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구촌에서 동북아시아는 다른 지역과 달리 세계 강대국들의 집결, 미국과 중국의 패권경쟁, 그리고 불완전 주권 국가들의 상호작용이라는 특징을 가지고 있다. 특히 두 개의 한국과 두 개의 중국, 그리고 보통국가를 지향하는 일본이라는 주권의 결손이라는 특징 때문에 동북아 국제정치는 정상적인 국제정치게임과 더불어 주권게임을 동시에 벌이고 있다. 냉전의 종식 이후에는 세계화, 자유주의 국제질서의 약화, 환경 문제 등 탈근대 이행의 새로운 변화에 대응해야 하는 과제도 안고 있다. 동북아 국제정치의 고유성을 이 지역의 국가들이 어떻게 인식하고 미래를 설계하느냐가 이 지역에서 안정과 평화를 이룰 수 있는지를 서울대학교 전재성 교수의 견해를 토대로 재정리한다.
[시사의창 2024년 5월호=강현섭 기자] 지구촌에서 현재 벌어지고 있는 우크라이나 전쟁과 하마스의 이스라엘 침공을 둘러싼 중동지역의 전쟁은 대내적으로 최고 권위를 가진 주권국가들 간의 국제정치게임으로 인식할 수 있다. 이는 동북아 지역도 예외가 아니어서 한반도의 긴장과 갈등 역시 긴 역사를 갖지 못한 불완전한 주권국가들이 벌이는 국제정치 게임으로 보면 잘못된 진단과 처방의 오류에서 벗어날 수 있을 것이다.
서울대학교 전재성 교수는 2024년 봄, 다양성+아시아에 기고한 글에서 학술적 관점과 국제 정치적 관점을 포괄하는 수준에서 대한민국이 위치한 동북아 지역의 역사 정치적 상황을 설명하고 국제정치게임이라는 진단을 통해 미래로의 방향성을 제시하고 있다. 전 교수의 견해를 토대로 동북아의 주권전쟁과 국제정치게임을 분석하고 글로벌 거버넌스에 대응하는 동북아 국가들의 삼중게임을 살펴본다.
동북아 국제정치의 성립 근거
흔히 동북아시아는 남북한과 중국, 대만, 일본, 몽골, 그리고 러시아와 미국이 이루는 지역으로 일컬어진다. 세계적 강대국인 미국과 러시아는 말할 것도 없고, 이제는 중국도 지구적 세력이 되었다. 일본과 대만은 최소한 동남아 국제정치의 당사국이기 때문에 스스로를 동북아에 국한된 국가라고 생각하지 않으며 몽골 역시 중앙아시아, 혹은 유라시아 국가이기도 하며 동북아 국가라는 정체성이 압도적인 국가는 아니다.
동북아 지역의 한반도에 수립된 남북한 정권을 제외하고 모두 제국을 경험한 국가들이다. 대만을 포함, 중국은 근대 이전 아시아를 천하질서로 이끌어온 천자의 나라로 자부했고, 미국과 러시아 역시 세계에 걸친 제국을 경영하였다.
일본 역시 한때 제국을 건설하여 스스로 식민지를 소유한 국가였다. 몽골 역시 동유럽에서 한반도에 걸친 광대한 제국을 건설한 유목 강대국이었다. 오로지 한반도의 남북한이 식민지를 건설하고 제국을 경영한 경험이 없는 세력이다.
동북아 국제정치의 특징
동북아 지역질서, 혹은 동북아 국제정치를 논하는 이유는 무엇일까? 국제정치학에서 지역은 그 자체로 존재하는 개념은 아니고 상호작용으로서 즉 자연지리가 아닌 인문지리적 개념이며 더 나아가 정치적 개념이기 때문이다.
동북아 국제정치의 특징을 살펴보면. 첫째, 세계적인 강대국들이 모여 있다는 점이다. 미국, 러시아, 중국, 일본 등은 여러 국력표준, 즉, 군사력, 경제력, 영향력과 같은 소프트 파워 등 다양한 국력표준으로 살펴보아도 세계에서 최강대국을 구성하는 국가들이다. 세계 어느 지역도 이처럼 최강의 강대국들이 한 자리에 모여 있는 지역은 없다. 이들 국가들의 상호작용은 명실공히 강대국 정치이며 이들의 이해관계는 비단 동북아에 한정된 것이 아니라 전 지구에 걸쳐있다.
이들이 중동이나 유럽, 동남아에서 가지는 상호 이익과 갈등의 관계는 동북아에 직접적인 영향을 미칠 수밖에 없다. 다른 말로 하면 동북아 국제정치는 지구적 국제정치에 매우 민감하며 높은 정도의 상호작용을 한다는 것이다.
둘째, 21세기 전반기 세계질서를 규정하는 강력한 동력은 미중 간의 전략 경쟁에서 나오고 있다. 미국은 2차 세계대전 이후 소위 자유주의 국제질서를 수립하여 세계의 패권국가로 존재해오고 있다. 비단 힘이 강한 것이 아니라 세계질서의 근거를 규정하는 규범과 원칙, 규칙을 제공하며 이를 위해 다른 강대국과는 다른 지도력을 발휘해왔다.
반면 중국은 근대 이전의 세계적 최강대국이자 현재에도 세계 1위의 인구대국으로 1978년 경제개혁, 개방 이후 눈부신 경제발전을 이루어왔다. 구매력 기준 국내총생산은 이미 미국을 누르고 세계 1위의 국가가 되었고 아시아는 물론 지구적 차원에서 미국의 지위에 도전할 국력을 갖추어가고 있다. 중국이 아직 명시적으로 미국의 패권을 대체하겠다는 전략을 내세우고 있지는 않지만 미국의 영향력으로부터 독립적인 영향권을 구축하고 있다는 의심을 받기에는 충분하다.
아시아를 미국과 중국의 영향권으로 나누는 중국의 힘은 동북아에도 뻗쳐오고 있으며 미국도 이를 막기 위해 총력을 기울이고 있는 것이다.
셋째, 동북아 지역에는 불완전한 주권을 가진 국가들의 존재하고 있다. 미국과 러시아는 전형적인 동북아 역내 국가는 아니지만 여전히 지구적 세력으로 한 발을 동북아에 담그고 있는 세력인 반면 중국, 일본, 한반도, 몽골은 근대 이전부터 동북아의 역내 세력이었으며 오랜 상호관계의 역사를 가지고 있다.
동북아 지역의 국가들은 근대 이전 모두 중국의 천하질서에 속해 있다가 19세기 중반 이후 서구의 제국주의 침탈에 의해 점차 유럽식 근대주권국가로 변모한 국가들이다. 문제는 이들 국가들이 현재 온전한 주권국가의 모습을 갖추고 있지 못하다는 것이다.
한반도와 중국은 분단되어 각기 두 개의 정치체제를 이루고 있다. 몽골 역시 중국의 영향 하에서 내몽골과 외몽골로 나뉘어져 있다. 일본은 성공적인 근대화로 제국을 이루었지만 오히려 너무 성공적인 나머지 미국과 제국 간 전쟁을 벌였고 패전국이 되어 온전한 군대를 갖추지 못하고 소위 보통국가를 지향하는 국가가 되었다.
천하질서에서 자율적 주권국가체제로 변화
1876년 강화도 조약으로 조선이 개항하고 근대적 국제정치에 편입되기 이전 한반도는 중국이 만든 천하질서 속에 있었다. 조공과 회사(回賜), 책봉 등의 기제를 통해 중원과 주변의 관계가 유지되었고 중국은 주변을 다스리기 위해 직접 지배로부터 유화, 기미(羈) 등 다양한 정책을 활용하였다. 이러한 천하질서는 지금의 기준으로 얼핏 보면 완전한 지배와 복속의 관계 같지만 사실은 한반도 왕조, 혹은 아시아의 주변 왕조들이 상당한 자율성을 가지고 있던 체제였다.
중국은 중원왕조가 중국 내의 여러 세력들을 직접 지배할 능력이 부족한 상황에서 형식적 지배를 내세운 봉건제도를 운영하였고 소위 내복(內服)에 해당하는 중국 내 세력들을 천하질서로 묶어 다스렸다. 이러한 체제가 중국 이외의 세력, 즉 외복(外服)에까지 확장된 것이 천하질서이다.
이 과정에서 주변부 왕조들은 중국에 대해 조공을 바치고 책봉을 받는 등 종속의 관계를 가졌지만 사실상 상당한 자율성을 가지고 있었고, 그렇게 보면 천하질서는 근대적 개념의 제국이라기보다는 과거 강대국, 약소국 간의 외교 관계의 한 형식이라고 볼 수 있다.
유럽 역시 중세에는 유럽식 천하질서, 즉 황제와 교황이 쌍벽을 이루며 유럽 전체를 다스렸던 기독교 지역질서를 이루고 있었다. 그러다가 16세기를 전후하여 스페인 왕국으로부터 유럽의 신성로마제국과 보편적 기독교 질서를 탈피하여 영토에 기반한 주권국가를 이루게 된다.
프랑스, 네덜란드, 영국 등 신흥 국가들은 유럽 전체를 놓고 각축을 벌이게 되고 결국 30년 전쟁(1618-1648)이라는 엄청난 희생자를 낸 당시 유럽의 세계전쟁을 거치고 서로 타협하게 되는데 그 결과 탄생한 것이 주권국가이다(김준석, 2018).
동북아 국가들의 주권국가 체제 이행
주권국가는 영토를 기준으로 정치세력을 나누고 서로의 국내적 최고성을 상호 인정하는 단위들이다. 즉 제국의 야망을 버리고 상호공존하기로 약속한 국가이다.
시대가 변하면서 국가의 주권은 영토, 국민, 효율적 정부, 국제사회의 인정 등 다양한 요소로 정의되기에 이르렀지만 문제는 유럽 강대국들이 서로 간에 인정한 주권이라는 것이 매우 제한적인 것으로 유럽의 약소국, 더 나아가 비유럽 국가들에게는 전혀 인정하지 않는 매우 특권적인 것이었다는 점이다.
산업혁명을 거치면서 유럽의 힘이 아시아나 중동 등 다른 지역에 비해 월등한 우위를 차지하게 되자 유럽 국가들은 각자 제국주의를 추구하며 비서구 국가들을 무력으로 복속시키게 된다. 이 과정에서 비유럽 세력들을 식민지로 만들고 이들의 주권을 부정하였는데, 19세기와 20세기 전반기까지의 세계질서는 주권이라는 개념이 존재하였음에도 불구하고 지금과는 매우 다른 모습을 가질 수밖에 없었다.
그러나 주권의 개념을 부정당한 많은 약소국들, 식민지 국가들은 오히려 제국의 주권개념을 자신의 것으로 만들었고 스스로 주권적 독립국가가 되기 위한 열렬한 노력을 기울였고 그 결과 1945년 전후 세계의 거의 모든 단위들이 주권국가로 독립하여 지금과 같은 국제질서를 이루게 된다. 유럽에서 기원한 주권국가 체제의 전 세계적 확산이며 동북아도 예외가 아니라는 것이다.
일본의 식민지였던 한국, 열강의 침략으로 반식민지 상태였던 중국, 러시아와 중국의 영향권 하에 있던 몽골 모두가 이때 주권국가라는 새로운 옷을 입고 독립하게 된다.
일본은 일찌감치 근대화에 나서 근대 주권국가는 물론 제국으로 인정받았지만 1941년 태평양 전쟁에서 패전하여 전후처리에서 새로운 헌법을 가진 비제국 주권국가로 재탄생한다.
그렇게 보면 한 세기가 채 되지 않는 기간 동안만 근대 주권국가체제를 유지하고 있는 동북아의 국제체제가 과연 앞으로 어떻게 변화할 것인가, 지금의 주권체제가 영원히 지속될 것인가 하는 의문이 떠오른다.
소련이 해체되고 냉전이 종식된 1991년을 기준으로 생각해보면 그때부터 세계는 지구에 걸친 경제적 세계화, 기술의 발전으로 인한 통신과 교통, 이동의 세계화, 그리고 지구적 민주화로 인한 시민사회 및 비국가 행위자들의 발전, 유럽에서 목도된 바와 같이 주권국가를 넘어서는 지역체제의 성립, 그리고 최근 코로나 사태로 경험한 위험의 세계화까지 급격한 변화를 겪었다.
많은 학자들은 이제 근대 주권국가의 약화, 심지어는 종식을 논의하고 개별 국가주권을 넘어서는 지구 거버넌스, 세계화를 뒷받침할 수 있는 세계주의의 전망을 논하는 시대에 이르렀다.
반면 동북아는 여전히 치열한 주권국가들의 각축, 강대국 정치, 여전히 앙금으로 남아있는 근대 이행기의 역사 문제에 발목이 잡혀있다. 유럽 연합을 미래의 꿈으로 여기고 동북아 연합, 혹은 아시아 연합을 이야기하지만 현실은 그와 거리가 멀다.
이미 세계는 주권국가를 넘어서는 이행의 움직임, 근본적 필요에 직면해 있는데 과연 동북아의 미래는 어떻게 될까?
주권게임과 국제정치게임
천하질서, 주권국가질서, 지구적 거버넌스 등 동북아를 규정하는 근본적인 체제적, 구조적 측면을 국제정치학에서는 조직원리라고 부르는데 우리가 살고 있는 현재의 주권국가질서는 오직 국가만이 원리를 가진 단위이며 이들 간의 관계는 서로의 최고성을 인정하는 소위 무정부상태 질서이다. 우리가 처해있는 현실의 조직원리이기 때문에 당연해 보이지만 사실은 역사가 매우 짧고 변화를 목전에 둔 유동적인 질서이다.
문제는 동북아의 주권국가질서가 여전히 과거에 발목이 잡혀있다는 것이다. 근대 이행기에 동북아인들은 과거로부터 간직해온 영토와 민족, 정부의 개념이 있었다. 모두 성공적인 정치단위를 유지해오고 국민들 간에 높은 통합성과 문화 수준을 영위해 왔기 때문에 근대에 들어서도 그러한 단위를 유지하고자 하는 열망이 있는 것은 당연한 일이다.
일례로 한국은 한반도와 부속도서라는 영토를 기반으로 역사와 문화, 언어를 공유하는 한국인이 하나의 국가를 이루는 것이 근대의 당연한 모습인 것이다. 중국, 일본, 몽골 모두 마찬가지이다.
그러나 현실은 그렇지 않다. 모든 단위들이 주권적 요소에 치명적 결손을 가지고 있다. 분단되었거나, 보통국가의 지위를 누리고 있지 못하기 때문에 내로라하는 온전한 주권국가의 자부심을 내심 가지고 있지 못하다.
영토의 획정은 갈등을 동반하며 유럽의 경우 치열한 전쟁을 거쳐 조약을 통해 인정되는 것이 보통이다. 영토가 만들어지면 그 영토에 사는 주민들은 새로운 국가의 국민으로 재정립된다. 1861년 이태리를 통일한 카부르 재상은 “이태리는 만들어졌다. 이제 이태리인을 만들 차례이다”라고 언급한 바 있다. 유럽인들은 치열한 전쟁과 희생을 통해 근대주권국가를 만들어왔고, 이 과정은 물론 이상적인 과정은 아니다.
비서구의 경우 주권국가는 원래 토착적 질서도 아닌데다가 이 과정에서 서구제국의 이해관계가 반영되었고, 독립의 과정도 국제정치의 영향, 내부적인 독립 세력들 간 갈등 등 다양한 요소가 가미되었다. 비서구 국가들이 서로의 영토와 국민을 획정하기 위한 갈등과 타협의 기간이 충분히 주어지지 못한 채 독립을 맞은 것이다. 더욱이 2차 세계대전의 승전국인 미국과 소련을 축으로 한 냉전은 비서구 국가들이 여유를 가지고 주권국가체제에 적응할 여유를 빼앗아 버렸다.
동북아 국가들 역시 서구 열강의 제국주의, 일본의 제국적 확장, 그리고 연이어 벌어진 냉전을 겪으면서 온전한 주권국가로 각자를 재정립하고, 다른 국가들과 타협과 조정에 의해 주권국가체제를 이룰 정치적, 시간적 여유를 갖지 못했기 때문이다.
그 결과 동북아 국가들은 여전히 내부적으로, 그리고 대외적으로 온전한 주권국가를 이루기 위한 치열한 노력을 기울이고 있다. 소위 주권게임이다. 한국과 중국은 통일을, 일본은 보통국가를 이루기 위해 노력하고 있다. 이미 한국과 중국은 한국전쟁과 내전을 통해 근대 국가로 이행과정을 추구했지만 미완의 전쟁으로 분단을 겪고 있다. 일본은 제국이 아닌 보통국가로 다른 국가들의 승인을 받지 못하고 여전히 평화국가로 존재하고 있다.
이러한 상황과는 별개로 불완전한 주권국가인 동북아 국가들은 국제법적으로는 온전한 주권국가들이다.
한국, 중국, 일본은 UN의 회원국이며 대외적으로 온전한 주권국가라는데 의심의 여지는 없다. 불완전 주권국가라는 것은 스스로 마음속에 가지고 있는 개념일 뿐이다. 북한도 UN의 회원국으로 주권국가의 자격을 가지고 있으며, 대만은 중국과 각축에서 주권적 지위를 부정당하고 있지만 여전히 국가의 지위를 추구하고 있다. 다른 국가들이 보면 선진국의 국력을 가진 국가들로서 이들 간의 상호작용은 온전한 국제정치의 상호작용이다. 소위 국제정치게임이다.
그렇게 보면 동북아 국제정치는 미국, 유럽 등 다른 지역의 선진국들과 마찬가지의 온전한 상호작용을 벌이는 국제정치게임으로 규정된다. 그러나 물밑에서는 여전히 주관적으로 간직한 온전한 주권국가로 재탄생하기 위한 주권게임이 벌어지고 있는 것이다.
유럽에서는 볼 수 없는 현상이다. 흥미로운 점은 동북아 뿐 아니라 다른 비서구 지역에서도 불완전 주권국가의 문제와 주권게임의 양상을 다른 형태로 볼 수 있다는 것이다.
흔히 지금의 국제정치가 주권국가들 간의 힘과 지위를 둘러싼 각축이라고 보지만 사실은 역사적으로 형성되어 온 주권에 대한 좌절과 불만이 정상적인 국제정치게임을 뚫고 분출되는 것이 현실이라고 할 수 있다(전재성, 2020).
동북아에서의 현실과 두 개의 게임
한반도에서 남북관계를 좌절에 빠트리고 있는 가장 큰 문제 중의 하나는 북핵 문제이다. 1993년에 시작된 문제이니 거의 30년의 역사를 가진 문제이다. 독일은 냉전이 종식되면서 통일을 이루었는데, 한반도는 같은 분단국가였지만 냉전의 종식과 함께 북핵 문제를 떠안게 되었다.
북핵 문제는 북한의 세습독재 권력이 정권을 유지하기 위해 최후의 보루로 핵을 가지고자 한 결정으로 단순히 정의할 수 있다. 그러나 앞의 맥락에서 보면 형식적 주권국가로 UN의 가입국인 북한이 냉전의 종식으로 사회주의권, 특히 소련이 몰락하고 중국이 한국과 수교하자 스스로 자신의 존립 자체에 실존적 위기를 느껴 핵무기라는 절대무기의 개발에 의존한 사건으로 볼 수 있다.
북한이 실존적 위기를 느끼는 것은 흡수통일의 두려움 때문이며, 주권국가가 지도에서 사라질 수 있다는 생각은 여전히 남북한이 온전한 주권국가가 아닌 이행기의 두 단위이기 때문이다.
사실 1970년대 이후 지구상에서 주권국가가 사라진 예는 극히 드물다. 주권국가는 다른 국가들에 의해 생존이 승인된 존재이기 때문이다. 무력으로 타국의 주권을 빼앗고 영토의 전부, 혹은 일부를 병합하면 불법으로 제약을 받게 된다.
그러나 남북한의 경우 스스로도 통일의 정당성을 내세우고 있고, 국제사회 역시 암묵적으로 통일국가의 출현을 국제법적 불법이라고 무조건 매도하기는 어렵다. 이러한 상황에서 북한이 느끼는 실존적 위협의 근원은 남북한이 모두 불완전 주권국가이며 여전히 근대 이행 중에 있기 때문이다.
북핵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서는 단순히 북한의 핵을 포기시키는 압박과 유화로는 불충분하다. 북핵 문제가 북한의 정치적 지위와 관련된 문제이고 이는 남북한이 서로 간에, 그리고 국제사회에서 어떠한 주권적 지위를 인정받는가의 문제이다.
2023년 12월 30일 북한 김정은 국무위원장은 노동당 전원회의에서 “남북이 통일될 가능성은 없다.”고 밝히고 “남북 관계를 ‘동족 관계’가 아닌 ‘적대적 두 국가관계’로 규정했다.
김 위원장은 “우리가 동족이라는 수사적 표현 때문에 미국의 식민지 졸개에 불과한 괴이한 족속들과 통일 문제를 논한다는 것이 우리의 국격과 지위에 어울리지 않는다.”며 “북남관계는 더 이상 동족 관계, 동질관계가 아닌 적대적인 두 국가관계, 전쟁 중인 두 교전국 관계로 완전히 고착됐다.”고 발언했다. 그러면서 ‘흡수통일’을 기조로 하는 한국과는 “그 언제 가도 통일이 성사될 수 없다.”고 결론 내리는 입장을 밝혔다.
이 같은 태도가 한반도를 대상으로 한 주권국가의 주도권 싸움이라고 보면 우리는 지혜를 가지고 국제관계 속에서 북핵 문제를 다룰 수밖에 없는 것이다.
북한이 그토록 주장하는 체제안전보장, 그리고 북핵 문제와 더불어 해결해야 하는 평화체제의 문제는 북한의 비핵화나 남북한의 군축에 한정된 문제가 아니라 남한과 북한 간의 주권적 지위의 문제, 불완전 주권국가의 근본적 문제, 주권게임의 해결을 둘러싼 문제이기도 하다.
미국이 바라 본 북핵 문제의 대강은 핵과 미사일이라는 대량살상무기의 비확산의 문제, 동맹국인 한국의 안전을 보장해주어야 하는 확장억지 및 동맹국 안보의 문제로 인식하고 있으며 인류의 양심에 기초한 관점에서 세습독재의 핵 개발로 경제 제재 하에 놓인 북한 주민의 인권 문제 등으로 인식하고 있다.
앞의 논의를 기초로 살핀다면 국제정치게임의 측면들이다. 정상적인 국제정치 속에서 국가들 간의 관계로 북미 관계를 보면, 북한은 불법적인 깡패국가(rogue state)로 표상될 수밖에 없는 것이다.
동북아가 겪어온 주권국가로 이행과정의 왜곡과 고난을 전체적으로 보지 못하면 북핵 문제와 같은 하나의 사건 속에 농축되어 있는 주권게임과 국제정치게임의 상호작용, 문제 해결을 위해 풀어야 하는 복잡한 문제의 전체적 범위 등을 인식하기가 쉽지 않다.
설사 주권게임의 본질을 역외 국가들이 이해한다 해도 이를 해결할 정책적 자원을 투입하기에는 막대한 비용이 들고 또 역외국가들 자신들의 문제가 아닌 것이 사실이다. 오히려 국제정치게임에서 이익을 위해 불완전 국가들의 주권게임을 활용하는 유혹을 받을 수도 있다.
북핵 문제를 예로 들었지만 동북아 국제정치의 많은 문제들은 주권게임과 국제정치게임의 복합으로 나타난다. 중국이 통일하기 위해 노력하는 주권게임의 의제들, 일본이 보통국가 혹은 정상적 군사국가로 변모하기 위해 기울이는 노력들, 그리고 한중일 간에 복잡하게 얽힌 다양한 역사문제, 영토문제는 주권게임의 문제와 직결된다.
그러나 동북아 국가들이 풀어야 하는 문제는 주권게임의 문제 뿐 아니라, 현실적으로 다가오는 많은 국제정치게임의 문제들, 예를 들어 자유무역협정, 군축, 환경문제, 코로나 사태와 같은 보건 문제 등 많은 문제들이 산적해 있다. 동북아 국가들은 정상적인 주권국가의 지위와 인식을 가지고 이러한 문제들에 대처하는 것이 불가피하지만 그 근저에 자리 잡고 있는 주권게임의 과제가 동북아 국제정치의 문제들을 매우 복잡하게 만들고 있는 것이다.
국제정치적 근대를 넘어서는 힘(Power)들과 동북아 국가들
냉전이 종식되자 낙관적인 지식인들은 역사의 종언, 이상주의 시대의 구현 등을 외쳤다. 공산주의가 무너지고 자유민주주의가 세계를 휩쓸고 이들 간에 민주적 평화, 시장을 매개로 한 자본주의의 평화가 도래할 것으로 예상했다. 세계화의 힘이 세계의 빈곤을 없애고 사람들 간의 마음의 장벽을 무너트려 바야흐로 지구촌이 만들어질 것으로 기대했다.
그러나 세계인은 9.11 테러를 목도했고 2008년 경제위기 이후 미국을 비롯한 유럽 선진국들이 경제적 고난을 당하는 것을 보았으며, 2019년 말에 발생한 코로나 사태로 과거 냉전의 전쟁에서 희생된 숫자를 넘어서는 사망자의 비극을 당하고 있으며 강대국 러시아에 의한 약소국 우크라이나의 침공도 바라보았다.
희망의 시대라고 낙관했던 탈냉전 30년이 신냉전의 위기의 시대로 다시 회귀한 원인은 무엇일까?
국제정치의 측면에서 탈냉전 30년은 근대 주권국가 조직원리의 근본적 변화이다. 국가를 단위로 한 상호작용으로 지구인들의 정치적 관계를 규정했던 현실에 근본적인 변화가 발생하고, 한 국가, 혹은 강대국들이 좌우할 수 있었던 국제정치 현상의 한계가 명백하게 등장하는 것이다.
국가들은 자국의 이익을 위해 세계화를 추진하여 막대한 규모의 상호작용을 추진했지만 이를 관리할 전 지구적 거버넌스 체제를 구축하는데 무력하여 그 영향을 관리하지 못하고 속수무책인 상황이다.
예를 들어 미국은 1990년 소위 워싱턴 컨센서스를 만들어 자본의 탈규제, 경제적 세계화의 합의를 만들었고 이러한 신자유주의 세계화는 미국 단극의 패권체제의 경제적 기반이 되었다(Rodrik, 2011).
그러나 결국 이러한 세계화는 여러 메카니즘을 거치면서 2008년 경제위기의 원인이 되었고 미국 내 불평등 심화, 기존 정치질서에 대한 미국민의 반발, 그리고 급기야 도널드 트럼프 대통령의 당선과 자유주의 국제질서의 급격한 약화로 이어지고 있다.
지구적 차원의 탈냉전 변화는 동북아에도 서서히 변화의 흐름을 형성하고 있다. 동북아 국가들 역시 자유주의 국제질서에 편입된 국가들이고 세계화의 영향 하에 놓여 있으며 강대국 정치에 대한 수용성이 매우 높은 지역이다.
이 같은 동북아 지역에서의 우려는 한미동맹과 미일 안보조약과 함께 작년 5월 캠프데이비드 선언으로 한미일이 함께하는 모습을 보여주고 있다. 2024년 4월 미일 정상과 필리핀 마르코스 대통령이 함께한 이 회의는 대중국 견제와 협력 기조를 강조했다.
조 바이든 미국 대통령은 이날 오후 백악관에서 기시다 후미오 일본 총리, 페르디난드 마르코스 필리핀 대통령과 3국 정상회의를 열기 전에 양국을 향한 미국의 방위 공약의 굳건함을 강조했으며. 마르코스 필리핀 대통령은 이 정상회의를 통해 남중국해 등 동남아 판도가 바뀔 것이라고 밝혔다.
이번 합의는 중국의 공세적 행동에 대응하고 3국방위 협력을 진전시키기 위한 것으로 향후 5∼10년간 필리핀에 약 1천억 달러 (약 139조원) 규모의 투자가 성사될 것으로 전망되어 동북아 정세의 중요한 발전이며, 지역 안보와 경제 협력을 강화하는데 큰 역할을 할 것으로 보인다.
우크라이나 전쟁과 하마스의 이스라엘 침공 및 중국의 대만 침공 우려는 새로운 냉전 양상을 보이고 있다.
동북아 지역에서 변화하는 미국의 국력과 지위에 직접 영향을 받으며 미국을 넘어서고자 하는 대중국 전선이 형성되고 있다는 의미이다.
한 세기가 채 안 되는 근대 주권국가체제를 만들어온 동북아 국가들이 이제는 탈근대이행의 거버넌스 게임을 동시에 벌여야 하는 상황에 앞서 주권의 완성이라는 주권게임과 자국의 이익과 권력을 증진시키고 국가 간 협력을 추구하는 전형적인 국제정치게임, 그리고 이제는 미래를 알 수 없는 새로운 도전인 탈근대 거버넌스 게임을 동시에 치르게 된 것이다.
탈냉전기 동북아의 삼중게임
탈근대의 양상은 근대 국가주권의 강화로 나타나게 된다. 트럼프로 대변되는 자국이익 우선주의는 감당하기 어려운 지구적 문제들에 대한 소위 각자도생 전략의 대표격이다. 세계화의 문제, 적대세력과의 상호의존, 국경을 자유롭게 넘나드는 코로나 바이러스 등에 대비하기 위해 국가들은 우선적으로 자국의 주권을 강화하는 손쉬운 전략을 택하고 있다.
세계에는 더 많은 트럼프주의자들이 나타나고 있고, 일방주의적인 국가전략이 횡행하며, 기존의 다자주의 세계질서는 무너져가는 듯 하였지만 대중국 견제를 위해 동북아 지역의 각국들은 미국의 퇴조를 자신의 세력으로 메우려는 중국에 맞서 다시 새로운 질서를 형성하고 있다.
중국은 전통적 영향력을 온전히 되찾는 주권게임의 성공, 그리고 세계 최강대국으로 국제정치를 이끄는 국제정치게임의 성공, 더 나아가 소위 인류공동체의 지도국이 되어 새로운 지구 거버넌스를 제시하고자 하는 탈근대 거버넌스 게임의 성공을 모두 추구하고 있지만 동북아와 인류를 위해 최선의 리더십을 발휘하면 좋겠지만 상황은 유동적이다.
대만문제를 자신의 천하질서 속에서 해결해야 하는 숙제를 부여받은 시진핑과 중국 공산당 세력은 2027년까지 대만통일을 완수하려는 목적을 가지고 정치질서를 흩뜨리고 있기 때문이다.
미중간의 경쟁이 동북아에 미친 영향
미-중 간의 경쟁은 동북아 지역의 안보에 다양한 영향을 미치고 있다. 이러한 영향은 다음과 같이 나타나고 있다.
첫째, 미국과 한국은 북한의 핵 문제를 다루는데 있어 한미일 공동전선을 펼칠 것으로 예상된다. 이로 인해 북중 및 북러 관계가 더 긴밀해질 가능성이 높아질 수 있으며 한민동맹의 강화될 것이다.
둘째, 아울러 북한의 추가 무력 도발이 지속되면서 한반도 긴장이 고조될 수 있다. 북한의 도발에 대한 유엔 안보리 차원의 징벌적 조치가 중국과 러시아에 의해 계속 무산되면 북한의 도발 공간이 늘어날 우려가 있다.
셋째, 다음 달 하순에 윤석열 당선인과 조 바이든 미국 대통령의 한미정상회담이 개최될 예정인다. 이번 회담은 지난 해 캠프데이비드 선언에 이어 한미관계의 강력함을 과시하는 이벤트가 될 것으로 예상된다.
넷째, 미중 전략적 경쟁 속에서 한국의 역할이 매우 중요해졌으며 민주주의, 군사력, 기술력을 겸비한 한국은 미국과 중국 모두에게 필요한 중요한 '중간지대’가 되어가고 있다. 이러한 요소들이 복합적으로 작용하여 동북아 지역의 안보와 국제정세에 영향을 미치고 있다.
동북아의 미래
냉전기까지 동북아 국가들은 미소 양국이 벌이는 치열한 국제정치게임 속에서 불완전 주권의 완성을 위한 기회를 빼앗기고 온전한 주권국가 성립의 꿈을 키워왔다. 냉전이 종식된 이후 그동안 억눌렸던 주권게임의 의제들이 속속 출현했고, 이는 북핵 문제, 남북통일, 중국 양안관계, 영토문제, 역사문제, 일본의 보통국가화 등 다양한 문제들에서 표출되었다.
미국과 러시아는 이러한 주권게임의 문제들을 충분히 인식하지 못하거나 혹은 활용하는 모습을 보였다. 역내 국가들끼리도 서로 먼저 자신의 주권게임의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다른 국가들의 주권의 불완전성을 활용하기도 한다. 중국이 두 개의 코리아 정책을 추구한다거나, 일본이 북한과 수교를 추구하면서 한국을 압박하는 경우도 우리 입장에서는 서운한 일들이다.
그러나 우리가 꿈꾸는 동북아는 하나의 한국, 하나의 중국, 보통국가 일본이 서로의 주권을 온전히 인정하면서도 평화와 안정, 상호 번영 속에 살아가는 지역이다.
그러려면 우리 모두가 근대 이행 과정에서 엄청난 고난을 겪었으며 외부에서 이식된 주권국가체제를 내재화하기 위해 많은 고통이 수반되었음을 정확히 인식해야 한다. 그 과정에서 서로를 침략하고 활용하면서 자국의 이익을 우선시하였고 그 결과는 지금에 이르고 있다. 여전히 불완전한 근대 이행 과정에 있으며 동북아 국가들 간 다자주의적인 주권국가체제를 이루는 과제가 남아있다는 사실을 인정할 필요가 있다.
국제정치게임은 서로 간에 힘과 이익을 위한 치열한 경쟁의 과정이기도 하지만 협력과 다자주의를 향한 가능성도 열려 있다. 시장을 매개로 한 교역과 상호의존의 평화, 민주주의 국가들 간의 협력과 조정을 통한 안정, 그리고 다자주의 국제제도를 위한 평화, 더 나아가 같은 동북아인들이 가질 수 있는 공동의 정체성에 기반한 상호 이해 등의 가능성은 열려 있다.
문제는 이러한 가능성 밑에 주권게임이라는 치열한 각축이 동시에 진행되면 평화는 더 멀다는 것이다. 우리가 공통으로 겪고 있는 문제들에 대한 상호 이해와 조정의 과정이 동시에 이루어져야 한다.
2020년 코로나 사태는 이상의 문제들과 전혀 다른 문제가 미래에 도사리고 있다는 점을 일깨우고 있다. 자연을 착취해온 근대 문명과 이를 부추긴 이익 중심의 자본주의, 국가들 간의 치열한 경쟁은 결국 인간에게 큰 위협으로 다가왔다.
코로나 사태가 해결되면 곧바로 정상으로 회귀할 수 있다고 생각할 수도 있지만 이제 인류의 미래는 근대 문명의 근본 문제를 직시하지 않으면 어두울 수밖에 없다는 사실을 깨닫게 된 것이다.
코로나 사태가 촉발한 탈근대 30년의 위기는 세계화의 문제, 강대국 간 경쟁의 문제, 환경 문제, 민주주의 퇴조 등 많은 문제에 대한 새로운 질문과 연결된다. 동북아 국가들 역시 새로운 문제에 다른 지구인들과 마찬가지로 직면해 있다.
동북아가 근대 이행 과정에서 고통과 불행으로 점철되어 있다고 해서 탈근대 이행에서 뒤지리라는 보장은 없다.
이러한 동북아 지역의 갈등을 해결하기 위해서는 실용적인 신뢰 구축과 제도 구축 조치를 취해야 하며 중국, 한국, 일본은 갈등이 폭발하는 것을 막기 위해 협력하고 지속 가능한 해결책을 찾아야 한다.
또한 영토 문제를 해결하는 데 있어서 공동 탐사와 천연 자원의 적절한 보존이 필요하며 이러한 노력을 통해 동북아의 평화와 번영을 지속적으로 추구할 수 있을 것으로 보인다.
동북아시아의 정치지도자들이 지금까지의 문제점을 직시하고 새롭게 제기되는 문제들을 해결하는 과정에서 아집을 버리고 협력할 수 있는 시각과 행동의 계기를 발견하지 못한다면 세계적인 관점에서 모범을 창출하고 과거 얽힌 문제들도 새롭게 해결하는 실마리를 찾을 수 없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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