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음에 맞는 친구들, 여행을 좋아하는 사람들과의 여행을 나는 ‘함께 여행’이라고 정의한다. 나이 차가 있고 하던 일도 다른 다양한 사람과 같이 있는 것만으로 즐겁다. 서로 배우고 가르쳐 준다. 서로를 알아가는 재미도 있다. 끝으로 여행을 다녀온 후 관계가 더 끈끈해진다. 홀로 여행, 가족여행에 이어 ‘함께 여행’을 시리즈로 소개하고자 한다.

노을 지는 작은 어촌 보목마을 앞 바다 – 제주도

[시사의창 2024년 5월호=서병철 기자] “아제주도가 고향이세요? 혹시 다음 여행 리더 역할을 해주실 수 있을까요?” 여행작가학교 동기 모임에서 알게 된 사람에게 느닷없이 부탁했다. 감사하게도 흔쾌히 “그러죠”라는 대답과 동시에 독특한 ‘쉬멍 놀멍 걸으멍(이른바 3멍) 제주 힐링 여행’이 시작되었다. 제주 본토베기가 살았던 마을 중심으로 여행한다는 것에 먼저 호기심이 생겼다. 제주도는 얼마나 많이 다녀온 관광지인가. 그러나 이번 3멍 제주 여행은 매우 독특했다. 여행을 좋아하는 여행자학교 동기들과 ‘함께 여행’을 떠나보자.

해녀의 집, ‘불턱’앞에서 즐거워하는 미녀 5총사 - 제주도


보목마을, 작은 마을 매력에 빠지다_ 첫째 날 쉬멍
제주도를 많이 왔다고 생각했는데 이름도 생소한 보목마을에 도착했다. 이번 여행을 기획한 동기가 태어나고 자란 마을이다. 마을 진입로 양 옆에 야자수가 길게 뻗어 있어 미국 서부 여행지를 온 듯한 착각이 들었다. 숙소에 도착하자마자 밖으로 나왔다. 작고 아름다운 마을을 걷고 느껴보고 싶었기 때문이다. 서귀포 바다 한가운데 숲이 우거져 ‘숲섬’이라고도 부르는 ‘섶섬’이 눈에 띄었다. 섬 주위에 50m 높이의 주상절리가 이채롭다. 해녀들이 옷을 갈아입거나 언 몸을 녹이기 위해 불을 지피던 공간을 ‘불턱’이라고 한다. 여기는 네모난 건물을 새로 짓고 벽에 해녀와 바다 풍경을 그려 놓았다. 자신만의 포즈를 취해 달라고 했더니 각자 최선을 다했다. 이런 재미난 사진 찍는 것이 ‘함께 여행’의 묘미 중 하나다. 이윽고 해가 지고 있는 노을 모습이 저 멀리서 시작된다. 빠른 걸음으로 걸어가는데 아쉽게도 이미 해는 거의 다 넘어간 뒤였다. 그럼에도 남아 있는 빨간 그러데이션(gradation) 노을, 그 자체로도 너무나 멋진 장관이었다. 도착하는 첫날부터 이번 제주 여행이 범상치 않음을 예견했다.

상처 난 동백꽃을 바라보며 제주 4.3 사건의 희생자를 추모하다 - 제주도


치유의 숲에서 진정한 치유를 받다_ 둘째 날 걸으멍
서귀포시의 호근동에 오래전에 화전민이 살았던 숲이 있다. ‘치유의 숲’이라 불린다. 암을 극복하고 건강을 되찾은 숲 해설사의 인생 이야기와 함께 ‘치유의 숲’길을 3시간 동안 걸었다. 특히 여기는 피톤치드를 제일 많이 내뿜는다는 평균 수령 60년 이상의 편백나무와 삼나무 군락을 만끽할 수 있었다. 숲 해설사가 동백꽃 앞에서 갑자기 멈추었다. 동백은 상록 활엽수 교목으로 남부지방, 제주도에서 자생하며, 꽃은 12~4월에 핀다. 보통 꽃은 꽃잎이 하나씩 떨어진다. 그러나 동백꽃은 질 때 꽃잎이 전부 붙은 채 한 송이씩 통째로 떨어지는 특징을 가지고 있다.
“하얀 눈 위에 떨어진 동백꽃은 제주 도민들의 아픔으로 남아 있는 ‘제주 4.3사건’에서 희생된 사람들을 나타낸다.” 해설사는 동백꽃은 제주도에서 남다른 의미가 있다고 말했다. 이야기를 들은 후 눈앞에 보인 상처 난 듯한 동백 꽃잎이 나의 시선을 멈추게 했다. 잠시나마 4.3사건이라는 제주도의 아픈 역사를 기억하고, 희생자들을 위해 고개를 숙였다. 혹독한 겨울을 이겨내고 꿋꿋이 핀 동백꽃은 굴곡 많은 사람의 일생과도 닮아있다.
편백 나무숲에 도착 후 각자 나무를 하나 안아보라고 했다. 일행 모두가 각자 편백나무 한 그루를 연인처럼 껴안았다. 나무에 귀를 가까이 하면서 나무와 대화를 하고 주변 소리도 들어 봤다. 처음에는 사람 소리만 들렸는데 바람 소리가 들리기 시작했다. 신기하게도 조금 지나니 청명한 새 소리와 함께 바람에 스치는 나뭇잎끼리 부딪치는 소리까지도 들렸다. 아! 시간을 멈추고 온전히 자연에 몰입하였을 때 내 마음이 치유됨을 체험했다. 내려오는 도중에 투고했던 한 출판사로부터 계약을 하고 싶다는 긍정적인 메일까지 받으니, 치유뿐만 아니라 기쁨으로 이어졌다.

편백 나무를 껴안고 숲의 소리를 들으며 마음을 치유 받다 – 제주도


백년 옷을 만드는 청년 농부를 만나다_ 셋째 날 놀멍
‘목화 오름에 간다고 그런 오름도 있나’ 도착하니 오름이 아니라 평지다. 잘못 온 거 아니냐고 했더니 환하게 웃는 미남 청년이 반갑게 맞아 주었다. 유기농 목화 농사를 8년 동안이나 짓고 있다고 했다. 농부이자 의류 디자이너다. 목화와 옷으로 가득 찬 작은 삼나무로 만든 공간, 직접 커피를 내려주며 대화가 시작되었다. 목화를 이렇게 가까이에서 바라본 것은 처음이었다. 빛에 반사된 목화는 하얀 솜털이 드러나며 네잎클로버처럼 뭔가 행운을 가득 가져다줄 것만 같았다. 명품 옷을 지향한다고 하는데 목화로 만든 티셔츠 옷이 무려 100만 원이라니 놀라지 않을 수 없었다. 100명의 소중한 고객을 모시고 싶다는 게시판에는 9명의 이름과 응원의 글귀가 쓰여있다. (이후 전주, 진주 고객이 직접 방문해서 옷을 받아 가서 11명 됨)
정보람 대표와 많은 이야기를 나누었다. 가장 큰 걱정은 수입이 많지 않은 상황에서 앞으로 이 일을 지속할 수 있겠는가였다. 다행히 한국보다 오히려 유럽에서 관심을 가진 고객을 알게 되었고 지원도 받고 있다고 한다. 최근에 해외 상가에서 홍보하고 판매까지 하는 기회가 생겼다. 오늘 너무 멋진 청년을 만났다. 회사 CEO 자리를 마다하고 오로지 자기가 하고 싶은 일에 매진해서 자신만의 꿈을 꾸고 있는 청년과 대화하면서 나에게도 자극이 되었다. “자신의 꿈을 반드시 이루세요”라는 짧지만, 강한 응원의 메시지를 전달하고 헤어졌다. 매년 10월 마지막 날 포함한 며칠간 무료 음악 페스티벌과 요가 등을 한다고 하니 관심 있는 분은 방문해서 함께 즐기면 좋겠다.
함께 여행을 가면 각자 즐기는 방식도 다양하다. 사진에 진심인 사람은 멋진 자연을 담고, 때론 동행자 모습을 찍어 주면서 즐겁다. 글을 쓰는 사람은 하루 동안 벌어진 일들을 손 글씨로 남긴다. 이번 여행은 여행드로잉 전문가 2명이 동행했다. 펜과 수채화를 이용해 일상과 여행의 순간을 직접 그리는 것이다. 목화 오름 정보람 대표와 많은 이야기를 하는 것을 좋아했다. 그만큼 드로잉하는 시간적 여유가 생기고 완성도가 높아지니까. 스케치하고 물감으로 하나하나 칠하면서 완성해 가는 모습이 너무나 멋지다. 여행 장소를 이동하면서 완성품을 만들어 가는 기쁨은 그들만이 가질 수 있는 특권이 아닌가. 부럽고 배우고 싶다.

목화 오름에서 청년 농부 정보람 대표와 동기들과 함께 – 제주도
목화 오름을 드로잉으로 표현하고 완성하다 – 제주도


제주에 이런 먹거리가 있었나요
여행을 오면 즐겨 쓰는 앱을 통해서 맛집을 찾아서 가곤 한다. 대부분 맛이 괜찮았지만 기대와 달리 아쉬운 경우도 종종 있게 마련이다. 그러나 이번에는 달랐다. 제주 토박이 추천의 음식을 맛보는 재미가 정말 쏠쏠했다. 마을 주점에서 빙떡과 옥돔구이를 주문했다. 처음 먹는 음식 조합이라 흥미로웠다. 빙떡은 메밀전병에 삶은 무채를 넣어 말아 먹는 음식이다. 빙떡을 손으로 집어 들고 옥돔 살코기를 떼어 얻어서 먹어야 한다고 했다. 빙떡만을 먹으면 약간 싱겁다. 조금 짠 옥돔구이와 함께 먹으니, 간도 맞고 음식 궁합이 아주 잘 어울렸다. 신선한 뿔소라 무침까지 더하니 그야말로 최고의 저녁 식사다.
맛있었던 음식이 하나 더 있는데 고기국수다. 돼지고기 수육이 고명으로 올라가기 때문에 ‘고기국수’라고 불린다. 돼지고기 냄새가 하나도 나지 않았다. 국물은 돼지 뼈와 소금만으로 맛을 낸 느낌이라 깔끔했다. 순대가 맛있다는 말에 추가 주문했다. 돼지 피 그대로라서 비릿한 냄새가 났지만, 자꾸만 젓가락이 머물렀다. 당면이 없이 찹쌀로만 만들어서 탱글탱글하고 쫄깃쫄깃한 식감이 특히 더 구미를 당겼다. 너무 맛있다고 사진을 올렸더니 동기들이 포장해서 가져오라고 아우성쳤다.

돼지고기 고명이 얹어진 깔끔한 국물이 끝내주는 고기국수 – 제주도


현지인의 집에 저녁 초대를 받다
나는 여행을 할 때 가장 중요하다고 생각하는 것이 있다. 그 지역 주민의 집에 초대받는 것이다. 해당 지역의 문화를 체험하고 지역 주민과 좀 더 가까워질 좋은 기회이기 때문이다. 고맙게도 이번 여행을 기획해 준 동기의 어머니가 동기생들을 저녁에 초대했다. 직접 키운 각종 채소, 성게미역국, 정성스러운 밥을 80세 초반의 연세임에도 손수 준비해 주셨다. 대화할 때 제주도 방언이 섞여 있어서 딸이 통역을 해주는 재미있는 장면이 연출되기도 했다.
가족사, 감귤 농사, 자식을 키우기 위해 헌신적으로 살아오신 어머니의 살아온 이야기 자체가 감동이었다. 문득 부모님이 아닌 할머니와 살았던 나의 초중고 시절이 떠올랐다. 그래서 더 살갑게 다가가고 싶어서 대화를 더 많이 했다. 헤어지기 전에 꼭 안아 드리고 “건강히 지내세요”라고 말을 건넸다. “내년에 또 와. 귤 한 상자씩 줄게” 약속까지 해 주시는 어머니. 여행을 마무리하면서 이토록 마음이 따뜻해진 적이 있었을까.
“진정한 발견의 여정은 새로운 풍경을 찾는 것이 아니라, 새로운 눈을 가지는 것이다. ” 프랑스 소설가인 마르셀 프루스트가 말한 명언이다. 여행의 주요한 목적 중 하나는 아름다운 풍경을 보는 것이다. 물론 중요하다. 이번 여행은 작은 마을에 오래 머무르면서 다른 차원의 아름다움을 발견하고 새로운 여행자의 시선이 생겼다. 제주의 겉이 아닌 깊은 속 안으로 들어가 본 소중한 기회였다. 또한 여행을 좋아하는 동기들과의 함께 여행을 통해 더 가까워지고 누구보다 편한 여행 동반자가 되어 뿌듯했다. 다음 여정은 어떻게 펼쳐질지 벌써 설레고 기대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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