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영섭의 스포츠 칼럼] 제1회 전국 생활 체육대회를 주최한 세종시 복싱협회 양희천 회장

조영섭기자 승인 2024.06.05 14:06 의견 27

[시사의창=조영섭 기자] 순환하는 계절의 흐름 속에 올해도 어김없이 초여름을 알리는 6월이 돌아왔다. 지난 주말 한통의 전화가 걸려온다. 세종시 복싱협회 양희천 회장이었다. 6월 1일 오후 1시부터 제1회 전국 생활 체육대회가 충북 세종시 세종시민회관에서 개최된다는 소식이었다. 연락을 받고 급히 목적지로 향했다. 이 대회는 정순현 회장과 호형호제하는 세종시 복싱협회 양희천 회장이 복싱 볼모지 세종시를 국내 복싱의 메카로 발돋음하기 위해 사비(私備) 8천만 원을 투자하면서 개최한 대회다. 이번 대회는 전국 37개 체육관에서 390명의 생활체육 복싱선수들이 참가했다. 현장에 도착 정순현 대광건설 회장을 만났다. 1952년 9월 천안 출신의 정순현은 1977년 7월 24전 22승(14KO) 2패를 기록한 국가대표 출신의 고생근에 9회 KO승 복싱사상 최대의 이변을 연출하면서 주목을 받은 복서 출신이다.

김광수 대표 정순현 회장 이건희 대표(좌측부터)


1979년 11월 정순현은 리카르도 카르도나 (콜롬비아)가 보유한 WBA JR 페더급 타이틀에 도전 주도권을 잡고 우세한 경기를 펼쳤지만 고배를 마신 비운(悲運)의 복서다, 캐스팅 보트(Casting vote)를 쥔 미국심판 마킨 덴킨이 카르도나에 2점 우세로 채점하는 바람에 정상 등극에 실패한 것이다. 당시 불공정한 판정에 크게 격분한 트레이너 김준호 선생은 가위를 들고 링에 올라 주심을 날카롭게 바라보며 무언의 위협을 가하기도 했다. 성난 관중들은 물병을 집어 던지는 등 공포 분위기를 연출되자 카르도나 는 링 밑바닥으로 숨는 촌극을 연출했다. 이런 지난 아픔을 속 잠바에 깊숙이 감춘 사업가로 변신한 정순현 회장이 위풍당당하게 김광수 이건희 대표 등 사업 파트너와 함께 등장한다.

이현주 김완수 대한복싱협회 심판위원(좌측부터)


현장에 일찍 도착한 필자는 대한복싱협회 김완수 곽동성 두 심판위원을 정순현 회장에게 인사를 시켰다. 원광대를 졸업하고 교직에 입성 30년 넘게 봉직하다 수년 전 동반 퇴직한 두 심판은 70년대 한 시대를 풍미한 프로복서 정순현 회장을 반색하면서 맞이했다. 잠시 후 이번 대회를 유치한 세종특별시 복싱협회 양희천 회장이 등장한다. 정순현 회장의 소개로 수년 전 알게 된 양희천 회장은 1957년 이 고장 출신으로 강창수 관장 문하에서 복싱에 입문 15전의 아마 경력을 쌓은 경기인 출신 복싱회장이다. 양회장은 자신의 스승 강창수 관장은 그 어려운 그때 그 시절 선산 2개를 팔아가면서 선수양성에 몰입 2007년 72세의 일기로 타계할 때까지 한평생 복싱 외길을 걸은 복싱인이었다며 지난날을 회상했다.

양희천 회장과 오장균 챔프(좌측부터)


양희천은 복싱을 접고 골재업(骨材業)을 하면서 사업이 확장되자 지난날 복싱을 일찍 접은 회한(悔恨)의 아쉬움을 이 고장 출신의 동양 밴텀급 챔피언 오장균, 민영천 한국챔피언을 지낸 김정완을 후원하면서 달랜다. 현재 직원 15명을 보유한 환경산업 대표를 역임하고 있는 양희천 회장은 사업에서 창출되는 이윤을 복싱에 재투자 세종시에 실업팀을 창단하겠다는 원대한 포부를 표출했다. 잠시 후 최민호 세종 시장이 등장 인사를 나눴다. 1956년 대전 출신의 최민호 시장은 내년부터는 이번에 세종시에서 개최된 전국 생활 체육대회를 발판으로 내년에는 예산을 편성 적극 지원을 할 계획이라고 밝혔다. 필자의 현역시절 88체육관에서 함께 훈련한 오장균은 양희천 회장의 희생적인 투자로 인해 자신이 성장 할 수 있었다고 말했다. 1962년 조치원 태생의 오장균은 18년간 현역 생활하면서 48전을 뛰어 국내 챔피언 3차례 동양 챔피언 2차례를 역임한 이 고장 출신의 대표적인 복서다. 그는 한화그룹 김종희 회장이 빙그레란 계열사에 정순현 선배를 취직시켜 이를 전환점으로 명복서 반열에 올랐다고 설명하면서 선수들에게 대한 조력자들의 전폭적인 투자는 복서들의 폭풍 성장을 가져온다는 명언을 남겼다. 백전노장 오장균이 현역에서 활약한 18년이란 긴 세월은 조선 10대 임금 연산군과 정조 때의 실학자 다산 정약용 선생의 유배 기간과 동일하며 박정희 대통령의 통치 기간과 해태 타이거즈 김응룡 감독의 집권 기간과 일치한 긴 세월이다. 경기가 진행 중일 때 연예계 팔방미인 이동준을 비롯 황충재 박종팔 등 58년 개띠 3총사와 함께 백인철 챔프가 우정 출연을 위해 경기장에 입장한다. 원로복싱인 정순현 회장을 비롯 오늘 귀한 자리에 참석한 다섯 분의 체육인은 저마다 다채(多彩)로운 진기록을 보유한 진품명품(珍品名品) 체육인이었다.

백인철 챔프 양희천 회장부부 황충재 챔프(좌측부터))
세종시 대표로 소년체전 동메달 획득한 이준호 황충재 백인철 챔프 부친 이정국(좌측부터)
김완수 심판 정순현 회장 곽동성 심판(좌측부터)




먼저 헨드볼 선수 출신답게 민첩한 순발력이 뛰어난 정순현은 한국복싱 백년사에 사상 최초로 세계타이틀전에 3차례 도전한 복서다. 바통을 이어받은 황충재는 1978년 12월 15일 제8회 방콕아시안게임 W급 준결승전에서 말레이지아의 마심과 대결 1회 공이 울리자마자 던진 라이트 한방에 13초(카운트 포함) 만에 KO승 아시안게임 최단 시간 KO승을 기록했다. 1979년 4월 프로에 전향 6전승(5KO)을 기록한 황충재 는 1980년 2월 필리핀에 원정 단디 구즈만을 한차례 다운을 탈취하고 12회 판정승을 거두고 동양 W급 정상에 오른다. 5차 방어를 연속 KO로 방어한 황충재의 6차 방어전은 한국복서들의 무덤인 태국에 원정이었다. 홈링의 도전자는 전(前) WBC 슈퍼 라이트급 챔피언 사엔삭 무앙수린. 5만 태국 관중이 운집한 가운데 펼쳐진 이 대결에서 황충재는 한차례 다운을 빼앗으며 판정승을 거둔다. 태국과 필리핀에서 2차례에 걸친 원정 동양 타이틀전에서 성공한 이 기록은 언뜻 보기엔 평범하게 보일듯하지만 사실은 유례를 찾기 힘든 매우 진기한 기록이다.

박종팔챔프 최민호 세종시장 양희천 회장(좌측부터)
박종팔 최민호 이동준 양희천 백인철 황충재 박장서(좌측부터)



1960년 1월 전남 고흥 태생의 백인철은 원래 레슬링과 축구에 발군의 재능을 보인 복서다. 1980년 5월 9일 프로 대뷔전부터 시작된 26차례 경기를 연속 KO로 장식 국내 프로복서로는 유일하게 기네스북에 등재된 인물이다. 50전 47승(43KO) 3패를 기록한 백인철은 국내의 막강한 전력을 보유한 역대급 복서들과 18전을 싸워 전승을 기록했고 그중 16차례는 KO로 장식했다. 백인철은 중량급에서 쌍두마차를 형성한 박종팔이 한방에 상대를 침몰시키는 전형적인 슬러거형이라면 그는 침묵의 도살자란 닉네임처럼 천천히 상대를 침몰시키는 컨택형 복서다. 박종팔도 기록에서는 빠질 수 없는 복서다. 1958년 8월 전남 무안 출신의 박종팔은 1979년 8월 동양 챔피언에 오른 뒤 1983년 5월 16차 방어전에서 라경민에게 벨트를 풀 때까지 3년 9개월에 걸쳐 15차례 방어전에서 연속 KO승 아시아 신기록을 세웠다.

박종팔 챔프 양희천회장 이동준 대표(좌측부터)


그리고 78년 8월 동경에서 개최된 한일신인왕전에서 일본의 가즈오 고시마를 1회 27초 만에 KO승을 거두는 진기록을 세웠다. 또한 1967년 서강일부터 시작되어 김태식 홍수환 최충일 김득구로 이어지는 미국원정 세계타이틀전 24연패에 종지부를 찍는 귀한 승전보를 전달한 복서가 바로 박종팔 챔프다. 태권도 공인 7단의 국가대표 태권도선수 이동준은 1981년 83년 85년 3회 연속 세계선수권을 재패한 택견 달인(達人)이다. 초등학교 2학년때부터 태권도를 익힌 1958년 10월 청주태생의 이동준은 1978년 청주기계공고 재학시절 987명이 출전한 고기부 (3단이상) 웰터급에 출전 성인선수들을 차례로 제압 우승을 차지하면서 주목을 받았다. 경기 중간에 기념촬영시간이 있었다. 황충재는 1977년 제58회 전국체전에 동반 출격한 곽동성과 해후(邂逅) 하면서 반갑게 인사를 나눈다. 이 장면을 지켜본 필자는 젊었을 때는 꿈과 야망을 먹고 살지만 어른이 되어서는 추억과 그리움을 먹고 산다는 누군가의 말이 떠올랐다. 당시 W급에서 금메달을 획득한 황충재의 전남 팀은 F급의 김광섭 LW급의 주항선등 3체급을 석권했고 전북은 B급의 곽동성 LM급의 김현호 LH급 의 김원전이 우승을 차지한 대회였다. 이대회에 심판으로 참관한 김완수 이현주 두 심판위원을 경기장에서 마주하자 1981년 킹스컵 대표 선발전에서 두 복서가 태릉선수촌에서 격돌한 지난날의 경기장면이 스쳐 간다. 김완수(수경사)는 1975년 제56회 전국체전에 F급 전북 대표로 출전 결승전에서 서울 대표 박찬희(한영고)에 접전 끝에 4ㅡ1 판정패를 당했다. 절치부심한 그는 1978년 제2회 김명복 박사배(페더급) 우승과 함께 최우수복서(MVP)로 선정되어 우수선수 장학금 8만 원을 받았다. 이를 발판으로 그는 아시아선수권 선발전(MVP)을 포함 대통령배 전국체전을 싹쓸이 그해 4관왕을 달성한다. 그리고 수경사에 입대한 1979년 7월 제31회 세계군인선수권대회에 출전 4강에서 강력한 우승 후보 서독의 노베르토 랑구토를 3회 RSC로 잡고 결승에 진출 홈 링의 베네주엘라 국적의 실라자르에 분패를 당한다. 이 경기를 지켜본 단장으로 참관한 이진백 장군은 편파판정에 억센 고성을 쏟아내며 격렬하게 항의했지만 흘러간 물은 물레방아를 돌리진 못했다.

이진백 장군은 육군참모총장을 지낸 이진삼 장군의 친동생이다. 이현주 위원은 곽귀근 고희룡 정희조 홍기호 들과 더불어 예절 바른 겸손한 복싱인이다. 국제대회에서 3관왕을 달성한 국가대표 출신의 이현주(목포대)는 문성길 전칠성 장성호 권현규와 함께 1983년 목포대 전성기를 창출 한 주역이기도 하다. 얼마 전 그는 모교인 전남체고 교사직을 퇴임하고 대한복싱협회 심판위원으로 봉직하면서 인생 3막을 유유자적하게 보내고 있다. 끝으로 오늘 귀한 자리를 제공한 세종시 복싱협회 양희천 회장. 대광건설 정순현 회장을 비롯한 관계자분 들에게 깊은 감사의 인사를 올린다.

조영섭 기자 6464ko@naver.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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