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백성을 속이는 자는 강을 건너는 배마저 잃는다.” 『삼국지』에서 조조가 경계한 이 구절은 오늘 정읍시청 앞에서도 유효하다. 공직선거법 위반 혐의로 대법원에서 파기환송 끝에 무죄판결을 받아 가까스로 직을 지킨 이학수 정읍시장이 휴가 중 관용차로 골프장을 오간 사실이 드러났다. 그는 “공식 일정 뒤 이동시간이 촉박해 불가피했다”고 해명했지만, 수행원과 운전기사까지 대동한 채 시 재산을 사적으로 이용한 점은 부인하지 못했다.
문제의 본질은 ‘차 한 대’가 아니다. 선출 권력이 시민에게 약속한 책임성과 모범이 얼마나 가벼웠는지를 보여주는 상징적 사건이다. 시장 당선 후 2년 넘는 시간 동안 공직선거법 위반 재판에 집중하며 시정을 뒷전으로 밀어두었다는 비판, 그 사이 공무원 조직에 깊숙이 퍼진 ‘모르쇠·눈치 보기’ 문화, 그리고 이번 관용차 논란까지 작은 균열이 켜켜이 쌓여 시정 전반의 신뢰를 잠식했다.
한국행정연구원 연구에 따르면 2024년 우리 국민의 중앙정부 신뢰도는 37.2%로 OECD 평균에도 미치지 못한다. 지방정부는 공식 통계조차 희소해 실태 파악이 더 어렵다. 신뢰 기반이 취약한 상황에서 리더의 일거수일투족은 단순 행정 행위가 아닌 ‘공적 상징’으로 읽힌다. 특히 정읍처럼 재정 자립도가 낮고 국책·도비 사업 의존도가 높은 중소도시는 시장의 도덕성이 행·재정 협상력에 직결된다는 점에서 심각한 사안으로 떠오르고 있다.
역사를 돌아보면 신뢰의 저울은 언제나 냉정했다. 조선 태종이 세자에게 남긴 “허물을 두려워해야 백성이 따를 것”이라는 훈계, 프랭클린 루스벨트가 뉴딜을 추진하며 강조한 “투명성 없는 복지는 모래 위 궁전”이라는 경고는 정치인들이 가슴에 새기고 살아야 할 것이다. 작은 일탈을 방치한 조직은 결국 대형 사고 앞에서 무력해진다는 것이 지난 세기의 교훈이다.
다가오는 2026년 지방선거에서 정읍 유권자는 세 가지 질문을 던질 필요가 있다. 첫째, ‘법적 무죄’가 ‘도덕적 면죄부’가 될 수 있는가. 둘째, 리더가 법정과 골프장을 오가며 보낸 수개월의 공백을 누가 메웠는가. 셋째, 관용차 한 대를 사적으로 굴릴 때 조직 전체가 보내는 침묵은 무엇을 뜻하는가.
시민에게 권한은 투표일 하루뿐이지만, 그 하루가 만들어 낸 권력은 4년 내내 예산과 도시 브랜드를 좌우한다. 이 시장의 관용차 논란은 정읍시를 조용히 흔들고 지나갈 수 있을지 모르지만, 잃어버린 신뢰를 회복하는 데는 두 배의 시간과 세 배의 비용이 든다. 파기환송 무죄라는 법적 구제 후 발생한 도덕성 논란은 “한 번 실수는 병가지상사”라는 관용을 기대하기 어렵게 만든다.
동양 고전 『대학』에는 “修身齊家治國平天下”라 했다. 몸가짐이 바로 서야 집과 나라가 편안하다는 뜻이다. 지방정부 역시 다르지 않다. 리더가 먼저 공적·사적 경계를 분명히 하지 못하면, 공무원 조직은 행정 책임을 남에게 미루고 시민은 시정에 등을 돌린다. 지방정부를 기업에 비유한다면 시장은 최고경영자(CEO)이고, 시민은 주주다. 주주에게 신뢰를 잃은 CEO가 남긴 기업의 말로가 어떠했는지 우리는 숱한 사례로 학습했다.
한편 야권과 시민단체는 “법적 처벌 여부와 무관하게 윤리기준 위반은 명백하다”며 비난 수위를 조절하고 있다. 여당 일각에서도 “선거를 앞두고 악재”라며 난감한 기색을 숨기지 못한다. 이 시장은 직권남용·업무상 횡령 여부 조사까지 번질 수 있는 이번 논란을 어떻게 잠재울 수 있을 지 또다른 숙제를 안게 됐다.
정치학자 새뮤얼 헌팅턴은 “제도가 아니라 신뢰가 문명을 지탱한다”고 말했다. 관용차에서 내려와 시민 눈높이에 선 리더, ‘일상의 청렴’부터 지키는 시정을 바라는 목소리가 거세다. 공직선거법 위반 재판과 관용차 논란, 그리고 돌아올 선거, 세 번의 시험대 앞에서 이학수 시장은 어떤 답안을 제출할 것인가.
마지막 선택은 결국 유권자의 몫이다. “一失足成千古恨(한 번 잘못 디디면 천년의 한이 된다)”이라는 경고처럼, 내년 지방선거는 정치적 실책을 넘어 정읍시의 미래를 결정할 분수령이 될 것이다. 신뢰를 잃은 권력은 바람 앞의 등불에 불과하다는 사실을 시민은 이미 알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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