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불교칼럼] 시간(時間) 속에 불법(佛法)을 배우는 방법

편집부 승인 2024.03.06 15:18 의견 0

[시사의창 2024년 3월호=김동식 칼럼니스트] “마음의 때(時)가 다하면 영혼(靈魂)이 오고, 가는 곳 생사가 나아가는 곳을 알게 되리라.”
부처님이 한 사문(四門)에게 물었다. “사람의 목숨이 얼마 사이에 있는가?” “며칠 사이에 있습니다.” “그대는 도(道)를 닦지 못할 사람이다.”
다시 다른 사문(四門)에게 물었다. “사람의 목숨이 얼마 사이에 있는가?” “예, 밥 한 끼 먹는 사이에 있습니다.” “그대도 도(道)를 모르는 구나.” 세 번째로 다른 사문(四門)에게 물었다. “예, 숨 한번 쉬는 호흡지간(呼吸之間)에 있습니다.” “착하고 장하다 그대는 가히 도(道)를 바로 닦을 사람이구나.”

《四十二章經》에 설해(說解)져 있는 이야기를 설해(說解)보기로 하겠다.
어리석은 사람은 한 육십년 사이에 있다고 하겠지만 밥 먹는 사이에 있다고 한 사람은 가까이 대답했습니다. 이런 곳에서 ‘깨달아 자기 살림살이를 만들어 버리면 공부가 안될 수 없고 견성(見性)하지 않을 수가 없습니다. 숨 한번 쉬는데 우리 목숨이 달려 있다는 것이다.
나는 목숨이 찰라에 없어질 수도 있다는 것을 실전으로 느껴보았는데 지난 며칠 전 자동차를 운전해서 편도 3차선을 달려가는데 차선에 오고, 가고, 뒤에서 따라오는 차가 없으니 안심하고 자동차 박스 내에 있는 물건을 꺼내는 순간 자동차는 3차선에 주차되어 있는 중장비 포크레인의 뒤를 오른쪽 후렌드와 오른쪽 앞 타이어가 펑크되어 튕겨 나가면서 꽝 하는 큰 소리가 나면서 앞의 전봇대를 피해 가드라인 옆에 멈추어 서면서 자동차 내에서는 연기와 같은 수증기가 가득차 아차 죽는다는 전율이 흐르는 것이다. 그 순간의 찰라 시간은 2~3초의 순간이었는데, 그러나 다행스러운 것은 에어백 덕분으로 생명을 보존하게 되면서 부처님의 가피를 고맙게 생각하게 되었다.

무엇을 의심하겠는가? 우리는 업보(業報) 중이므로 어리석게 몇 십년, 몇 백년, 천만년을 살 것처럼 세상일에 계산한다. 그렇기 때문에 도(道)의 힘을 얻을 수 없고, 도(道)가 어려운 것이다. 어렵기로 말하면 천상천하(天上天下) 제일 어려운 것이 도(道)이지만, 한편으로는 세수할 때 코 만지고 얼굴 만지기보다 쉬운 것이 도(道)가 아닌가 생각되며, 발심하지 못하는데 어려움이 있지, 다른 이유는 없다.
용맹스러운 마음을 내어 뜻을 높은 산과 같이 세우고 바다와 같이 너그러운 마음을 내어 한 번 혁명을 이루어 보자.
불법(佛法)이라고 하는 것은 나고, 죽는 일을 혁명하는 것이라고 한다.
세상길이 동쪽으로 가는 길이면, 불법으로 가는 길은 전혀 반대쪽인 서쪽으로 가는 길이다. 세상길은 죽음으로 가는 길, 불법으로 가는 길은 사는 길로 가는 길이다. 세상 길은 고통을 받으러 가는 길이요, 불법으로 가는 길은 극락으로 가는 길이다. 도를 닦으라고 해도 말을 듣지 않고 죽을 때가 되어 후회하며 눈물을 흘려도 지옥에 가는 길을 면할 수 없다. 그러니 지금까지 걸어오던 길을 뒤엎어 한 번 나고 죽는 것을 벗어나는 공부에 뛰어들어 스스로 혁명을 일으켜 봄이 어떠할까?

「혜암 대종사 큰스님께서는 이러한 말씀을 하셨습니다.」
“부처도 없고 불법도 없다.” 그렇다면 무엇 때문에 고생 고생하며 불법을 배울 것이 있는가 하는 의문이 있을 수 있다. 단지 차별하자면 육안으로는 볼 수 없고 마음의 눈을 떠야 본다는 것이다. 거울에 의지해서 내 얼굴을 보는 것처럼 도(道) 닦는 비법에 의지해 주인공을 보려고 하면 힘 안 들이고 볼 수 있다. 그러나 천만 번 깨달아도 거울에 의지하지 않고는 내 주인을 볼 수 없는 것이다.
불교 집안에서 어릴적부터 부처님의 가르침을 자연스럽게 접해온 사람이 있는가 하면, 종교를 믿지 않거나, 다른 종교를 믿다가 부처님의 가르침을 처음 접하는 사람도 있을 것이다.

불교는 바른 사고와 실천을 기본으로 하는 종교이다.
반복할 수 없는 소중한 인생에서 어느 한 순간 소홀히 여길 수는 없지만, 그 중에서도 특히 삶의 중요한 계기가 되는 시점이 있다. 그 시기는 이전의 삶을 종합하는 것이면서 동시에 이후의 삶을 규정하므로 불자로서 맞이하고 통과하기 위해서 불교적인 세계관과 인생관에 대하여 알아야 한다. 그것이 불교인의 삶과 다른 삶을 구별짓는 중요한 요소라 하겠다. 인생의 삶이 길다면 길고 짧다면 짧은 삶 속에서 그동안 살아왔던 자신의 삶을 되돌아보고 앞으로의 삶은 바른 가르침을 배우고 실천하는 불교인이 되기 위하여 시간을 쪼개어 열심히 배울 것이다.

『중아함경(中阿含經)』에 다음과 같은 말씀이 있다.
“지나간 일을 생각지 말라. 오지 않는 것을 기다리지 말라. 과거는 지나갔고, 미래는 아직 오지 않았으니, 다만 현재의 일만을 살펴라. 동(同)하지도 말고, 망설이지도 말라, 그것을 알고 다만 키우라. 오늘 할 일은 오늘 하여라. 누가 알 손가, 내일 죽음이 있을 것을 저 염라대왕(閻羅大王) 사자와 싸우게 될는지 누가 알 손가, 오늘을 소홀하면 내일은 없는 것이니, 오늘 지금의 마음을 떠나서는 진실로 살 수 없는 것이다 말하지 말라, 오늘 배우지 않고 내일이 있다고 말하지 말라. 금년에 배우지 않고 내년이 있다고 세월은 가는 것, 나를 기다려 주지 않으니 아! 늙는다 하고 한탄(恨歎)한들 누구를 탓할 것인가. 오늘 하루 영원한 오늘로 보는 사람이야말로 진정한 과거를 살아온 사람이며 미래에도 살 수 있는 사람이다.”

옛날 우리 할머니 어머니들은 절에 가서 내 자식 내 가족만 잘 되게 해 달라고 비는 기복적 불교이었지만 이제는 본인 스스로가 젊어서부터 부처님의 가르침을 올바르게 이해하고 습득해야 한다. 그 이유는 자신의 가치관을 불교적 가치관과 세계적 가치관으로 변화시키는 사람이 진정한 불자로서 복 받는 불자에서 복 짓는 불자로 성장할 수 있기 때문이다. 세월은 나를 위해서 더디 가거나 멈추어 주지 않고 계속 흘러만 간다. 우리 인생에 있어서 시간이 얼마나 소중한가를 다시 한번 일러주는 것이 있으니 바로 주자(朱子)의 시(詩)이다.

『주자 왈(朱子 曰)』의 시(詩)글을 읽어 보기 바란다.
“오늘 배우지 아니하고 내일이 있다고 이르지 말며, 금년에 배우지 아니하고 내년이 있다고 이르지 말라 날과 달이 지나간다. 세월은 나를 위해 더디 가지 아니하니 슬프다 늙었구나.
이 누구의 허물인가? 소년은 늙기 쉽고 배움은 이루기 어려우니, 한 치의 시간이라도 가벼이 해서는 안 된다. 아직 연못가의 봄 풀이 꿈을 깨기도 전에 뜰 앞에 오동잎이 이미 가을 소리를 낸다. 젊은 사람들은 시간의 질에 관심이 많고 늙은 사람들은 시간의 양에 관심이 많다.
이것은 시간의 양(量)에만 관심을 갖는 젊은이가 있다면 그는 이미 젊기를 포기한 사람이다.”
그렇다면 불법(佛法)을 공부하려는 법우(法友)님들은 내 젊음을 불법(佛法)에 불사(佛師)를 할 줄 아는 시간(時間)을 잘 활용하시는 불자(佛子)로서 훌륭한 분들이라고 감히 말을 아니할 사람이 어디에 있겠습니까?
오직 시간(時間)을 아끼고 아끼면서 용맹정진(勇猛精進) 하기를 기원(祈願)드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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