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사이야기-경복궁 경회루 ②] 경회루의 시간과 공간 그리고 사람

편집부 승인 2024.04.05 11:40 의견 0

시사의창 3월호를 못 본 독자를 위해 경회루를 간단하게 소개하고자 한다. 경회루지는 원래 백악산의 물이 땅속으로 스며들거나 노면으로 흘러드는 습지였다. 태조 이성계는 1395년에 이곳에 작은 정자를 짓고 정사에 지친 몸과 마음을 달래곤 하였다. 습지에 지은 작은 정자가 자주 기울자 태종 이방원(1412년)은 노비 출신 건축가 박자청에게 이곳에 연못을 넓게 파고 정자를 지어서 정비하라고 명하였다. 태종은 자신의 생각보다 과하게 정비된 경회루지만 내심 만족하여 하륜에게 작명을 맡겨 ‘경회’(왕과 신하가 덕으로 만나는 경사스러운 모임)라 이름 짓고 경회루의 현판을 양녕대군에게 쓰게 하였다. 성종 때(1474년)는 경회루의 대대적 보수가 필요하여 새로 짓는 수준의 공사를 하였는데 이때 1층 바깥쪽 사각기둥에 용과 연꽃을 새겨놓았다. 이것을 본 유구(지금의 오키나와)국 사신이 용 그림자가 연못에 비춰 하늘을 나르고 연꽃을 희롱하는 듯 조선 제일의 장관이라는 평을 남겼다.

경복궁 경회루 ©pixabay

[시사의창 2024년 4월호=민관홍(칼럼니스트, 우리문화숨결 경복궁해설사)] 임진란 때 한양의 모든 궁궐이 불에 탈 때 경회루도 소실되었고 273년간 폐허로 있다가 고종 때 대원군이 경복궁을 영건하면서 경회루도 복원되었다.
이때 정학순이 경회루를 연구한 ‘경회루 삼십육궁지도’를 바쳤는데 여기서 경회루가 철저하게 주역의 원리에 의해서 지어졌다는 것은 3월호 경회루 1편에 밝혔다.
경회루지와 경회루는 인왕산의 화기로부터 경회루 동쪽의 중요전각인 근정전 사정전 강녕전 교태전을 보호하기 위해 지어졌으며 명당수와 목조건물의 화재를 대비한 방화수의 확보라는 기능적인 면도 있었다. 목조건물은 화재에 취약하여 경복궁 남쪽 관악산의 화기를 두려워하여 숭례문의 현판을 세로로 세웠다고 한다. 화재방지를 위해 육조거리의 해태나 불과 물을 동시에 다스리는 용을 많이 조각하였고 그 밖에 불을 막는 서수(상서로운 짐승)를 조각해 놓기도 하였다.
하지만 ‘경회루 삼십육궁지도’에 따르면 경회루는 물의 원천 그 자체로 화마를 막는 가장 상징적인 건물이라 할 수 있다. 경회루는 정면 일곱칸에 측면 다섯칸으로 7X5=35, 삼십오 칸인데 정학순은 삼십육 궁이라고 하였다.
이는 삼십오 칸의 중심에 오행 북현무의 신묘한 수 1이 물의 생성수로 ‘있으면서 없고, 없으면서도 있어 삼십육 궁을 완성한다.’고 하였다.
6은 오행 북현무의 물의 완성수로 완성수 6의 6제곱에 물의 생성수 1로 이루어진 경회루는 물의 원천인 것이다.
이제 봄이 무르익는 4월이다. 고궁에 꽃도 많이 피고 많은 사람들이 고궁의 정취를 즐기러 오실 것이다. 올해도 많은 사람들이 고궁을 스쳐 지나가듯이 다녀갈 것이지만 그냥 왔다 가기만 해서는 개인사에 의미가 없을 것이다.
역사는 시간과 공간 그리고 사람이 그 시간과 공간에 남긴 말과 행동, 그 자취로 이루어지는 것이다. 우리는 루비콘강을 건너는 시저만이 역사를 만든다고 생각하지만 미시사와 개인사도 중요한 시대가 되었다.
여러분이 경복궁에 입장하여 금천의 영제교를 건널 때, 경회루지의 함홍문을 건널 때 여러분의 역사를 만드시기를 권한다.
경회루지는 남북 113미터 동서 128미터에 인공섬(신선이 사는 해동의 산 셋을 형상화) 3개를 만들고 동쪽의 제일 큰 섬에 298평의 경회루를 지은 것이다.
1층은 48개의 돌기둥을 세운 개방된 구조이고 2층은 누마루로 정면 34.4미터, 측면 28.5미터 높이 21.5미터로 현존하는 규모가 가장 큰 전통 목조건물로 근정전과 함께 국보로 지정된 건물이다.
경회루의 시간과 공간에 사람의 자취를 알아야 경회루를 더 잘 즐길 수 있으니 궁궐 내 경회루를 주로 이용한 왕과 경회루에 깃든 이야기를 풀어 보고자 한다.
태종 이방원을 왕으로 만든 일등공신은 원경왕후 민비와 그의 처남 형제들이었다.

하지만 외척이 득세하는 것이 싫었던 태종은 여러 빌미를 잡아 처남들을 모두 죽여버렸다. 당시 세도가였던 민씨 집안과 현명하고 강단이 있던 민비가 태종을 왕으로 만들어놨는데 자신의 남자 형제들을 모조리 죽였으니 부부 사이가 좋지 않은 것은 당연하였다.
하지만 원경왕후가 병에 걸려 죽을 때가 되니 무학대사가 있던 양주 회암사의 승려 100명을 불러 모아 경회루에서 왕비 건강회복 기원 법회를 열고 독경을 하였다고 하였다.
철저한 성리학자로 불교를 탄압한 태종으로서는 상당히 이례적인 일이었다. 있을 때 잘해야지 죽고 나서 애달파 하면 무슨 소용인가? 어찌 됐든 경회루의 승려 독경에도 소용이 없었고 원경왕후가 죽은 후에 태종도 같은 장소에 능을 조성하여 같이 묻혀있다. 서울 내곡동 헌릉에 있는데 합장묘는 아니고 쌍릉묘로 건설되어 있다.

경복궁 경회루 ©pixabay


경복궁에 가장 오래 있었던 세종대왕은 궐내 출입하던 어중이 떠중이들이 경회루에 드나드는 것이 못마땅하여 관계자 외 출입 금지를 하였다. 이때 나이 사십에 과거에 급제하여 종9품 교서관으로 들어온 구종직이 경회루가 아름답다고 들었는데 당시에는 높은 담으로 사방이 막혀 있어서 구경을 할 수가 없었다.
호기심을 참지 못한 구종직은 당직 날에 경회루의 담을 넘어 경회루의 아름다움을 감상하고 다니다가 누군가를 만나게 되는데 하필이면 세종대왕이었다. 구종직은 세종대왕에게 이실직고하고 죽었다고 생각하였는데 장난기가 발동한 세종대왕은 구종직에게 노래 한 자락 해보라고 하였다.
어찌 되었든 노래를 한 곡 다하자 세종대왕은 구종직에게 유교 경전 중에 외울 수 있는 것이 있냐? 고 하자 춘추를 줄줄 외웠다. 춘추 대목 중 한가지를 물어 보니 구종직은 그것도 막힘 없이 대답하였다. 다음날 중징계를 예상하고 입궐한 구종직은 종5품 홍문관 부교리에 교지를 받았다.
종9품에서 종5품까지 오르려면 10여 년이 걸리는데 구종직은 엄청난 낙하산 인사였다. 낙하산 인사에 삼사가 들고 일어났지만 유교 경전을 구종직만큼 잘 외우는 관료가 없는지라 일단락되었다.
구종직은 낙하산 인사였지만 세조 때 공조판서에 등용되었고 유교 이론가로서 세조 앞에서 밤새 강론을 하였다. 성종 때는 종1품 좌찬성까지 지냈으니 언제나 준비된 사람으로 열심히 노력을 한 사람으로 보인다. 독자분들도 벼락출세를 위해 언제든 노래 한 곡 잘 할 준비를 하시기를..
조카 단종을 폐위하고 왕위에 오른 세조는 영화 ‘관상’에 각인된 껄렁한 수양대군과는 차이가 있다. 세종대왕의 자녀들은 다들 너무나 똑똑한 것이 문제라면 문제였다. 수양대군의 형인 문종은 측우기를 만들기도 하였고 병서도 직접 지었고 세종대왕을 도와 훈민정음을 창제하는 데 큰 힘이 되었다.
세조의 동생 안평대군은 명필가로 중국에까지 그 명망이 알려져 그의 글씨와 휘호를 받아가려는 사람들이 줄을 설 정도의 당대의 스타였다. 세조도 세종을 도와 훈민정음 창제에 일조를 하였고 정음으로 석보상절을 지어 세종에게 바치기도 하였다.
세조가 단종에게 양위를 받으려고 경회루 1층에서 대기하며 성삼문에게 옥쇄를 가져오라고 하였다. 마지못해 옥쇄를 전달한 성삼문을 보고 박팽년이 연못에 몸을 던져 죽으려고 하자 성삼문은 박팽년을 만류하며 후일을 도모하자고 하였다.
경회루에 와 본 독자분들은 경회루 연못이 그렇게 깊었나? 라고 생각하실 수도 있을 것이다. 항상 푸르슴한 색으로 바닥이 안 보이니까, 하지만 경회루 연못의 평균 깊이는 2.2미터이고 제일 깊은 곳은 3미터쯤 된다고 한다. 수영을 못하는 사람이 빠지면 위험하다.
경회루를 가장 많이 이용한 왕은 누구일까? 연산군이다. 그는 지금 태어났으면 YG나 SM에 버금가는 기획사 대표가 되지 않았을까? 라는 상상을 해본다. 연산군은 채홍사라는 특별관리를 통해 전국에 이쁜 여자를 뽑아 최대 일만 명의 인원이 있었다고 한다.
하지만 이들이 임금에게 술 시중 들고 수청만 들게 한 것이 아니고 흥청이라는 전문여성 예인집단을 만들어 이들에게 노래와 춤, 악기연주 등 기예의 수준에 따라 의식주를 제공하고 녹봉까지 줬다고 하니 요즘의 아이돌 연습생과도 견줄 수 있겠다. 연산군은 경회루 서쪽의 두 섬에 만세산을 만들고
기화 요초로 장식하고 황룡주를 띄워 두 섬을 오가며 음주 가무를 하며 즐겼다고 한다. 하여간 연산군은 흥청과 신나게 놀다가 중종반정으로 망하게 되었는데 거기서 ‘흥청망청’이 유래되었다고 한다.

경복궁 경회루 ©pixabay


연산군을 쫓아내고 왕위에 오른 중종의 부인은 ‘칠일의 왕후’로 알려진 단경왕후이다. 단경왕후의 아버지는 신수근이며 쫓겨난 연산군의 처남으로 혼군의 처남인 신수근의 딸이 왕비가 될 수 없다고 하여 반정 세력들에게 칠 일 만에 왕후의 자리에서 쫓겨났다.
단경왕후와 금슬이 좋았던 중종은 경회루에 올라 인왕산을 보며 자신과 살았던 단경왕후를 그리워하였다. 중종이 자신을 그리워하며 경회루에 오른다는 소식을 들은 단경왕후도 중종이 자신을 바라보기를 원하며 인왕산의 바위(정선의 인왕제색도에 있다.)에 붉은 치마를 걸어 자신이 거기 있음을 알렸다고 한다.
그러나 중종은 무슨 이유인지는 몰라도 죽을 때까지 단경왕후를 찾지 않았다.
그 때 이후로 그 바위는 치마 바위가 되었다. 단경왕후의 애달픈 사연이 깃든 그 바위에 일제 (1939년)는 천황을 위해 징용과 학병지원을 위한 독려문을 새겨 놓았다. 글 한자에 무려 5미터 크기로 사대문 안에서 다 보이도록 조선 민족을 절망으로 빠뜨리는 글귀를 새기는 만행을 저질렀다.
1950년 그 글귀를 다 지우기는 하였으나 그 상처는 또렷하게 남아 있다. 조선의 법궁 경복궁을 서쪽에서 지키던 우백호의 산이자 민족의 명산인 인왕산의 명품 바위에 남아 있는 흉터는 천년이 지나도 아물 수 없을 것이니 그 흉터의 이유, 절대로 잊지 말아야 할 것이다.
왕은 아니지만 경복궁을 대대적으로 중건한 대원군은 예술을 알고 예술을 사랑한 인물이었다. ‘경복궁 영건일기’에 보면 경복궁 영건 기간(1865~1868) 내내 마당놀이와 산대놀이, 판소리와 지금은 전승되지 않는 각종 기예들이 경복궁을 중건하는 일꾼들에게 신명을 들려주었고 백성들에게 볼거리를 제공하였다.
그에 따라 각종 기예를 가진 사람들이 대원군 주변에 모여들었다. 대원군은 신재효의 판소리도 들어주고 명창이라면 불러들여 듣기를 좋아하였다. 대원군의 섭정 시절은 우리의 전통 민중 음악이 만개하던 시기였다.
신재효가 키우던 제자 진채선을 눈여겨보던 대원군이 경복궁 낙성식 때(1868년) 경회루에서 소리대회를 열고 그곳에서 진채선을 노래 부르게 하였다. 명당축원, 성조가, 방아타령을 부르는 진채선에 대원군은 자꾸 눈이 끌렸다.
영화 ‘도리화가’에서 수지가 열연하였던 그 장면이 떠오른다. 신재효의 제자이자 연인일 수 있는 진채선을 대원군에게 빼앗길 수밖에 없는 신재효의 심정을 아는 이 있었을까?
경회루 북쪽 담에 두 다리를 단정하게 담그고 있는 조그마한 정자가 있다. 연꽃의 향기가 있는 정자라는 뜻의 하향정이다. 이 정자는 이승만 대통령과 프란체스카 여사가 휴식을 취하기 위해 만든 정자이며 당대의 대목수 배희한이 건축하였다.(1959년 추정)
원래 경회루에 없던 것을 건축하였다고 철거하자는 주장도 많았으나 당대의 대목수가 잘 지었고 나름대로 조촐하게 잘 어울린다는 견해가 있어 아직은 그냥 있는 정자이다. 1997년 11월 8일 경회루에 쌓인 흙을 걷어내던 중에 하향정 동쪽 옆 축대 아래에서 구리합금으로 된 용이 나왔다.
‘경회루 전도’에 대원군이 화기를 막기 위해 경회루 북쪽에 구리용 두 마리를 넣었다고 하였는데 그것이 발견된 것이었다.
하지만 한 마리는 승천하였는지? 어디로 갔는지? 아직도 오리무중이다.
당시 발견된 용은 머리와 몸이 분리되어 발견되었으나 지금은 수리하여 경복궁 남서쪽 담장에 있는 국립고궁박물관에 전시되어 있다.
원래의 경회루는 사면이 높은 담장으로 되어 있고 동쪽 담장의 남쪽에 왕이 출입하는 이견문과 중앙의 함홍문, 북쪽의 자시문이 있다. 남쪽 담장에는 경회문이 있었으며 서쪽 담장에는 천일문이 있었고, 북쪽 담장에는 필관문이 있다.

경복궁 경회루 ©연합뉴스


경회루는 1997년 해체 복원, 준설을 하였는데 지금까지 남쪽 담과 서쪽 담은 복원을 하지 않고 있는데 ‘관람객의 관람 편의를 위함이다.’라고 말한다. 하여튼 독자분들은 서쪽과 남쪽 담이 없으니 구종직처럼 월담을 하는 수고는 안 하셔도 된다.
하지만 섬 안으로 들어와 기둥들의 희끗 희끗한 부분들이 6.25의 총탄 자국이었고 자시문 다리의 코끼리 코도 총탄에 날아간 것을 보셔야 전쟁은 재앙이라는 것을 실감하실 것이다.
경회루를 가까이 살피고 만져 보고 2층 누에 올라 기둥 사이 낙양각(아름다운 액자 틀 같은 장식)을 통해 동서남북의 멋진 풍경을 왕의 시선으로 감상하셔야 경회루를 제대로 감상하였다고 말할 수 있을 것이다.

※ 경회루 관람을 제대로 하려면 4월부터 10월까지 있는 경회루 특별관람 예약 필수
•경회루 특별관람은 선착순 35명 인터넷 예약(www.royalpalace.go.kr)
•4월 1일 ~ 10월 30일 1일 4회(10시, 11시, 14시, 16시) 40분 한국어 해설사 인솔 관람.
•매주 화요일 휴궁, 만 7세 이상부터 관람 가능, 경회루 함홍문(가운데 문) 5분 전 도착.
•절대로 노쇼 사절, 불참 시 다른 분들을 위해 반드시 예약취소.

창미디어그룹 시사의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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