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사포커스-보수의창 (6.25 전쟁발발 74주년 특집)] 아직 끝나지 않은 전쟁 6.25! 한반도에서 대한민국을 다시 생각한다

이스라엘, 마싸다에서 배우는 공동체 수호의지, 결사항전 정신으로 재무장
대한민국 국민, 6.25전쟁에서 이승만의 전쟁승리 의지 평가해야....
미국이 내린 3일만의 참전결정, 존폐의 기로에 선 대한민국 재탄생의 씨앗

편집부 승인 2024.06.07 10:58 의견 0

6월은 호국 보훈의 달이다. 동족상잔의 비극이 있던 날이 속해 있고 1953년 전쟁의 막바지 단계에서 한 치의 땅이라도 더 수복하기 위해 철의 삼각지에서 혈투를 벌였으며 숭고한 넋을 기리는 현충일이 있기 때문이리라. 신록이 퍼져 숲을 이루는 6월이 되면 국립현충원을 찾고 호국영령들을 기리지만 그 기림에 근저에는 국가라고 하는 우리 모두의 공동체가 있다. 선진국에 들어선 이 시대에 국가는 우리에게 어떤 의미가 있으며 오늘날 대한민국 국민이라면 가져야 할 호국 정신은 무엇일까? 국가를 잘 지키고 그 안에서 번영을 이루며 평화를 간직하려는 소망은 대다수 국민들이 가지고 있지만 국가가 실존의 존폐위기에 처하면 정치, 경제, 사회 문화의 모든 것을 담는 큰 그릇이 깨어져 버리기 때문에 국민들은 싸워야 할지 굴복해야 할지를 먼저 생각해야 하고 싸워야 한다고 생각할 때 비로소 귀중한 자기의 목숨을 초개와 같이 바치는 것이다. 호국보훈의 달을 맞아 국가의 내게 주는 의미를 되새겨 보고 북한정권과 마주한 미완의 6.25 전쟁을 맞이한 대한민국 국민들의 공동체 의식을 점검해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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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사의창 2024년 6월호=강현섭 기자] 우리가 사는 공동체 중에서 실질적으로 가장 중요한 최상의 공동체는 나라[國]이다. 이는 가족과 친지나 지역이나 부족을 뛰어넘은 최상의 공동체로서 운명을 같이하는 단위라 할 수 있다.
국가는 나라[國]라는 의미와 가족[家]이라는 의미를 어우르는 말인데 나라라는 의미의 국[國]자를 한자(漢字)에서 분석해보면 천지간 공간에서 입[口]을 보호하기 위해 창(戈)으로 막아내는 것으로 해석하기도 한다.
우리민족은 하나의 민족이 한 나라를 이루어 살면서 한 때는 고구려의 기개를 기상으로 삼아 국토를 정복하며 국가를 이루기도 하였지만 조선시대 이후 국가의 기상은 가문과 지역의 한계를 넘지 못한 채 문약에 빠졌다는 비판도 존재한다.
이런 관점에서 젊은 넋 숨져간 6월을 맞아 그 시대를 짊어졌던 시대정신이 어떠한 마음으로 한 시대를 지탱해 왔는지 점검해 보는 것도 의미가 있다고 할 수 있다.
더구나 6.25 전쟁발발 74주년을 맞아 전쟁의 상흔이 아직도 여전한데 북한은 유일 영도체제와 봉건적 집단 전체주의로 향하고 있으며 군사국가와 계획경제를 지향하고 있는 반면, 대한민국은 자유민주주의와 개인기반의 시장경제를 국가를 지향하고 있는 점에서 대조해 보면 6월 의미를 재해석할 수도 있다.
한반도에 허리 잘린 모습은 한쪽은 배고픔에 굶주린 반면, 한편은 찐 살을 빼고 건강관리를 위해 수 십조원을 쓰는 나라로 변모해 버렸다.
북은 아직도 핵과 투발수단인 미사일 개발을 통해 남측을 군사적으로 위협하고 있지만 대한민국은 K-2전차, K-9 자주포와 현무, 현궁, 천무 등 발사체와 잠수함 및 선박 제조능력 뿐만 아니라 KF-50 이나 K-21항공기를 보유한 국가로 대응하고 있으며 경제적으로도 이미 선진국에 올라 국제무대에서 비교조차 할 수 없는 우위의 평가를 받고 있는 상황이다.
북한 김정은이 최근 대한민국을 향하여 핵무력을 완성하고 대한민국을 ‘적국’으로 헌법에 명시하는 절차를 밟고 있지만 대한민국은 북한의 인민들을 동포로 여겨 세계의 양심에 대하여 인권을 부각하는 등 윤 대통령이 ‘담대한 구상’을 통해 밝힌 흡수통일을 바탕에 깔고 있어 아직도 체제경쟁 중이라 할 수 있다.

북,핵무력 완성 헌법에 명시 2023년 9월 28일 최고인민회의 장면 ©연합뉴스


2024년 6월 호국 보훈의 달을 맞아 우리 민족이 한반도에서 겪었던 국가 존망의 위기를 다시한번 되돌아보고 대한민국 국민이 가져야 교훈으로 마음의 자세를 가다듬어보고자 한다.

병자호란 당시, 전쟁 지휘부의 판단과 대응
1636년 병자호란 당시 청 태종(홍타아지)은 12만의 군사를 몰고 개성과 한양을 함락하고 남한산성에 피신한 인조에게 항복을 요구했다. 인조의 조종에선 주화파와 주전파의 의견이 갈렸는데. 김상헌, 윤집, 오달제 등 성리학자들의 주전파와 최명길 등 양명학자들의 논란 끝에 청의 요구에 굴복하고 인조는 삼전도에 나와 삼궤구고두례(三九叩頭禮)를 행한 사실을 역사는 전하고 있다.
역사학자들은 이것이 국가의 굴욕이니 뭐니 해도 인조라는 가산왕조의 수반이 자기의 목숨을 부지하고 영화를 누리기 위해서 쉽게 취한 행동은 전쟁과 싸움의 포기였다.

1636년 병자호란 당시 조선의 백성들 약 50만명이 청의 포로로 끌려갔다.


조선말. 대한제국 순종의 판단과 결심
전쟁을 피하고 평화를 이루려는 굴욕의 전통은 1910년 순종이 체결한 한일합방 조약과 양위조서에도 나타나 있는데 이 조약에 기록된 대한제국의 멸망 방식은 완전한 문구로 다음과 같은 합의에 이르고 있다.

1910년 8월 29일 발행된 한일합방조약 한국어 원문


1. 한국 황제 폐하는 한국 전체에 관한 일체 통치권을 완전히 또 영구히 일본 황제 폐하에게 넘겨준다.
2. 일본국 황제 폐하는 한국 황제 폐하, 태황제 폐하, 황태자 전하와 그들의 황후, 황비 및 후손들로 하여금 각각 그 지위에 따라서 적당한 존칭, 위신과 명예를 받도록 하는 동시에 이것을 유지하는 데 충분한 연금을 줄 것을 약속한다.
3. 일본국 황제 폐하는 한국의 황족 (皇族) 및 후손에 대하여 각각 상당한 명예와 대우를 받게 하는 동시에 이것을 유지하는 데 필요한 자금을 줄 것을 약속한다.
4. 일본국 황제 폐하는 공로가 있는 한국인으로서 특별히 표창하는 것이 적당하다고 인정되는 경우에 대하여 영예 작위를 주는 동시에 은금 (恩金)을 준다.
5. 일본국 정부는 한국의 통치를 담당하며 이 땅에서 시행할 법규를 한국인의 신변과 재산에 대하여 충분히 보호해주는 동시에 그 복리의 증진을 도모한다.
6. 일본국 정부는 성의있게 충실히 새 제도를 존중하는 한국인으로서 상당한 자격이 있는 자를 사정이 허락하는 범위에서 한국에 있는 제국 (帝國)의 관리에 등용한다.
라고 기록하고 있어 나라를 삼키려는 외국의 세력과 싸우려는 조선말의 전쟁지휘부의 의사는 1도 찾아 볼 수 없다.

조선을 낚으려는 일본과 청국- 풍자화


이 같은 환란은 한반도에서 전쟁을 준비하지 못한 상태에서도 계속되었다.

6.25 전쟁 당시 한반도의 상황
대한민국은 1948년 건국되자마자 1950년 존폐의 위기를 6.25전쟁을 통해 또 겪은 바 있다.
대한민국이 겪은 존폐의 위기는 고려나 조선의 그것과는 전혀 다른 양상이었으며 국가 존폐의 근저에는 체제의 다름과 공산주의자들의 야욕에서 생성된 것이다.
회상컨대 한국전쟁이라는 국가존폐의 칼날 위에서 내린 이승만의 결정은 “끝까지 싸우자”였다. 이에 더해 미국의 신속한 파병 결정도 대한민국을 국가존망의 위기에서 구한 신의 한수로 기록되고 있다.
6월 25일 새벽 4시경 휴전선 부근에 집결했던 북한군 T-50 전차부대는 ‘폭풍 244’라는 작전명을 가지고 기습작전으로 남하해왔다.
그 어떤 선전포고 없이, 무력으로 침투하여 순식간에 대구까지 밀고 들어왔으며, 조금만 늦었어도 현재의 대한민국은 사라지고 조선민주주의라는 인민공화국을 세운 공산주의의 마수에 걸려 죽을 뻔했던 민족적 사변이었다.
북한 김일성은 6.25 전쟁을 일으키기 전 1950년 3월~4월에 소련에 끊임없이 남한 공습을 허락해 달라며 간청했었고, 그의 지속적인 요청이 스탈린에 의해 승인되었던 것이다.
동북아 한반도 내의 전쟁을 넘어 불과 세계 2차 대전이 끝난지 5년도 채 되지 않을 때다. 그동안 남북한의 군인들은 38선 부근에서 서로 티격태격하며 다투어 왔지만 그날의 정황은 예전과 달랐다. 전면적으로 전 전선에서 밀려 내려오는 북한군 탱크사단은 남한의 맨손 불끈 쥔 의분의 남한 군대를 순식간에 밀어 붙였다.
더군다나 6월 25일 당일은 일요일이었기에 전 국민과 학생 군인들도 정신적으로 안식과 평온의 감을 느꼈기에 그야말로 기습일이었다.

6.25는 중공과 소련의 지원하에 이루어진 김일성의 남침전쟁이다.


당시 국가의 상황이 건국한 지 1년 7개월이 지나지 않아 아직도 국가의 기능과 역할이 짜임새 있게 갖춰지지도 않았기에 그간 남로당 등 좌익세력에 맞서 사회불안 척결과 산속 소탕전을 벌여왔던 병사들에겐 어느 정도 휴식도 필요한 시기였고 모내기철을 맞아 고향으로 휴가를 떠난 군인도 있었기에 해이한 기강 탓도 있었지만 보다 근본적인 전쟁의 원인은 군사력에 의해 체제를 공산화하여 오늘날의 북한처럼 만들려는 김일성의 잘못된 기획 탓이었다.
1949년부터 한반도에서 펼쳐지고 있던 미군의 철수작전은 이승만 대통령의 강력한 만류에도 불구하고 착착 진행된 반면 북한에는 소련의 무기제공과 군사지원, 중공의 후원이 있었기 때문이다.
이에 반해 갑작스런 북한의 기습공격에 당한 신생 대한민국 국군은 제대로 된 소총이나 장비도 없었고 공중을 살펴볼 비행기도 없었다.
북한 김일성 군대의 동향은 “북조선 인민군대가 소련 군사고문단의 지휘하에 중무장을 갖추고 조선민주주의 인민공화국을 수립 당시 보여준 열병식을 통해 그 위세를 과시했다”는 점이 부각되었지만 남한 당국은 “그래도 설마”하며 남침은 꿈에도 생각하지 못했던 것이다.

6.25전쟁 진두지휘한 노장 이승만의 ‘싸울 의지’와 미국의 신속 결정
어떤 전쟁이든지 기습은 효과적이다. 6월 25일 새벽에 시작된 전쟁은 3일도 못되어 수도 서울을 적에게 내주었다.
그러나 공산주의자들에게 싸워야 한다는 결정은 이승만 정권이 한 순간의 머뭇거림도 없이 결단하였다.
주전파와 주화파의 갈린 논쟁도 없었다. 게다가 공산주의를 통해서는 이 민족과 국가를 부흥시키려는 어떠한 기도도 모두 허사일 수 있다는 확신을 이승만 대통령을 비롯한 국가지도부가 강하게 인식했기 때문이다.
밤을 꼬박 세운 이승만 대통령은 미국대사 무초를 만나고 장면 미국대사에게 트루만 대통령을 즉시 만나 미국의 참전을 요청토록 지시했다. 또한 이 대통령은 맥아더에게 새벽 3시에도 전화를 걸어 “당신 나라에서 좀 더 성의를 가졌더라면 이런 사태까지 이르지 않았을 것이오. 우리가 여러 차례 경고하지 않았습니까?”라고 질책하며 “어서 빨리 한국을 구하시오”라고 호통을 쳤다.
이 같은 대한민국 정부의 신속한 싸울 의지의 표명과 미국에 대한 이유있는 질타는 트루먼 대통령으로 하여금 6월 29일 “북한군을 38도선 이북으로 격퇴하는 데 필요한 모든 조치를 취한다.”는 미국의 참전의지와 전쟁 정책을 신속하게 불러왔다.
“무슨 수를 써서라도 그 개자식들은 저지해야 한다. 하나님에게 맹세코 그자들이 대가를 치르도록 해 주겠다.” 이는 해리 트루먼(Harry S. Truman) 미국 대통령이 김일성의 남침 소식을 애치슨 국무장관으로부터 보고받고 10초 만에 참전을 결심하면서 나온 첫 일성이다. 그는 대한민국을 공산주의 악마로부터 구해준 위대한 은인이다.
대전(大田)으로 임시정부를 옮긴 이승만 정권은 결국 낙동강 방어선으로 밀려나며 후퇴를 거듭했지만 주일 미군으로 와 있던 맥아더장군과 Walker장군의 지휘에 따라 진지전으로 들어가면서 부산항에 긴급히 도착한 물자와 병력으로 북한군에 맞서며 결국 엄청난 화력을 쏟아부으며 한반도 동남부의 방어에 성공했다.

한국전쟁중의 두 영웅- 맥아더와 워커중장


한때 망명정부를 제주도에 둘 것인가, 아니면 태평양의 한 섬에 약 10여 만 명의 국민만으로 해외탈출할 것인가를 고심하던 미군 수뇌부의 극비 검토안에 대해서도 이승만 대통령은 “만약 공산당이 내 앞에 오면 내가 먼저 그 놈을 쏘고, 내 아내(프란체스카 여사)를 쏘고 내가 자결할 것이오”라며 완강히 망명의사를 거부했고 그의 결사항전 의지는 낙동강 전선을 지켜 낸 군사들에게 사기를 북돋으며 진지전으로 들어가는 원동력이 되었다.
한편 전쟁 초기 영토 90%를 제압당한 데 이어 1950년 9월을 기점으로 대한민국은 95% 영토를 잃어버린 채 크고 작은 전투에서 작은 승전과 큰 패배를 반복하면서 계속 밀린 점을 감안하면 현대를 사는 오늘날의 대한민국 국민들이 6.25 전쟁에서 신속히 이루어진 미군의 결정을 잊어선 안 된다.
1950년 6월 25일, 맥아더 장군은 워싱턴으로부터 하달된 '지령 제1호’에 따라 전방지휘연락단 (ADCOM)을 조직하기로 전격 결정하고 주한 미 고문단의 지휘와 한국군에 대한 지원임무를 전격적으로 수행했다.
아울러, 미 공군과 해군도 신속하게 지원하였다. 미 극동공군은 ‘지령 제2호’에 따라 본격적인 한반도 작전을 개시하였고, 무려 172회의 출격을 했다.
이러한 미 해·공군의 신속한 한반도 전장 투입은 전적으로 맥아더 장군이 25일 21시 35분 (한국시간) 제출한 상황보고서와 트루먼 대통령이 참여한 26일 21시 (워싱턴 현지시간) 제2차 미 국가안보회의 (NSC)의 결정이 매우 빠르게 이뤄졌기 때문이다.
맥아더 장군의 한강방어선 시찰과 미군의 신속한 참전은 당시 상황에서 ‘신 (神)의 한 수’로 평가되고 있으며 이러한 결정은 한국의 전쟁이 아니라 미국의 전쟁이라는 ‘변화’를 의미했다.
맥아더 장군의 판단력과 신속한 조치는 한강방어선을 구축하고 전투의지를 고양하는 데에도 큰 역할을 한 것으로 평가받고 있다.
이 같은 맥아더 장군의 지휘력과 신속한 참전 결정은 전쟁 상황에서 한반도의 상황을 크게 바꾸며 이후 전쟁에서 한국의 방어를 강화하는 데 큰 역할을 하게 된 것이다.
물론 이승만 대통령의 영어소통 능력이 미국의 무작정 철군을 질타한 결과이긴 하지만 오늘날 우크라이나를 침공한 러시아군에 대해 미군이 단 1명의 군사조차 보내지 않고 있는 현실을 감안할 때 6.25 동란 시 미군의 한국전 참전 결정은 우리 대한민국 국민에게 내린 신의 축복이며 위기의 상황에서 내린 맥아더의 빠른 판단이 오늘날 대한민국이 선진국으로 도약 진입하게 한 여의주 같은 선택이 된 셈이다.

이스라엘 마싸다에서 배우는 유대국민의 호국정신
마싸다(히브리어, 요새라는 뜻)는 이스라엘 남부, 유대 사막 동쪽에 우뚝 솟은 거대한 바위 절벽에 자리 잡고 있는 고대의 왕궁이자 요새이다. 서기 73년 제1차 유대-로마 전쟁 당시 끝까지 로마군에 항거하며 로마군의 공격에 패배가 임박하자 포로가 되지 않기 위해 전원 자살한 것으로 유명한 전설을 간직한 곳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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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싸다는 천혜의 절벽요새로서 높이 400m, 정상은 길이 600m, 폭 250m의 평지를 이루고 있는데 1963 ∼1965년 고고학자 이갈 야딘 교수의 발굴작업으로 전설로만 내려오던 이야기가 그 실체를 알리게 되었다.
역사는 서기 70년 로마제국의 티투스 장군이 예루살렘을 공격해오자, 유대인 지도자 엘리아젤 벤 야이르가 이끄는 유대인 열심당원(Zealot 또는 Kanai)들 약 960명이 마싸다 요새로 피신하여 로마에 대한 저항운동을 계속하였다고 전한다.
로마군단은 마싸다의 험난한 지형 때문에 쉽게 정벌하지 못하고 장장 3년 동안이나 공격을 계속해 오던 끝에 엄청난 토담(ramp)을 쌓아 마사다 요새에 접근하게 된다.
이로써 마싸다의 수비벽이 무너지고 로마군단의 진격이 확실시되자 지도자 벤야이르는 로마군에 잡혀서 온갖 수모를 겪느니 차라리 自由人으로서 영광되게 죽기를 결심한다.
각 가족의 가장들은 사랑하는 아내와 자식들을 직접 칼로 찔러 죽인 다음 모든 남자들이 한 자리에 모여 열 명을 추첨하고 그들이 나머지 사람들을 죽이고 다시 한 명을 뽑아 아홉 명을 죽인 후 그도 최후로 자결하였다고 전해지는데, 요새푸스의 유대전쟁사에 의하면 노파 1명, 어린이 5명, 엘리아젤 벤 야이르의 친척 노인 1명 등 모두 7명이 생존하여 이 이야기를 전하고 있다.
3년 동안 한 맺힌 포위작전에 대한 영광의 대가를 바랐던 로마군은 960구의 시체 앞에서 망연자실했으며 그 비극적인 사실이 오늘날까지 전승되고 있으며 이스라엘인들은 불멸의 성지로 여겨 현재 이스라엘 장병들은 훈련을 마친 뒤 마싸다를 방문하여 선서식장으로 활용하고 있다.
72년 플라비우스 실바 장군이 이끄는 로마 제10군단이 마싸다로 진격했지만 유대의 마지막 열심 당원들은 성벽을 굳건히 지켜 내었지만 로마군이 서쪽의 고원과 같은 높이의 거대한 성채를 쌓아올려 공성을 준비했고 이 과정에서 유대 저항군의 반격을 기록하지 않았는데 이는 로마군이 성채를 쌓을 때 같은 열심당인 유대인 노예를 이용했기 때문에 민족주의성향이 다분한 열심당원이 차마 동족을 죽일 수 없었다고 보는 역사학자도 있다.
마싸다에서 저항하던 유대 열심당원들은 로마군이 공성기를 이용해 성벽 일부를 깨뜨리고 요새로 진격해 들어오자 식량창고를 제외한 요새 안의 모든 건물을 방화했고 유대인 율법이 유대인의 자살을 엄격히 금지하고 있었기에 유대인들은 제비를 뽑아 서로를 죽였으며, 최후에 2인이 남자 한 명이 죽이고 남은 한 명은 자살했다고 전한다.
다른 건물을 모두 불에 태우면서도 식량창고만은 남긴 것은 최후까지 자신들이 노예가 되지 않으려고 자살한 것이지, 식량이 없거나 죽을 수밖에 없어서 자살한 것이 아니라는 것을 보여주기 위한 목적이었다.

이스라엘, 마싸다는 신병훈련의 호국결의 맹세장소
이스라엘 국방군 장관이었던 모세 다이안은 이곳의 고대 전쟁사를 이스라엘 국방군의 상징으로 보고 신병훈련을 마싸다에서 끝마치게 했다. 부대에서 이곳까지 명예스러운 행진을 하며 밤에 이곳을 올라 “다시는 마싸다가 함락되게 하지 않는다!”는 맹세를 하는 의식을 통해 이스라엘 국민은 다시는 함락되지 않을 호국의식을 가슴 찡하게 심어준다고 한다.

마싸다에서의 신병선서 모습


끝나지 않은 전쟁, 6월에 다시 새겨보는 애국(愛國). 호국(護國)의식
인류가 남긴 종교나 철학에서 자주 언급되는 주요 가치들을 살펴보면 추상명사로서 사랑과 자비, 그리고 평등한 가운데 평화와 감사를 꼽을 수 있다.
공동체에서 선한 이웃을 사랑하며 불쌍한 중생에게 자비를 베풀며 생의 일상에서 범사에 감사하며 이웃과 친선과 우의로서 교제할 때 우리는 이런 추상명사의 가치들을 언급한다. 또한 민주주의 사회에서 차별받지 않는 신분으로 평등한 세상을 꿈꾸는 것은 비단 고등종교나 철학의 가르침만은 아닐 것이다.
그러나 가정하여 칼과 창으로 적들이 우리의 인간성을 위협해 올 때 우리는 착한 양이 되어 털을 깎이고 살아야 하는가? 마싸다에서 벌어진 6.25와 같은 전쟁에서 항복하지 않는다면 전멸과 죽음으로 끝나거나 원치 않는 자들의 체제와 한계 속에서 살아야 하는가? 아니면 마싸다의 열심당원들이나 이승만과 같이 저항해야 하는가? 인조나 순종과 같이 굴종해야 하는가?
우리 대한민국은 산업화로 배고픔을 이겨냈고 민주화로 평등사회를 이뤄냈으며 수정 자본주의를 통하여 공산주의의 혁명성을 완화시키고 있는 복지국가이다.
성경의 전도서에 의하면 “헛되고 헛되며 헛되고 헛되니 모든 것이 헛되도다.”라는 명구가 있지만 그래도 우리가 최상의 운명공동체인 국가를 위해 애국심을 가지고 조국을 위해 헌신하며 살아간다는 것은 그 의미가 남다르지 아니한가?
해 아래에서 헛되이 수고하는 모든 수고가 행여 나와 내가 속한 작은 단위의 공동체에 비록 유익하지 않더라도 대한민국 전체인 운명공동체인 국가에 유익하다면 한번 가져볼 만한 가치는 아니겠는가?
이달이 6월이니만큼 대한민국 국민들이 현충원과 독립기념관을 돌아보며 애국심(愛國心), 호국(護國)의 정신을 한번 되새기며 그 진정한 의미를 체험으로 느껴 보길 바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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