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두섭의 여행스케치] 은밀한 미술 언어

나에게로 들어가는 시간들의 흔적

편집부 승인 2024.04.05 14:47 의견 0

따듯한 볕이 창문에 기대어 시린 마음까지 보듬어주는 날들이 많아졌다. 밖을 나가 본다. 휘적거리며 걷는 길이다. 주위를 둘러보며 길을 걷는다. 어느 짙은 색의 붉은 벽돌집 마당에서 자라고 있는 목련나무에 어린 아이가 주먹을 쥔 듯한 하얀 목련 꽃송이가 많이도 달려 있구나. 또 길을 걷는다. 버드나무가지마다 연노랑의 싹들이 혀를 내밀고 있다. 봄이 온 것이다. 지난 겨울의 추위가 주었던 움츠림의 기억이 사라진다.

<그(녀)와의 하루> 이두섭

[시사의창 2024년 4월호=이두섭 작가] 늦겨울 내내 다가오는 개인전에 신경을 많이 쓰다 보니 아무래도 마음이 많이 닫혀 있었나보다. 재빨리 간파하지 못한 이번 봄을 느껴본다. 살짝 억울한 느낌이 든다. 슬그머니 내 곁에 와 인기척을 내는 봄에 화들짝 놀라면서 반가운 마음을 봄에게 꺼내 보였다.

내가 자주 걷는 작은 오솔길이 있다. 서울 둘레길과 연결되어 있고 조금 샛길로 들어서면 동네 주민을 위한 체육시설이 있고 그 근처에 벤치가 놓여 있는데 약간 외진 곳이다. 그렇다 보니 사람들이 가끔씩 보이기만 할 뿐 인적이 드물어서 호젓함을 느끼며 앉아 있을 수 있는 길이다. 작은 들꽃이나 잡초를 바라보며 이런 저런 생각을 하다보면 시간은 순식간에 사라진다.

개인전을 위해 요즈음 많은 시간 화실에서 시간을 보냈다. 그림을 그린다는 것이 대상을 잘 재현할 수 있는 능력만이 아니라는 것을 손바닥에 적어 놓았다. 주먹을 꽉 쥐고 그림을 그린다. 그림은 그림의 안쪽으로 들어가야 한다고 생각한다 . 그림 밖으로 나가 반짝거리는 것도 아름다운 작품이지만 안으로 들어서는 것이 타당하다고 생각한다. 어린 시절 스스로 그림에 말려있던 적이 있었다. 그 감정은 아주 오랫동안 주변을 맴돌았다. 색을 제한하여 새벽을 연상케 하거나 안개가 포진해 있는 강가는 언제나 저장해 두었던 이미지의 창고 속에 귀한 보석으로 자리매김하던 시기였다.

<그(녀)와의 이틀> 이두섭


여러 이유로 그것만 마음에 두고 있었다. 미술은 아름다운 기술이라고 좁게 생각한 것도 문제였다. 아름다운 기술이라는 것은 한없이 포괄적인 의미가 있다는 것을 모르고 제한적으로 미술을 생각하고 있었던 것이다. 내가 느끼고 감각하는 화업의 세상은 자꾸 새로운 세계가 되어가고 있었다. 변화. 그것은 어떻게 이루어졌을까를 생각해보니 결국 코로나19의 시간 동안 뜻하지 않은 방향의 전개가 계기였다.

모두가 악몽처럼 기억하고 있을 것이다. 잠깐 사이에 벌어진 일인 것 같지만 코로나19라는 질병이 창궐하기 시작한 2020년부터 5년의 시간은 결코 짧은 시간이 아니었다. 그 사이에 많은 생각을 하게 되었다. 코로나에 겁을 먹은 많은 사람들과 정부의 정책은 상황을 얼어붙게 했고 나도 예외없이 많은 야심찬 세계 순회 개인전들을 취소해야 했다. 목표를 잠깐 잃은 것이겠지만 무심한 세월은 흐르고 있었고 바깥에서의 모든 일들이 한 가지 지점으로 화제를 만들어내고 있을 때 나는 편한 마음으로 그림만 그리는 일이 어렵게만 느껴졌다.

그런 혼란의 시기에 내가 내린 결정은 이러하다. 그림을 그리지 말자는 생각. 그렇게 해서 그동안 쌓아왔던 모든 작업의 행위를 멈추고 아무 것도 하지 않으면 나의 모습은 어떻게 객관화될 수 있을까에 대한 문제였다. 사실 나에게 그림 그리는 시간은 부모님의 반대에도 고집을 꺾지 않을 만큼 매우 소중했고 그런 시간을 위해 하루도 그림을 멈춘 적이 없었다. 중학교 때부터 이어져 온 이길. 의도적으로 6개월 동안 붓을 들지 않았다. 흐르는 구름을 바라보거나 늦은 시간 화실 창가에 앉아 폐허의 도시 같은 야심한 시간의 찻길을 망연히 바라보았다.
존재라는 것은 어떤 일들을 계기로 바꾸어 나가면서 객관화되기는 하지만 존재는 인식의 객관화, 그 바깥에 있다는 사실이 크게 다가왔다. 오류나 우연의 상황을 그대로 드러내거나 자신이 모르는 세계의 사고는 중요한 사실이라고 믿게 되었다.

<그(녀)와의 삼일> 이두섭


시간의 넓이보다 중요한 것은 시간의 깊이였다. 생활이 단순해지면서 시간은 속절없이 사라졌다고 해야 할까. 세상은 실로 과거에 비해 조용했다. 조용하다보니 깊이를 느끼기 시작했다. 그러면서 덧없음. 빼야 할 것. 욕심을 버려야 할 것 등이 정리되었다. 누구나의 마음 속에 들어있는 미친 나를 꺼내어 치유하고 평화스러움을 표현하는 것에 집중하는 것이 새로운 목표가 되었다.

새처럼 감각하고 싶었다. 우주에서 먼지로 있어도 또 다른 나를 보는 것이 중요하다는 것에 마지막의 희망으로 설정했다. 색과 색의 결에서 부유하는 작은 물고기. 그게 나라면 좋겠다고 생각했다. 세상의 모든 갈등의 끝은 긍정으로 귀결된다고 생각한다. 이런 나의 모습을 스스로 긍정하기 시작한 걸까. 나 스스로 의문이 생기는 지점에서 작업의 출발점을 찾게 되었다. 상상과 확장 그것을 출발점으로 삼아 현상을 드러내어 완벽한 작품의 괄호 밖 세계를 미술 언어로 환기시키려 작정해본다.

내 앞에서 많은 시간들이 흘러갔고 악연의 시간과 그렇지 않은 시간들이 희석되어져 가고 있다. 별거 아니었어. 모든 일들은 별거 아닌 거야. 내 앞에서 벌어졌던 많은 일들이 나를 만들었겠지만 마음이 따듯한 노래를 부르며 작업을 하기로 했다. 화가와 작가의 기준점을 알게 되면서부터 깊은 바다 속에서 멍들어 있던 나는 뭍으로 오르려 마음의 준비를 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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