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용일 기자의 사진산책-경남 거창에서 보름살기] 거창에서의 시간은 언제나 내 편 내게 주어진, 온전한 나만의 시간

먹고, 보고, 즐기는 거창에서의 보름살기, 혼자여도 지루할 틈이 없다

편집부 승인 2024.03.06 15:45 의견 0

이른 아침 일어나 부랴부랴 씻고 밖을 나선다. 오전부터 하루 일과를 시작한다. 저녁까지 하루 일정은 연예인 뺨칠 정도로 머릿속에 하루 일과가 빼곡하게 들어차 있다. 그렇게 하루를 바삐 보내고 숙소로 돌아오면 여행의 여유 있는 밤을 보내기에는 온몸에 피곤기가 가득하다. 그래도 다음 날 유명 맛집에서의 만찬을 즐기기 위한 오픈런을 생각한다면 일찍 잠자리에 들어야만 할 것 같은 다소 억울한(?) 기분마저 든다. 대체적으로 짧게는 1박 2일에서 길게는 2박 3일 정도의 기간으로 여행을 다니는 사람들의 흔하디흔한 여행의 모습이다. 주어진 기간 내에 보고 싶은 것 보고, 먹고 싶은 것을 먹으려면 매우 부지런해야만 한다. 그렇지 않을 경우 맛집 앞에서 줄 서서 먹는 데에만 하루의 반나절을 반납해야 하기 때문이다. 이렇게 정신없이 보내는 여행은 소수의 모습이 아닌 대부분의 직장인들이 겪는 풍경이기도 하다. 여행의 정의는 저마다의 취향과 성향에 따라 다를 수 있겠지만 시간에 쫓기는 여행을 좋아하는 사람은 그 누구도 없을 것이다. 충분하게 주어진 시간 내에서 여유를 만끽하며 여행을 즐기고자 할 것이며, 그러한 마음은 누구나 같은 마음일 것이다. 그래서 그 여유를 한 번 만끽해 보고자 필자가 경남 거창군으로의 보름살기를 떠나 보았다. 그리고 그 낯선 곳에서 보름 동안의 자유시간은 누군가의 버킷리스트 목록에 포함될 가치가 충분함을 알 수 있었다.

합천 영상테마파크에서 해인사 방형으로 오르다보면 바로 좌측, 마치 한폭의 그림과도 같았다.


[시사의창 2024년 3월호=정용일 기자] 지난 거창에서의 보름살기 1편에 이어 그 두 번째 이야기를 바로 시작한다. 오전 7시에 일어나 씻고 집을 나서면 어느새 지하철역에 도착한다. 발 디딜 틈 하나 없어 보이는 공간을 비집고 파고들어야만 하는 아침 지하철, 아니 지옥철의 출근 과정을 통과해야지만 회사에 도착할 수 있다. 퇴근이라고 해서 그 지옥 같은 과정이 다를 바 없다. 매일같이 그러한 출퇴근 풍경은 무한 반복된다.
아마도 필자뿐만이 아닌 대다수의 직장인들이 그러할 것이다. 대부분의 직장인들이 출퇴근 시간에 같은 고통을 겪고 있으니 그나마 ‘나 혼자’가 아닌 ‘우리’라는 공동체적인 생각에 스스로를 위로하곤 한다.
먼 길 운전해서 도착한 경남 거창에서의 일상은 평상시의 그것들과는 확연히 다르다. 이것은 마치 기적과도 같은 일상이다. 매일 밤 10시에 강제 취침을 해야 할 이유도 없을 뿐더러 매일 아침 7시에 강제적으로 눈을 떠야 할 아무런 이유도 없다. 굳이 스스로 일찍 자고 일찍 일어나야 할 일정을 만들기 전까지는 말이다. 말 그대로 완벽한 자유인 것이다.
하지만 이 완벽한 자유에 아무 생각 없이 몸을 맡겼다가는 예상치 못한 부작용이 뒤따를 수 있다는 것을 필자는 전혀 예상치 못했다. 어느 날 새벽까지 글을 쓰고, 음악을 듣고 영화를 보다 잠이 들어서였는지 아침에 눈을 떠보니 오후 12시였다. 대략 새벽 2시쯤 잠이 들었으니 10시간을 내리 잔 것이다.
분명 눈은 떴는데 마치 위에서 무언가가 필자의 몸을 짓누르는 것같이 몸이 일으켜지지 않았다. 그렇게 가까스로 몸을 일으켰지만 상당한 두통에 컨디션은 엉망진창이었다. 한참을 멍하니 침대 위에 앉아 있다 거실로 걸어 나오는데 머리가 핑 돌았다. 그런 기분 나쁜 느낌을 받은 적이 언제 있었는지 기억도 나지 않을 정도로 몸 상태가 말이 아니었다.
평소 출근을 하지 않는 주말에도 아무리 늦잠을 잔다 한들 오전 9시 30을 넘겨본 적이 없었던 터라 갑작스러운 변화에 몸이 적응을 하지 못하는 것 외에는 달리 설명할 방법이 없는 상황이었다. 그렇게 30분 정도가 지나서야 서서히 몸 상태가 정상으로 돌아오는 느낌을 받았다. 이건 아니다 싶어 부랴부랴 옷을 챙겨 입고 밖으로 나가 30분 정도를 걸었다. 그제야 몸이 온전히 평소의 컨디션으로 돌아왔다.
좀 우스꽝스러운 상황이지만 평소의 루틴과는 다르게 너무 많이 자서 그런 증상이 발생한 것 같았다, 사람이 수면을 취할 때 가장 적절한 수면 시간은 7시간 정도라는 글을 어디선가 본 기억이 난다. 그 일을 계기로 보름살이 동안 아무리 늦어도 취침시간은 밤 12시를 넘기지 않았으며, 기상 시간은 아무리 늦어도 9시를 넘기지 않았다. 그리고 그 이후로 두 번 다시는 그러한 증상은 나타나지 않았다.

우두산 Y자 출렁다리의 모습


주어진 자유지만 규칙적인 루틴도 중요
거창에 내려오기 전 가장 설레는 부분은 바로 실컷 놀다 새벽에 잠들고 해가 중천에 뜰 때까지 늘어지게 늦잠을 자는 것이었다. 그러한 생활을 보름 동안 맘껏 누려보는 것이었다. 이런 일종의 놈팡이와 같은 생활은 전 세계의 모든 직장인들이 꿈꿔보는 것이라 생각하지만, 정작 현실에 닥치면 그렇게 마냥 좋지만은 않다는 걸 새삼 깨달았다. 어느 누구도 필자에게 취침시간과 기상시간에 대해 강요한 적 없지만, 그 사건 이후 거창에서의 루틴은 나름 모범적이었다고 자평한다.
정상적인 생활 패턴으로 돌아온 이후 하루 일과의 전체적인 루틴이 만들어졌다. 오전 9시쯤 아침식사를 한 이후 동네를 한 바퀴 걷는 오전 산책의 시간을 갖는다. 그리고 숙소로 돌아와 조용히 음악을 듣는다. 이 시간이 참으로 좋다. 가장 자유스러움을 느끼는 시간대인 것 같다. 남들은 출근해 일하느라 한창 바쁠 시간대인 오전 11시쯤 홀로 한가로이 음악 감상에 빠진다는 것은 참으로 낭만적인 행위다.
그리고 오후 12시에서 5시 사이에 그날 가고 싶은 곳을 방문한다. 점심식사는 상황에 따라서 밖에서 간단하게 때운다. 대략 6시에서 7시쯤 숙소로 돌아오는 길에 주변 도넛 매장에서 각종 도넛을 포장한 후 프랜차이즈 커피 매장에서 큰 사이즈의 아이스아메리카노를 한 잔 사가지고 온다. 하루 일과 중 단 하루도 빠지지 않고 실행한 중요 루틴의 한 과정이다.
숙소 도착 후 끓여놓은 참치김치찌개와 햇반으로 저녁 식사를 한 후 야식으로 사 온 도넛과 아이스아메리카노를 마신다. 이러한 것들이 하루의 반복되는 과정들이다. 딱히 특별한 것은 없지만 먹는 족족 다 맛있고, 눈에 보이는 풍경들이 다 재미있고, 심지어 혼자임에도 그냥 멍하니 숨 쉬는 것조차 재미있다. 아무튼, 이러한 일상들이 하루하루 반복되다 보니 매일 반드시 해야 하는 과정들로 자연스레 정착이 된 것 같다.

예전에는 지역민들이 이 하천에서 낚식대나 어망을 이용을 고기를 많이 잡았다고 한다. 지금은 그런 모습을 찾아보기 힘들었다.


Y자형 출렁다리와 항노화 힐링랜드에서 ‘힐링 완충’
그럼 이제 필자의 시시콜콜한 일상의 이야기를 벗어나 다시 여행다운 이야기로 돌아가 보자.
다시 지난 거창군 취재 이야기를 거론해야 할 것 같다. 지난 취재 때 구인모 거창군수께서 당시 우두산 Y자 출렁다리에 대한 얘기를 한 적이 있다. 당시는 완공을 앞둔 시점이었기에 아쉽게도 직접 가서 경험해 볼 수는 없었다. 그래서 창포원과 함께 출렁다리 역시 꼭 한번 가보고 싶다는 생각에 역시 이번 기회를 통해 방문해 보았다.
거창 읍내에서 대략 30여 분 정도 거리에 위치한 감악산 출렁다리는 국내 최초의 Y자형 출렁다리로서 개통 후 창포원과 함께 이미 많은 사람들이 다녀간 거창군의 대표적인 명소로 자리 잡았다. 이곳이 좋은 또 하나의 이유는 해발 1,046m의 우두산 자락에 있는 힐링과 치유의 공간으로도 유명한 ‘항노화 힐링랜드’가 인접해 있어 출렁다리와 함께 연계해서 산책하기 매우 좋은 환경을 갖추고 있다.
이곳의 피톤치드 가득한 숲길 등 풍부한 산림환경을 활용해 산책과 체험이 가능하며, 바로 인접해 있는 국내 최초의 교각 없는 Y자형 출렁다리와 함께 누구든지 안전하게 걸을 수 있는 무장애 데크 로드가 설치되어 있어, 걷기만 해도 온갖 스트레스가 풀린다.

거창의 중심을 가로지르는 이 하천의 폭은 꾀나 길고 넓으며, 가을이면 강변 산책로를 따라 노랗게 물든 은행나무잎이 장관을 이룬다.


또한 이 두 곳이 위치한 우두산의 경우 산을 좋아하는 사람들이 많이 찾기도 하는 지역의 명산으로서 9개의 봉우리로 이루어져 있고, 주봉(主峰)은 상봉이다. 산의 이름은 산의 형세가 소의 머리를 닮았다고 하여 생겨난 이름이다. 시간적인 계산을 잘해서 등산을 한다면 우두산에 올라 출렁다리 방면으로 내려올 경우 멋진 일몰과 함께 출렁다리의 모습을 사진에 담을 수 있다. 백문이 불여일견이라고 직접 두 눈으로 보고 체험해 봐야 그 진가를 알게 될 것이니 거창을 방문한다면 반드시 이곳을 찾아가 보기를 적극 추천한다.
전국의 각 지방 도시들을 방문하다 보면 한 가지 공통점이 있다. 물론 모든 도시가 다 그런 것은 아니지만 의외로 많은 중소도시들이 군청이나 시청 소재지 등이 위치한 도시의 중심가 주변에 하천을 끼고 있으며, 이러한 하천은 도시의 중심을 가로지른다. 그 크기도 대동소이하며, 이러한 하천은 지역 주민들에게 쉼터이자 공원 역할을 톡톡히 하고 있다.
단적인 예로 경남 진주나 전남 장흥, 경북 영천 등에 가본 사람이라면 필자의 얘기가 쉽게 이해가 갈 것이다. 이번에 보름살기를 위해 찾은 거창군 역시 거창 읍내 옆으로 제법 큰 규모의 하천이 가로지른다.
예전 같으면 이 하천에서 어망으로 물고기를 잡는 풍경을 흔하게 볼 수 있었지만 아쉽게도 지금은 그러한 모습을 찾아볼 수 없다. 간혹 홀로 낚시를 하는 사람의 모습을 간간이 보기는 하지만 그 모습들 역시 매우 드물다. 하천변 주변의 산책로는 정비가 꾀나 잘 돼 있어 가볍게 걷거나 뛰기 운동을 하기 좋으며, 어르신들을 위한 정구장도 마련되어 있기도 하다.

하천의 곳곳에 징검다리가 있어 반대편으로 수월하게 건널 수 있다.


하천을 건널 수 있게 일정한 간격으로 디딤돌이 있어, 하천 어디에서도 맞은편으로 건너기 수월하며, 이 디딤돌을 건너는 지역민들의 평범한 모습도 카메라 앵글에 담으면 운치 있고 제법 그럴듯한 풍경 사진이 된다.
하천 주변은 봄, 여름, 가을, 겨울의 사계절이 모두 운치 있고 평화로워 보이지만 특히 가을이 되면 하천 주변으로 흐드러지게 핀 은행나무들이 뿜어내는 노란 가을의 색은 이곳을 거닐며 산책을 즐기는 사람들에게 행복 바이러스를 가득 안겨 주기에 충분하다. 이번 거창 방문 시기가 가을 단풍을 만끽하기에는 다소 늦은 감이 있었지만, 그 노란 가을의 색을 느끼기에는 크게 부족함이 없어 보였다.
매일 이 하천에서 두어 시간씩 거닐며 산책을 즐겼다. 무선 이어폰을 두 귀에 꽂고 평소 즐겨 듣던 노래들을 들으며 하천변을 걷다 보면 정말 시간 가는 줄 몰랐다. 특별한 것 없이 그렇게 하천변을 걸었던 기억이 참으로 행복하고 커다란 힐링이 되는 시간이었다. 이렇듯 하천변을 거닐든, 공원들 거닐든, 특정 관광지를 둘러보든 각자의 성향이나 취향에 맞는 곳을 찾아 그곳에서 즐기는 시간들이 행복하고 큰 힐링을 받는다면 그것으로 충분하다. 무엇을 먹든, 무엇을 보든, 어디를 가든, 본인이 좋으면 그게 가장 행복한 시간이자 행복한 여행이다.

전망대에서 내려다 본 운석충돌구의 웅장한 모습


옆 동네 합천에서 얻은 소소하지만 큰 행복
거창에서 이렇게 소소한 행복의 시간을 즐기던 중 어느 날인가 인터넷 검색을 하다가 거창군과 마주한 합천군의 몇몇 장소가 눈에 들어왔다. 거창에서의 보름살이를 위해 거창에 왔지만 굳이 거창에서만 있으라는 법도 없을 뿐더러 뭐라 말할 사람도 없으니, 이번에는 합천으로 넘어가 아주 희귀한 장소를 방문해 보았다. 그리고 그곳을 가는 과정 자체도 희귀할 뿐더러 다소 위험하기까지 했으니, 필자의 기억에 여러모로 특별하게 남을 수밖에 없었다.
그렇게 모든 게 희귀한 그곳은 바로 적중-초계 분지에 위치한 ‘운석 충돌구’다. 약 5만 년 전 지금의 합천군에 지름 200m 크기의 운석이 떨어져 생긴 크리에이터로서 무려 가로 8km, 세로 3km의 거대한 규모이자, 동아시아에서 중국 다음으로 두 번째라 하니 직접 두 눈으로 보면 마치 영화 속 한 장면을 보는 듯하다.
이 전망 스폿은 대암산 정상이며, 패러글라이딩 활공장이기도 하다. 이곳에 오르는 방법은 초계면에서 오르는 길과 대양면에서 오르는 길이 있다. 대양면에서 오르는 임도길은 길의 폭이 좁고 험하기 때문에 맞은편에서 다른 차량이라도 만나면 매우 난처한 상황에 처할 수 있다. 초계면에서 오르는 방법을 적극 추천한다.

해인사 매표소를 통과해 길의 끝까지 위로 올라가면 좌측에 보이는 장소로써 이국적인 풍경이 매우 멋스러운 곳이다.


정상에 오르면 작은 초소 하나가 보인다. 그 안에 사람이 있을 것이라고는 생각지 못했으며, 눈앞에 펼쳐진 충돌구의 웅장한 모습에 매료돼 한참을 바라보고 난 후에야 발걸음을 옮길 수 있었다. 산을 다시 내려가기 위해 그 작은 초소 앞을 지나치는데, 그곳에서 누군가가 나오는 게 아닌가.
적어도 60은 넘어 보이는 분이 나오면서 필자에게 건네는 말이 “이 외진 곳에 혼자 왔느냐”, “어느 지역에서 왔느냐”고 질문 세례가 쏟아졌다. 아마도 이곳을 찾는 사람들이 많지 않고 또 외지인들은 이곳의 존재 유무조차 알지 못하기 때문에 혼자 그 외진 곳까지 올라온 필자가 다소 이상하게 보였던 것 같다.
그 산 정상에 있는 작디 작은 초소로 매일 출퇴근을 하는 그분도 참으로 대단해 보였다. 하루 종일 그 외로움과 싸움의 시간들은 대체 어떻게 보내는지, 그저 놀라울 따름이다. 다시 산을 내려가면서 느낀 게 맞은편에서 올라오는 차라도 있었더라면 정말 어찌했을지 아찔했다. 하지만 이곳을 다시 한번 방문해야 할 것 같다. 일출 시간대에 운석충돌구 위에 내려앉은 운해를 붉게 물들인 일출사진을 찍어보고 싶단 욕심이 도통 가시질 않는다.
합천에서의 길지 않은 시간이었지만 그 임팩트만큼은 실로 엄청났다. 그 희소성이나 가치에 비해 너무나 알려지지 않은 장소를 방문 후 느끼는 만족감의 크기와 희열감은 때로는 전율이 오르기도 한다, 그리고 필자에게는 그 장소가 바로 그러한 전율을 느끼게 하는 곳이었다. 다시 거창으로 돌아가는 길에도 필자는 연신 “와~ 진짜 끝내주는 곳이었어”라는 말을 되풀이하곤 했으니 말이다. 숙소로 돌아온 후 합천이란 곳이 궁금해졌다. 그래서 합천에 대해 이래저래 자료 조사를 해 보았다. 일단 경남지역에서 땅이 가장 넓은 곳이자 주변이 온통 산으로 둘러싸인 그런 고장이었다. 그래서 특정 장소를 정하지 않고, 일단 며칠 후 다시 합천으로 향했다.

해인사 팔만대장경은 8만 1,258장의 목판으로, 한 장의 목판은 세로 26cm, 가로 72cm, 무게가 2.5kg이 넘는다.


목적지 없이 그렇게 드라이브 삼아 합천 곳곳을 다니다 보니 의도치 않게 한국의 3대 사찰 중 한 곳인 해인사 입구를 향한 진입로로 들어서게 됐다. 그래서 또 그렇게 해인사 팔만대장경도 보고 해인사 한 바퀴를 둘러본 후 내려왔다. 주변 풍경이 참으로 아름다웠다. 주변의 풍경도 아름답지만 그저 숨만 들이마셔도 건강해지는 그런 청정한 공기의 느낌이었다.
주변을 걷다 스님 한 분께 주변에 또 좋은 곳이 어디 있느냐 물으니 ‘가야시장’을 한번 가보라고 권하셨다. 해인사 주차장에서 차로 불과 10여 분 남짓 거리였으며, 가야시장은 필자에게 상당한 충격과 신선함을 안겨준 곳이었다. 이곳의 모든 풍경은 시간이 완벽히 멈춘 곳이었으며, 마치 40~50년 전을 배경으로 한 영화세트장을 보는 기분이었다. 시장과 그 주변의 왕복 2차선 좁은 도로 양 옆에 자리 잡은 상점들의 풍경은 시간이 멈춘 듯 보였다.
전국의 수많은 지방 중소도시들 중에서도 특히나 개발이 없는 시골의 옛 모습 그대로를 간직한 곳들이 매우 많다. 하지만 그러한 시골의 정겨운 모습들 중에서도 유독 사람들의 마음을 흔들어놓는 지역들이 있기 마련이다. 기자에게는 그런 곳이 바로 강원도 정선의 사북과 태백이었다. 이 두 곳의 첫인상은 평생 잊지 못할 만큼 그 낭만과 운치 가득한 느낌이 아직도 기억에 생생하다. 그리고 다음 지역이 바로 이곳 가야시장과 그 주변의 풍경이었다.

길의 폭이 매우 협소해 양바향에서 차라도 마주하게 되면 큰 낭패를 겪을 수 있음을 유의해야 한다.


주변에 산이 있는지, 도로는 평지인지, 오르막길인지, 굽은 도로인지, 직선 도로인지, 주변 상점들의 업종과 간판들의 모양이나 느낌 하나하나까지도 매우 다양한 요건들이 부합돼야지만 그곳을 처음 찾는 이들의 마음을 요동치게 만들 수 있다.
가장 압권은 가야시장의 내부 풍경이었다. 시장의 규모도 참 좁고 작고 허름하다. 시장 내부에서 파는 물건들은 딱히 지갑을 열게 할 만한 요소들이 없어 보였으며, 각 주인장들 역시 연세들이 꽤나 있어 보이는 분들이 대부분이었다. 심지어는 정말 그 물건들은 팔려는 것인지에 대한 의문이 들 정도의 제품들도 보였으나 인근 지역민들에게는 반드시 필요한 물건들임이 분명했다.
물건들 앞에 앉아 있는 주인장들의 표정은 “누가 와서 사거나 말거나”하는 마인드처럼 보였다. 그냥 시장 안의 모든 게 허름하고 지극히 평범한 시장이면서 또 참으로 고요하고 평화로워 보였다. 시장 안에 몇 안 되는 좁디좁은 식당 몇 곳의 음식은 맛있을지에 대한 의구심이 들기도 했다.
하지만 고작 10명 정도가 들어가면 꽉 차는 그 좁은 식당에서 먹은 청국장백반의 맛은 정말 기절초풍할 정도로 맛이 깊고, 진하고, 일품이었다. 기자의 머릿속을 뒤흔들어 놓은 그 마성의 매력을 뽐내는 식당은 이름조차 없었던 것 같다.

합천의 가야시장


삶의 주옥같은 여유와 휴식의 시간들
다음 여행에 대한 밑그림을 그려 본다

남의 보름살이 과정에서 사람들은 어떤 걸 가장 궁금해할까. 기본적으로 무엇을 먹는지, 무엇을 보았는지, 어디를 갔는지 정도일 것이다. 여기서 간혹 일부의 사람들은 나 아닌 다른 누군가의 일상 자체가 재미있기도 할 것이다. 아침에 눈을 떠 밤에 잠자리에 들 때까지의 아무런 특별함이 없는 일상의 모든 것이 재미있게 느껴질 수도 있다. 하지만 역시나 먹거리나 볼거리가 사람들의 흥미를 유발하기에는 제격이었으며, 이는 불변의 법칙이기도 하다.
이번에 이야기보따리를 풀어볼 소재는 특별한 음식도 아니고, 그렇다고 특별한 관광지도 아니며, 그저 목적지 없이 운전대를 잡고 유유자적하며 돌아다니다 발견한 한적한 도로 옆의 공원이라고 말하기에도 애매모호한 그런 곳이었다.
합천과 거창의 경계지점을 지나 거창 가조온천 인근에 자리한 이곳은 이름도 모르는 장소다. 넓지 않은 부지에 잔디밭과 벤치 몇 개가 놓여 있을 뿐, 사람 한 명 없고, 그저 주변을 가끔씩 지나치는 차량들 몇 대뿐이다.
문득 생각난 게 글쓰기에 아주 최적의 조건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어차피 목적지 없이 돌아다니던 중이었고, 마음이 끌리는 곳에 차를 세우기로 했던 터라 일단 이곳에서 차를 세웠다. 가방에서 노트북을 꺼내 마련된 테이블 위에 세팅을 마친 후 잠시 주변을 거닐다 다시 자리에 앉아 본격적으로 글을 쓰기 시작했다. 구력 20년의 기자라 할지라도 글이 안 써질 때는 한없이 안 써지고 또 소위 말하는 글빨이 잘 먹히기 시작하면 거침없이 써 내려가게 된다. 이 날 이때가 바로 그 글빨이 제대로 먹힌 날이었다.

거창 가조온천에서 가까운 혼수 앞 잔디밭에 앉아 한가로이 글을 썼던 기억은 아마 필자의 기억에 오래도록 남을 것 같다.


풍경 좋은 야외 벤치에 앉아 글만 쓰기에는 참으로 아까운 그런 좋은 날이었지만 뭐 딱히 바쁜 일도 없고, 바쁠 예정도 아니었다. 거창에서의 시간은 그저 여유 그 자체였으니, 글도 쓰고 싶으면 쓰고, 쓰기 싫으면 안 쓰면 그만이었다. 하지만 글이 그토록 잘 써지니 억지로 안 쓸 이유가 전혀 없는 그런 날이었다.
그렇게 아주 신나게 글을 쓰다 보니 어느새 3시간이 훌쩍 지났다. 미리 가지고 온 김밥 한 줄을 먹고 볼륨은 최대로 높여 리듬감 좋은 노래를 들으며 눈앞의 풍경을 맘껏 즐겼다. 딱히 그 무엇에게도, 또 그 누구에게도 강제적 통제를 받지 않고, 시간의 구애를 받지 않으면서 산다는 것은 정말 낭만적이고 행복한 일이다.
물론 보름이라는 정해진 기간 안에서의 제한적인 자유이지만 충분히 낭만적이고 충분히 힐링이 됐다. 이러한 경험을 자양분 삼아 언젠가 다시 한번 이 소중한 시간들을 갖기 위해 열심히 살고, 열심히 일하고, 내게 주어진 삶 앞에 부지런해야겠다는 다짐을 해본다. 가끔은, 아니 아주 가끔은 나 자신에게 이래도 되나 싶을 정도의 충분한 시간과 충분한 자유를 주는 건 어떨까. 이런저런 복잡한 생각과 계산만 하면서 미루다 보면, 결국 그 소중한 자유는 이 세상과의 영원한 이별 후에나 가능할 수도 있으니 말이다.
그렇게 거창에서의 보름 살기를 마무리하면서 짐을 정리하던 와중에 필자의 짐이 이렇게나 많았었는지 스스로 놀랐다. 워낙 여행에 앞서 준비성이 없는 성격이라 출발 전날 부랴부랴 짐을 챙기다 보니 불필요한 것들까지 모조리 가져온 게 아닌지 약간은 후회스럽기도 했다. 짐을 차에 한가득 싣고 나서야 보름살기가 끝났음을 실감할 수 있었으며, 서울로 향하는 길에 주변 경치를 구경하면서 다음 여행에 대한 밑그림을 머릿속에 그려 보았다. 여행의 진정한 행복은 그 여행을 준비하는 과정이라 하지 않았던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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