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책] 엄마의 마른 등을 만질 때

삶과 죽음의 경계에서 엄마 그리고 나

편집부 승인 2024.04.03 15:49 의견 0

나는 엄마의 마른 허벅지와 마른 발과 거기 켜켜이 얹힌 주름을 천천히 쓸어내렸다. 손을 따라 올라가면 작은 복숭아 씨앗 같은 팔꿈치가 드러나고, 겨드랑이 아래로 길게 베인 칼자국과 깊은 주름이 같이 흘렀다. 뼈 모양을 훤히 드러낸 주름이 한 사람을 채 덮을 수 없는 홑이불 같았다. 엄하고 단단하던 사람은 어떻게 이 작고 무른 노인이 되었는가.

-본문 중에서-

양정훈 지음 ㅣ 수오서재 펴냄


[시사의창=편집부] 양정훈 작가는 엄마의 암 투병이 시작된 후에야 그의 삶이 보였음을 고백한다. 병원 진료와 수술, 항암을 옆에서 돌보기 위해 20년 만에 엄마와 함께 살게 되며 그동안 보지 못했던 이야기들을 발견한다. 시골집을 탈출해 서울로 식모살이 가는 게 꿈이었던 소녀, 하루 스무 시간 쉬지 않고 풍선을 불던 여공, 장롱 하나를 마련하지 못해 눈칫밥을 먹던 새댁, 정작 자신의 보험금은 아까워 쓰지 못했던 보험회사 직원. 새로 알게 된 엄마가 선명히 보였다. 딸이자 여자이며, 아내이자 어머니이고, 무엇보다 당신 자신으로 살았던 삶을 대신 기록하고자 했다.

저자는 3년에 가까운 엄마의 투병 기간을 책에 담으며 한 가지 깨달은 것이 있다. “엄마는 한 번도 늦은 적이 없었다. 나는 언제나 엄마를 늦게 늦게 발견하고 말았다.” 엄마가 챙겨준 반찬, 엄마의 잔소리, 엄마의 걱정을 너무 늦게 알아차렸음을, 가장 사랑하는 사람을 가장 늦게 발견했음을 뒤늦게야 깨닫는다. 그동안 얼마나 많은 순간 엄마의 말과 표정, 그리고 마음을 모른 척하고 지내왔는지를. 아들은 늙고 야윈 엄마를 보며 생각한다. 더는 늦지 않고 싶다고. 그 간절한 다짐이 책 곳곳에 녹아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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