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컬러인문학] 여행과 색

편집부 승인 2024.05.03 14:53 의견 1
유민아르누보뮤지엄


[시사의창 2024년 5월호=김향란 칼럼니스트] 서울대학교 인문학연구원 부교수이자 인문학자인 김헌 교수는 어느 인터뷰에서 이런 이야기를 했다. “평생 함께 할 책이 있다면 인생은 외롭지 않다.”고 말이다. 그에 따르면 세대에 따라서 같은 책이라도 다가오는 의미가 다르기 때문이라고 했다. 맞는 말이다. 20대 읽었던 법정스님의 무소유가, 30대, 40대, 50대에도 같은 감성으로 다가오지 않을게 분명하고, 그때 느낄 수 있는 감성으로 읽혀질 것이기 때문이다. 같은 계절을 맞이하더라도 그 계절이 시절마다 다르게 느껴지는 것은 삶의 경험과 연륜이 현재에 이르기 때문이다.
이처럼 여행도 마찬가지다. 몇 년 전 필자인 나는 여행과 관련한 트렌드를 발표하면서, 좋은 여행이라는 것은 삶에 영향을 미칠 수 있어야 하며, 많은 이들이 이를 경험하기 위해 주목하고 있다는 것이었다. 그렇다. 인생의 책이 그러하듯 여행도 인생의 지평을 확장해주는 역할을 한다. 그래서 여행을 계획하고 준비하면서 설렘이 마지막까지 이어지고, 다시 일상으로 복귀했을 때 더 나은 나를 발견하게 되는 것 같다.

안도 다다오, 제주의 정원(바람, 돌, 청보리)


이번 제주 여행이 내게 있어서는 그 어느 때보다 깊은 생각에 빠지게 하는 그런 시간이었다. 특히나 안도 다다오(Tadao Ando, 1941년 오사카 출생. 독학으로 건축을 공부한 후 1969년 안도 다다오 건축연구소를 설립)의 유민아르누보뮤지엄은 제주의 자연을 너무도 감동스럽게 정원과 건축에 녹여 놓았기에 더욱 그러했다. 그가 즐겨 쓰는 노출콘크리트와 빛, 자연과 어우러지는 형태들은 지면으로 옮겨놓는 것이 부끄러울 정도로 감격 그 자체였다.
색은 그러하다. 공기와도 같아서 당연하다고 느끼게 된다. 그러나, 이렇듯 감격적인 건축물이 자연과 호흡하는 것을 보면 모든 것이 달리 보일 수밖에 없는 듯하다. 전해지는 공기가 다르듯이 보이는 색 역시 시공간을 뛰어 넘는 그 무언가로 존재함을 실감한다. 회색의 노출콘크리트가 제주의 하늘과 바람과 공기와 검정의 현무암과 절묘한 조화를 이루는 것은 충분한 자연에 대한 배려가 있기 때문이다. 도심에서 회색의 마감재는 사뭇 다른 삭막함을 전달하지만 자연 속에서는 그조차도 자연의 일부가 된다.
김우중 스테파노 신부님은 색은 빛의 생채기로 만들어졌다고 말씀하셨다. 프리즘을 통과할 때, 빛은 굴절이라는 형태로 꺾인다. 파아란 하늘과 황혼의 붉은색은 산란이라는 과정을 통해서 보게 되는 색들이다. 서로 부서지고 흩어져 옅어지게 되는 것 역시 신부님의 눈에서 본다면 고통을 감내하고 만들어내는 아름다운 색채의 향연일 것이다. 그런 시각이 고흐의 눈에서는 태양의 노랑을 표현하고, 아를의 노오란 외벽을 만든게 분명하다.

안도 다다오, 유민아르누보뮤지엄, 멀리 보이는 성산일출봉을 품은 창


봄의 제주는 노란 유채꽃보다도 안도 다다오가 만들어낸 제주의 정원에서 바람과 돌과 바다를 한껏 느낄 수 있었다. 절제있는 길다란 사각의 선과 면들이 서로 어우러져 입체 공간을 만들고, 틈으로 들어오는 자연의 빛은 밝음과 어두움을 극명하게 연출하고 있었다. 안과 밖의 풍경은 또다른 시각의 전이를 만들어낸다. 공간의 어둠은 높은 천정에서 들어오는 빛으로 자연의 경이를 표하게 하고, 길다랗게 뚫린 창은 성산일출봉을 품었다. 계절에 따라 이 풍경은 얼마나 다채로운 색들을 만들어낼지 상상만으로도 기쁨이 몰려온다.
마르셀 프루스트(Marcel Proust, 1871.7~1922.11, 프랑스 작가)의 ‘잃어버린 시간을 찾아서’에서 처럼 홍차에 적신 마들린의 향기로 기억이 되살아나듯, 향기뿐만 아니라 색도 기억을 만든다. 향기의 기억이, 색의 기억이 삶에 하나의 점을 만들 듯, 좋은 점들의 연결은 인생의 좋은 서사를 만들 수 있을 것이다. 여행에서 돌아온 후, 안도 다다오의 노출콘크리트가, 그가 해석한 제주의 정원에서 보인 검은 현무암이, 초록의 청보리가 자꾸만 뇌리를 맴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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