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두섭의 여행스케치] 긴 역사의 흔적

누적되어 있는 오래된 시간을 불러내다

편집부 승인 2024.03.06 15:38 의견 0

또 다시 역마살이 돋았다. 대체적으로 여행을 하고 싶은 마음이 가득 차오를 때는 어떨 때일까. 평균을 내어 보았을 때 얼추 짐작되는 부분이 있는데, 그림 작업을 할 때 무엇인가가 해결되지 않아 답답해져 오는 시간이 참을 수 없을 만큼 누적되어 있을 때이다. 그때마다 어딜 다닐 만큼 여유 있는 생활인이 아니라서 포기해야 할 때가 많긴 하다. 그럴 땐 산길이나 들길을 무작정 돌아다니며 나무나 호수, 혹은 도시의 골목길을 작은 도화지에 담기도 한다. 이번엔 가까운 이웃나라 일본을 가기로 작정을 하고 간단히 그림도구와 짐을 챙겨 여행길을 나섰다.

<나라> 이두섭


[시사의창 2024년 3월호=이두섭 화백] 짧고 작은 여행이어서 큰 부담 없이 나서는 길이다. 가는 길에 자주 가는 화랑에 들러 상황이 되면 전시도 기획해 볼 생각을 했다. 김포공항에서 오사카행 비행기에 탑승하면서 홀로 여행을 하고 있는 나는 내 속에 있는 정체모를 쓸쓸함을 불러내고 있었다. 만일 작업실에 있었다면 이런 쓸쓸함을 불러내었을까. 그러나 감정의 끝을 보다 보면 이것의 바탕은 쓸쓸함이 아닌 희망 건져 올리기인 듯싶다. 그 마음에는 각자의 값이 있다고 할 때 나의 값은 무엇일까를 생각하고 파악하는 것이 나의 여행이니까.
이런 마음으로 여행 스케치를 하면서 여러 상황을 느낄 수 있는 시간이 있어 좋다. 낯선 장소에서의 만나는 나만이 볼 수 있는 아름다움이 있다. 새로운 장소에 도착하면 처음에는 쓸쓸한 기분이 들기도 한다. 생소함 때문에, 여기 이 장소에는 아는 것이 하나도 없다는 것에서 오는 감정인 듯. 주변 환경이 낯설고, 언어나 문화가 다를 수 있기에 당연히 따르는 막막함에서 오는 것이겠지. 하지만 이러한 낯선 정서를 받아들이고 여행 스케치를 통해 감정과 경험을 담아내는 것은 작가들만의 특별한 경험이다. 그 경험으로 창작이 이루어진다는 사실 때문에 기꺼이 그것을 받아들인다.

<아리마> 이두섭


고베에 도착하여 아리마(有馬) 온천으로 가는 기차를 탔다. 누군가가 말해 주었다. 아리마로 갈 때는 한 번에 도착하는 직행버스 말고 오래된 기차를 타라고. 그 동료는 낡은 기차에서 오는 오래된 정서의 느낌을 사랑하나 보다. 그의 권유대로 세 번 환승의 번거로움을 감내하며 아리마 온천을 향한다. 전철을 타고 아리마로 향해가는 동안 자리에 앉아 무심히 눈에 들어오는 사람들의 분위기를 읽는다. 이런 여행 중에 만나는 사람들과의 인연이라는 것은 실은 스쳐 지나가는 덧없는 인연일 수도 있겠으나. 혹시 여기서 만난 사람들을 다른 곳에서도 본다면 어떤 인연일까도 상상해 본다. 산속의 오래된 마을을 걷는다. 여행 중에는 다양한 사람들을 만날 수 있다. 현지인일 수도 있고 타 지역에서 온 다른 여행자, 혹은 여행 스케치를 하면서 만나는 사람들일 수도 있다. 그런 모든 인연은 따뜻하고 소중한 순간이 될 수 있다. 이러한 인연들을 스케치로 담아내면 그 순간들이 더욱 특별하게 기억될 것이다.
아리마 온천은 일본에서 제일 오래 된 온천 지역이라 했다. 산속에 위치한 이곳은 자연의 아름다움을 많이 만날 수 있다. 뜨거운 햇빛 거센 빗줄기, 숲을 지나온 바람 등 다양한 자연의 세월과 함께 지낸 대문을 지탱하고 있는 견고한 기둥들을 보며 스케치를 한다. 세월과 함께 한 모든 것들을 그림에 담아내려 노력하면서 감정의 변화를 느낀다. 세상의 모든 것들의 본질은 평화로움, 고요함이었으면 좋겠다는 생각을 한다. 그것들의 에너지가 스케치북에 담겨지는 시간에 감정적인 안정과 영감을 느껴본다.
복잡한 상가 거리, 혹은 발길이 뜸한 골목길을 걸으며 이 여행 중에 내겐 절실히 그리운 것이 무엇일까 생각해 본다. 살아오면서 내 인생의 대부분을 지탱해 준 그림에 대한 진실의 실체가 그리움의 대상이었을까. 그림에 대한 그리움이 쓸쓸한 마음을 만들어 내고 있다는 생각을 하면 더 깊이 들어가지 말고 즐거운 마음으로 전환해 봐야 하지 않을까. 이러한 그리움을 스케치로 표현하면서 여러 감정들을 정리하는 것이 내 여행의 궁극적인 목적인 것 같다.

<청수사> 이두섭


다음날 교토를 향했다. 고베에서 교토로 직행열차인 JR열차에 탑승했다. 어느덧 도착한 교토 역에서 밖으로 빠져 나와 천천히 길을 걷다가 기요미즈데라(淸水寺)로 행선지를 결정한다. 늘 우발적인 결정. 그렇게 나의 여행은 좌충우돌이지만 햄릿의 정서만 있는 것이 아니고 돈키호테도 함께 있는 것 같다. 교토가 오래된 도시임을 증명하는 것들은 잘 보존되어 있는 건물들의 낡음이다. 그러나 그 낡음의 정의는 헌것이 아니라 또 다른 새것이라는 생각이 든다.
기요미즈데라로 향한다. 언덕길을 천천히 걸어올라 간다. 오를수록 산 밑에 있는 교토 시내의 넓은 풍경이 한 눈에 들어온다. 아름다운 경치와 역사적인 가치로 유명한 이곳은 느껴지는 감정은 경외심과 경이로움이다. 기요미즈데라의 아름다운 목조 구조물과 절벽 위에 자리한 멋진 전망은 많은 사람들에게 경외심의 넓은 마음을 만들어 준다. 이러한 자연의 아름다움과 그 아름다움을 만들어 낸 인간의 창조력에 대한 감동은 여행자들에게 깊은 인상을 남기는 것 같다.
이곳의 평화로움과 명상의 시간을 그림으로 남길 수 있을까. 일본의 역사와 문화를 대표하는 중요한 유적지 중 하나인 기요미즈데라는 조용하고 평온한 분위기를 자아내는 곳이며 명상과 휴식을 취할 수 있는 공간인 듯싶다. 이곳에서 느끼는 평화로움과 내적인 안정은 일상생활의 스트레스와 분주함을 잠시 잊게 해줄 수 있을 것 같다.
기요미즈데라의 건축물, 정원, 조각상 등은 아름다운 예술 작품으로 평가받고 있다. 그런 평가가 여행자들에게 아름다움과 예술에 대한 감동을 안겨준다면 예술의 힘이란 결론적으로 그것의 증명을 위한 행위이며 예술 본질의 한 축이지 않을까.
이 장소는 각각의 여행자들에게 다양한 감정을 주는 곳이므로 개인적인 경험과 감정은 다를 수 있다. 내가 느끼는 이곳은 평화스러움과 예술의 지속성가능이다. 긴 세월을 거치며 감동을 주는 예술의 정서는 놀라움이다. 이 장소에 대한 경외와 연결되는 부분이다. 모든 사람이 다니는 길에서 빠져나와 대나무 숲길을 걷는다. 한적한 길, 이 사찰의 유명세와 관계없이 호젓하게 존재하는 길을 걸으며 예술의 영원성을 다시 한 번 되새김질 해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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