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불교칼럼] 인(因)과 법칙(法則)에 어긋나는 삼세(三世)의 업보설(業報說)은 어떤 것인가?

편집부 승인 2024.04.05 14:11 의견 0

[시사의창 2024년 4월호=김동식 칼럼니스트] 업(業)이라는 말은 가르마(krama). 갈마(kamma)라 한다. 불교의 윤리 사상은 업설(業說)을 구체적 행동을 실천하는 계율(戒律) 사상(思想)에 잘 나타나 있다.
부처님께서 인간의 대상을 법(法)이라 규정하셨는데 법이라는 말은 법률(法律)이라는 개념으로 흔히 쓰이지만 인도에서는 자연법칙(自然法則), 필연적(必然的)인 것, 의지(意志), 자연물(自然物) 등의 뜻으로 쓰이고 있다.
인간에게는 분명히 자유의지(自由意志)가 있어 여기에 작용을 가하면 필연적인 반응을 보이는 성질이 나타나 업을 일으키지만, 자연물(自然物)은 의지(意志)가 없어 업(業)의 작용을 받으면 단지 필연적(必然的)으로 반응을 보일 따름이다. 인간의 의지적 작용을 불교에서는 업(業)이라 하고, 이러한 업(業)에 대해서 그 대상이 나타내는 필연적(必然的)인 반응을 보(報)라고 한다. 업(業)은 원인(原因)이고 보는 결과(結果)이므로 업인(業因)은 과보(果報)로 표현한다.

업(業)에는 반드시 보(報)가 따를 것이고, 그들의 성질(性質)은 상응(相應)할 것이다. 따라서 이 업보(業報) 사이에는 직접적인 인(因)과 관계가 있으므로 그들의 성질 또한 동일성을 띄게 된다. 즉 업(業)이 선(善)이면 보도선(寶刀善)이고, 업이(業) 악(惡)이면 보도악(寶刀惡)인 것이다. 이른바 자업자득(自業自得)의 인(因)과 률(律)인 데, 업설(業說)에 의하면 업(業)을 사업(思業)과 사이업(思已業) 두가지로 나누어 보고 있다.
1)사업(思業): 사업(思業)은 뜻으로 활동하는 정신 내부의 의업(意業)을 말한다.
2)사이업(思已業): 사이업(思已業)은 의업(意業)이 말과 몸으로써 표현(表現)되었을 때를 말한다. 따라서 자기의 행동(行動) 행위(行爲)에 대해서 책임(責任)을 져야 한다.

삼세업보설(三世業報說)은 업(業)과 보(報)의 필연적 관계는 우리 현실계의 엄연한 법칙인 것으로 이러한 업보의 인(因)과 율(律)이 전제되지 않으면 자연과학은 성립 근거를 잃을 것이다. 따라서 업과 보의 필연적 관계 속에서는 착한 사람은 잘 살고, 죄(罪) 지은 사람은 벌을 받아야 한다. 그런데 이따금 이해할 수 없는 현상이 발견된다. 모든 현상은 반드시 업(業), 보(報)의 법칙으로 설명되어야 할텐데 도저히 설명이 되지 않는 현상이 보인다. 즉 어떤 사람은 악업(惡業)을 지었는데도 잘 살고 있으며, 어떤 사람은 착하고 착한데도 왜 그렇게 고생만 하고 있는지. 이런 현상을 우리는 어떻게 생각해야 할 것인가? 이러한 인과의 법칙에 어긋나는 모순(矛盾)을 해결(解決)하기 위해서 나온 이론(理論)이 삼세업보설(三世業報說)이다. 이것은 숙세(宿世:전생의 세상). 현세(現世:지금의 세상). 내세(來世:미래의 세상)의 3세에 걸쳐 전개되는 것이라고 설명할 수 있다.

첫째: 어떤 과보(果報)가 있는데 그 업(業)이라고 할 만한 것이 인식되지 않았을 경우 그 업인(業人)을 현세 이전인 내세(來世)에 있었던 것으로 가정 할 수밖에 없다.
둘째: 업인(業人)은 있는데 그 과보(果報)라고 할 만한 현상이 나타나지 않는 경우 그 과보를 현세(現世) 이후인 숙세(宿世)에 있을 것으로 가정(假定) 할 수밖에 없을 것이다.
따라서 부처님은 다음과 같이 설(說)하고 계신다.
『만일(萬一) 고의(故意)로 업(業)을 지음이 있으면 반드시 그 보(報)를 받나니, 현세(現世)에 받을 때도 있고, 내세(來世)에도 받을 때가 있다.』 《중아함 권3 사경》
불교(佛敎)의 육도윤회설(六道輪說: ①지옥도(地獄道) ②아귀도(餓鬼道) ③축생도(畜生道) ④아수라도(阿修羅道) ⑤인도(人道) ⑥천도(天道))은 바로 여기에서 나온 것이다.
과거(過去)의 인연(因緣)을 알고자 원(願)하거든, 현재(現在)의 과보(果報)를 보라. 미래(未來)의 과보(果報)를 알고자 원하거든 현재의 인과(因果)를 보라고 하셨다. 과거(過去)를 짊어지고 미래(未來)를 안고 있는 현재(現在)이다. 그러므로 영원의 과거를 짊어진 오늘은 동시에 영겁(永劫)의 미래를 안고 있는 오늘이다.
우리들은 살아가면서 어떤 상황에 직면하게 되면 이런 일이 왜 하필 나에게서 일어나는가 다른 사람에게나 일어날 일들이 왜 나(我)에게서 일어나느냐 도저히 자기에게서 일어날 수 없는 일이 일어났다는 억울함(抑鬱咸)과 원망심(怨望心)이 마음의 밑바닥에 깔려 있는 것이다.

가만히 생각해보니 신(神)이 저주했다는 생각하는 마음, 우연히 저절로 일어났다고 생각하는 마음, 그것도 아니라면 전생(前生)에 내가 무슨 죄를 지어서 이렇게 당해야만 한단 말인가 아이고 하고 장탄식(長歎息)을 하는 마음, 이런 마음이 드는 것은 나에게 일어난 일을 받아들일 수 없다는 억울함과 분함으로 인한 화가 가득 차 있기 때문이다.
신이 저주했든, 우연의 일치든, 전생의 죄든 이것들은 현재의 나와 아무런 상관이 없다고 생각하는 잘못된 마음이기 때문이다. 우리는 어떤 일이 일어났을 때 이 일이 무엇인가, 나와 상관이 있으며 그것이 일어난 원인은 무엇일까?를 진지하게 성찰해 봐야 한다. 이 세상의 어떤 일이든지 지은 바가 있기 때문에 결과가 있는 것이지 신이나 인연이나 우연히 일어난 일은 결코 없으므로 원인은 잘 모르지만 그 일이 나와 관련이 되어 있음을 인정하고 자신의 일로 수용하는 마음가짐이 중요하다. 우리가 원래 인연과를 믿는다는 것은 어떤 원인이 있기 때문에 결과가 있다는 관점을 말한다. 그런데 대개의 우리는 머리로만 인연과를 이해할 뿐 실제로는 인연과(因緣果)에 대한 믿음이 약하기 때문에, 내가 지은 것이 아니기 때문에 억울함과 의심하는 마음이 작용하는 것이다. 평소에 말을 잘 듣고 공부도 열심히 하던 아이가 고학년(高學年)이 되면서 어느 날부터인가 갑자기 평상시 하지 않던 행동과 불만(不滿)과 반항(反抗) 등 학교생활이 엉망으로 변하여 사고 치기가 일쑤다.

저 아이가 갑자기 왜 저럴까 별의별 생각이 다 일어나 자기의 상상(想像)한 원인 때문에 온갖 원망심(怨望心)이 뜬구름처럼 일어났다 살아졌다 하니 마음 고생에 화병(火病)이 겹치고 자기자신(自己自身)을 들볶는다. 아이도 자기 스스로도 왜 그러는지 모르겠다고 호소(呼訴)한다. 이 무슨 조화(造化) 속이란 말인가?
원인은 무엇일까? 원인이 어디에 있을까? 이성적 판단으로는 이해가 잘 되지 않는 뜻밖의 행동이란 사실은 아이가 갖고 있는 근본(根本) 업(業) 즉 성정(性情)의 밑뿌리로부터 일어나는 것이다. 그런데 이러한 성정(性情)은 아이가 아주 어렸을 때 혹은 아이일 때 형성되는 것이다.

시집살이할 때 시어머니나 남편 그 외 모든 사람들을 괴롭히고 원망하고 반항하고 나 스스로를 통제 못했던 씨앗이 바로 아이에게 뿌려진 결과인 것이다. 그것은 지금 아이가 하고 있는 모든 것들이 나의 지나간 과거와 유사(遺嗣)한 심리(心理) 현상을 나타내기 때문이다. 지금 저 아이의 모습은 바로 나 때문이었구나 하고 깨달아 스스로 지은 인연에 따라 다가온 과보임을 알게 되면 아이가 불쌍해지고 또 아이의 입장을 충분히 이해하게 되면 아이는 점차 달라지게 된다. 그러므로 부모(父母)와 자식간(子息間)의 인연은 참으로 지중(持重)한 인연이지만 전생에 빚진 인연이니 서로 갚아주어야만 할 것이며, 고부간(姑婦間)의 인연은 전생의 씨앗 인연이니 서로 화합해야 할 것이다. 그리고 형제간(兄弟間)의 인연(因緣)은 전생(前生) 경쟁(競爭)의 인연(因緣)이니 서로 양보(讓步)해야 할 것은 하면서 살아야 할 것이다. 또한 마음(心)을 탁마(琢磨)하여 방하착(放下著)을 할 수만 있다면 그 이상 바랄 것이 또 무엇이겠는가.


창미디어그룹 시사의창

저작권자 ⓒ 시사의창, 무단 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