역사적 사실을 모르는 사람이 대부분이다.

이토 히로부미 (KBS뉴스 화면 갈무리)



여기에 한 술 더해서 경희궁의 정문인 흥화문을 철거하여 박문각의 정문으로 사용하였으니 더욱 기가 막힐 따름이었다. 이는 일제가 조선인을 정신적, 문화적으로 충격을 가해 다시 일어나지 못하게 하려는 술책의 일환이기도 하였다.
현재 남산 장충단에 박문사는 철거되고 그 터에 1979년 신라호텔을 지었다. 신라호텔로 박문사의 흔적은 덮었으나 우리나라에 아무런 국익도 없이 일본의 대변인처럼 행동하고 일본 방사능 오염수 처리에 대한 변명도 우리 예산으로 만들어 홍보해 주는 현 정부의 비정상적인 행보는 이등박문의 유령이 아직도 서울을 배회하는 것이 아닌가? 한다.
얼마 전 일본의 국민 메신저인 네이버의 라인을 강탈하려는(시사의창 6월호가 나오는 날에 이미 ‘라인’을 빼앗길까 두렵다.) 일본 총무성의 총책임자 마스모토 다케아키가 이등박문의 손자라고 하니 정말 이등박문의 유령이 아직 우리 땅에 배회하는 것은 아닌지? 질긴 악연이다.
이등박문은 왜? 안중근 의사에게 총살을 당하였는지 안 의사가 제시한 이등박문의 죄악 열다섯 가지를 추려서 알아보자.
이등박문은 명치천황 부친인 태황제를 시살한 대역부도의 죄, 대한제국 황후를 살해한 죄, 대한제국의 황제를 위협하여 부조리하고 불합리한 조약들을 강제하고 대한제국 황제를 강제로 폐위한 죄, 한국 내 산림과 하천, 광산, 철도, 어업, 농/상공, 금융업을 일일이 늑탈한 죄, 한국학교 내의 서책을 압수하고 불사르고 내외국 인민의 신문을 인민들에게 전달하는 것을 막은 죄, 나라를 되찾고자 봉기한 의사, 열사들을 폭도라 하며 죽이고 그들의 가족까지 수십만을 살해한 죄, 한국 정부 고관 역적들의 입을 통해 일본의 보호라는 헛소리를 하고 한국 삼천리강산을 일본 것이라고 한 죄, 명치 천황을 속이고 동양 평화의 영위를 파괴하여 수많은 인종의 멸망을 면치 못하게 한 죄.
안중근 의사가 열거한 이등박문의 죄는 대한국인의 입장에서 보면 죽어 마땅한 자이다. 이등박문의 죄 가운데 대한제국의 황제를 위협하여 부조리하고 불합리한 조약을 강제한 것. 특히 을사조약(1905년 11월 17일)은 춥고 썰렁하며 공포스러운 분위기를 말하는 ‘을씨년스럽다’ 의 유래가 되기도 하였다.
을사조약으로 대한제국의 정치, 경제, 행정, 경찰력까지 모두 일본 제국주의에 넘어가는 상황이 되자 민영환이 자결(1905년 11월 30일)하면서 대한제국 이천만 동포에게 고하는 유서에 ‘국권 침탈의 원수 이등박문은 반드시 조선사람에게 죽임을 당할 것’이라고 하였는데 안중근 의사에게 어떤 교감이 되어 발현된 것이 아닌가? 생각된다.
안 의사는 이등박문을 저격하고 총알을 한 발 남겨 두었다고 하는데 이는 자결을 하려는 의도가 아니고 이등박문 저격을 성공한 후, 더 살상을 할 이유가 없어서 남겨 두었다고 하였다.
안중근 의사는 대한독립군의 참모 중장 자격으로 이등박문을 저격하였고 전쟁 당사국의 포로로서 재판정에서 이등박문의 죄상을 밝히려 생포된 것이었다. 중국 뤼순 감옥에서 순국한 안중근 의사의 유해는 일본 제국주의자들에 의해 숨겨졌고 지금도 행방을 모른다.
하지만 16세에 해주 일대 최고의 포수로 동학교도들의 청년토벌대장을 하였던 안 의사가 10년 만에 세계동포론자로서 진정한 동양 평화론을 제창한 사람으로 변화한 것은 놀라운 일이다.
안 의사는 32살에 순직하여 지금도 애국지사이자 세계동포론자로 평화를 표방하는 영원한 청년으로 남아 있다. 하지만 일본에서 국부로 추앙받는 이등박문은 세계사적으로는 침략 제국주의자로 조선과 일본의 민중을 전쟁의 참화로 몰고 간 전범일 뿐이다.

국립민속박물관 ©gettyImages


일제 강점기가 지나 이등박문의 사찰은 사라졌지만 조선의 국립묘지 격인 장충단은 공원으로 만들어져 장충단 공원이 되었고 경복궁 선원전은 복원되지 못하고 남아 있던 전각까지도 헐어 내고 그 자리에 콘크리트로 국립중앙박물관을 건립하였으니 참으로 슬픈 역사이다.
지금 경복궁 북동쪽에 있는 국립민속박물관을 그냥 볼 때와 알고 볼 때의 차이는 확실히 다르다. 국립민속박물관에 얽힌 이야기는 슬프고 화가 나지만 현재 그곳에서 운영하는 프로그램과 전시물은 가서 체험하고 볼 만하며 관람료도 무료이다.
현재 경복궁 복원계획에 의하면 국립민속박물관은 경복궁 2차 복원 정비 사업에 따라 2030년 전까지 단계적으로 철거하고 선원전의 복원을 한다고 한다. 추후 국립민속박물관은 세종시로 이전할 계획이다.
박문각 건립으로 인한 선원전의 훼손이 경복궁 복원의 일환으로 다시 복원된다면 그날이 이등박문의 유령을 떨쳐내는 날이 아닐까? 생각한다.
일제 강점기의 악행에 대한 진정한 일본의 사과를 받고 한국과 일본의 제국주의 시절의 권력자와 기득권자들에 대한 징벌과 용서를 민주적이고 합법적 절차를 통해 이끌어 나갈 때 한국과 일본의 시민들은 진정한 평화와 민주주의를 누리게 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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