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사이야기] 조선의 못난 왕과 못난 남자들

편집부 승인 2023.12.08 10:53 | 최종 수정 2023.12.09 13:18 의견 2

MBC문화방송에서 오랜만에 사극 드라마의 히트상품이 등장했는데 남궁민과 안은진 주연의 드라마 ‘연인’이다. 길채(안은진 분)와 이장현(남궁민 분)이라는 허구의 인물들이 애간장 태우며 엇갈리고 엇갈리다가 지아비 지어미가 되어가는 지난하지만 애틋한 사랑 이야기이다. ‘연인’은 상투적인 사랑 드라마처럼 삼각 사각의 울고 웃는 드라마적 요소는 별로 없으며 인기가 있다고 질질 끌지도 않는다. 이장현(드라마 이장현은 역사 속 실존 인물로 조카 장희빈을 왕후로 만든 남인 역관 장현으로 추정되며 실제로 심양에서 소현세자와 강빈에게 많은 도움을 주었다고 함)에 대한 길채의 당돌하고 발칙한 사랑 이야기와 동성인 량음(김윤우 분)의 가슴 아픈 짝사랑이 병자호란의 시대적 상황과 맞물리며 드라마가 전개되고 있다. 드라마 연인은 사랑하는 남녀의 이별과 만남의 절절함과 구멍이 없는 연기자들로 시청자에게 재미를 더하지만 간과해서는 안 될 중요한 지점이 있다. 첫째, 드라마 연인의 시대적 상황인 병자호란에서 비록 패전국이지만 자국민에 대한 보호에 조선 왕 인조와 조선 남자들의 치부가 여실히 드러나고 있다는 것이다. 둘째, 전쟁이 끝나고 조선의 통치이념인 성리학의 밑천이 바닥을 보였음에도 사농공상의 신분제에서 벗어나지 못했다는 점이다.


[시사의창 12월호=민관홍(칼럼니스트, 우리문화숨결 경복궁해설사)] 패전에 책임지지 않는 임금, 인조
인조는 정원군의 장남으로 광해군의 이복 조카인데 동생 능창군이 역모에 연루되어 죽자 광해군에 반감을 갖게 되었다. 그 후 아버지 정원군이 역모에 연루되어 죽은 아들로 인해 화병으로 사망하자 더욱 원한을 갖고 있었다. 결국 인조는 인조반정으로 광해군을 쫓아내고 왕위에 올랐으나 전혀 준비되지 않은 왕이었다. 역사 이래 왕위만 탐낸 왕들은 나라가 위태롭고 백성이 도탄에 빠져도 자신의 보위를 지키는 것이 최우선이었다. 이런 왕이 조선에 둘이 있으니 임진왜란 후의 선조와 병자호란 후의 인조이다. 패전에 책임지지 않은 임금 둘, 선조와 인조는 우열을 가리기가 쉽지 않지만 선조는 전쟁에 져서 항복은 하지 않았고 인조는 삼전도에서 삼배구고두의 치욕을 당하며 항복을 한 장본인이다. 자신의 오판으로 나라가 전쟁의 소용돌이에 빠졌다면 종전 후 퇴위해야 마땅하다. 하지만 전시에 정부를 분조하여 사지에 나간 왕세자가 민심 수습을 잘하고 백성의 지지를 받자, 양위를 하겠다며 왕세자를 겁박하고 견제하였던 왕들이 선조와 인조였다. 임란 당시 백성의 고통과 슬픔을 함께하였던 광해군(정비소생이 아님)은 그때의 트라우마로 풍수사의 말에 현혹되어 경복궁을 중건하지 않고 월산대군(성종의 형)의 사저를 증축하여 임시 행궁(덕수궁)으로 사용하였고 동궐인 창덕궁과 창경궁을 중건하였다. 그리고 인경궁(지금의 서촌 일대에서 인왕산 쪽 추정)을 짓고 인조 아버지 정원군이 살았던 집터에 왕기가 서려 있다고 하자 왕기를 누르려고 자신의 왕궁인 경희궁을 지었다. 현재 우리가 보고 누릴 수 있는 4대 궁궐(경복궁은 제외)은 광해군의 트라우마로 인한 풍수사의 덕분이라 해도 과하지 않을 듯하니 마음이 씁쓸하다. 광해군은 외교는 잘하였으나 과도한 궁궐건축으로 민심이 이반 되었고 결국 복수의 화신으로 왕위 그 자체에만 목표와 목적을 둔 조선 최악의 임금인 인조의 등장 배경이 되었다.
왕이 된 인조가 한 일은 친명 배청이었다. 욱일승천하는 후금을 무시하고 임란 이후 몰락하고 내전으로 피폐해져 가는 명나라를 재조지은(명나라가 조선을 다시 만든 은혜)의 나라로 섬기는 것이었다. 선조는 이웃 왜 나라의 풍신수길(도요토미 히데요시)이 전국을 평정하고 조총과 실전으로 무장한 병력 이십육만 명을 양성한 것도 모르고 왕권 보호를 위한 정쟁만 하다가 왜란을 당하였다. 인조도 국제정세에 ‘귀 막고, 눈 감고, 입 막고’ 정묘호란과 병자호란을 두 번을 당해도 교훈을 얻지 못하고 소현세자에게 왕위가 넘어가는 것만을 두려워하여 영구 귀국한 소현세자를 홀대하였고 심지어 독살했다는 이야기도 있다. 소현세자 사후 세자빈 강빈에게는 사약을 내리고 손자들은 제주도로 귀양을 보낸 무책임하고 파렴치한 왕이었다.

영화 《남한산성》 중 병자호란


사람들은 보통 당시의 왕만을 비난하게 마련인데 사실은 당시의 기득권층이자 양반 계층의 사람들과 그들의 통치이념인 성리학에 대한 비판과 분석이 필요하다. 임진왜란 이후 선조의 무책임과 광해군에 대한 견제는 왕위 계승자에 대한 당쟁이 심화되어 유성룡의 징비록(왜란에 대한 후회와 통렬한 반성문)이 조선 사대부의 반성문과 대책으로 널리 읽히지 못하고 오히려 전범국인 일본의 서점가에서 베스트셀러가 되었다는 것은 우리 역사의 아이러니다.
임진왜란과 정묘호란에서 교훈을 얻지 못한 못난 왕 인조와 못난 조선의 사대부 남자들로 인해 전쟁이 나고 조선의 민초들이 사지로 내몰려 청나라로 60여만의 포로(남한산성의 산성일기)가 잡혀가는 지경이 되었다. 전쟁이 나서 나라가 초토화된 것은 백번을 양보해서 어쩔 수 없다고 생각한다 해도 못난 왕 인조와 못난 조선의 양반들이 전후에 보인 행동들은 정말 용서할 수 없는 저열한 마음이요 행동이었다. 당시 인구 천만의 조선에서 60만이 포로로 끌려간 것은 어마어마한 사건인데 60만의 포로 중에는 여성이 20만이었다. 포로들은 전쟁이 끝난 후에도 귀국하지 못하고 노예의 삶을 계속 살게 되었고 도망을 가다가 잡혀서 아킬레스건을 잘리거나 죽거나 하였다. 당시 기록에 의하면 도망친 포로가 강을 건넜는데 조선의 관리가 내쫓아서 어찌하지 못하고 나무에 목을 매달았고 강을 건너지 못한 사람은 그 소식을 듣고 나무에 목을 매다니 도망친 조선 포로의 목맨 시신이 강 양쪽 나무를 하얗게 덮었다고 하였다.
그러나 정말 슬픈 이야기는 여성들로 포로에 대한 속환을 받고 귀국한 사람과 천신만고 끝에 도망한 여성들이었다. 이들의 인생역정은 칭찬받아야 마땅하나 성리학의 교조적인 사회에서는 몸을 더럽힌 여자가 가문의 수치로 여겨졌으며 자결을 강요받았다. 자결하지 않은 여성은 남은 생애를 모멸과 조롱의 대상으로 살아야 하였다. 환향녀(고향에 돌아온 여자)가 화냥년의 유래라고 하는데 고향에 돌아온 여자가 어떻게 탕녀가 될 수 있는지? 무책임하고 저열한 못난 조선의 왕과 남자들에게 묻고 싶다. 더불어 일제강점기 못난 조선의 남자들 덕분에 성노예로 끌려가거나 속아서 팔려 간 우리의 여성들에게 우리 정부와 사회가 노력한 것은 무엇인지? 과거사와 오염수 처리 문제에 일본 정부를 두둔하는 윤석열 정부와 관계자들은 어느 나라 대통령이고 어느 나라 고위 관리인지? 병자호란 이후에 조선의 못난 왕과 조선의 못난 남자들이 돌아온 여성 포로에 대한 비열하고 저열한 행동이 일제강점기 고통을 겪은 여성에 윤석열 정부 하수인들의 저열한 언행과 오버 랩 되는 것은 필자만의 생각은 아닐 것이다.
원래 포로 속환 비용은 여자 3냥 남자 5냥인데 공식 속환이 결정되고 속환 비용이 너무 올라 최명길(주화파)은 100냥 이상은 지급하지 말라고 했으나 양반 이성구는 자신의 아들을 1500냥에 속환하였다. 화가 나는 일이지만 양반 사대부가에서 포로 속환 비용을 올려 가면서 자신의 피붙이를 구한 것까지는 그럴 수 있다. 하지만 자신의 가문이 조롱받는 것은 참지 못한 남자들이 자신의 피붙이 여성에게 자결을 강요하거나 살해하고 위장하는 것은 조선의 성리학 질서로 봐도 파렴치한 행위이다. 이것이 조선 성리학의 한계를 잘 나타낸다. 사농공상의 신분제는 상공업을 경시하여 나라의 살림이 하늘만 쳐다보는 농업에 의지하게 되는 것이다. 양반도 남자들은 다른 직업을 선택하지 못하고 오로지 글공부만 하여 관리가 되는 것이고 관리가 되지 못하면 평생 루저가 되는 것이었다. 나이 5세에서 7세 전후에 글공부를 시작하여 관리에 나갈 수 있는 식년시 문과에 합격하는 평균나이가 35세 전후이니 인재의 낭비, 인력수급의 불균형이 이보다 심할 수 없었다. 더구나 양반은 군역의 의무도 납세의 의무도 없으니 이런 나라가 망하지 않고 오백 년을 버틴 것도 신기할 따름이다.

산성일기 (출처_남한산성 셰계유산센터)


양란이 끝나고 조선의 양반 사대부들이 할 일은 통치이념을 바꾸고 나라의 정책을 올바르게 세우고 인재를 등용하는 개혁을 해야 하는 것이었다. 하지만 이들은 조선의 개혁보다는 성리학을 더욱 교조적으로 만들어 여성들을 더욱 옥죄는 예법으로 그들의 기득권을 강화하였다.
현종과 숙종에 이어 장례 문제로 예법 논쟁을 벌인 송시열은 성리학 예법의 대가로 ‘송자’라는 별칭까지 얻었다. 이들은 성리학의 원리주의자로 주자와 다른 해석을 하는 유학자들을 사문난적으로 멸문시켜버렸다. 지금의 탈레반과 이슬람, 기독교 원리주의자들과 무엇이 다를게 있다는 말인가? 드라마 ‘연인’에서는 여주인공 길채가 조선의 여자답지 않게 개방적이고 남성을 선택하려는 모습도 보여줬고 결혼 후 청나라에서 욕을 당하지 않았느냐는 남편의 말에 이혼을 먼저 요구했다. 드라마는 ‘시사의 창 12월호’가 나오기 전에 해피엔딩으로 끝날 것이지만 병자호란 후의 현실은 속환 포로 딸을 둔 양반은 사위의 이혼 요구 반대와 재혼을 허락하지 못하게 하는 상소를 올렸으며 속환 포로 며느리에게는 이혼을 해달라는 상소를 올렸다. 이 또한 같은 여성이라도 딸과 며느리라는 입장에 따라서 요구조건이 다른 철저한 이기주의자들이 당시 남성 중심 성리학 기득권 층의 민낯인 것이었다. 병자호란 전후로 드라마 속 길채같은 여성이 있었으니 그는 소현세자의 세자빈 강빈이다. 청으로 볼모로 끌려갔지만 사업수완을 발휘하여 청과 조선의 무역 및 교섭창구 역할을 하였고 소현세자를 보필하여 볼모의 시기를 지혜롭게 견뎌왔다. 귀국 후 인조의 소현세자에 대한 왕권 견제에 입 바른말을 하다가 소현세자 사후 사약을 받고 죽었으며 폐서인으로 있다가 숙종이 신원을 회복시켜주었다. 지금은 광명시 애기능 저수지 옆 영회원에 묻혀 있다.
드라마 연인은 역사의 소용돌이 속에서 나름 자신의 중심을 잡으려 하는 길채와 이장현의 모습에서 연민을 느끼고 일주일에 두 번 그들의 사랑에 응원을 보내는 우리 자신을 보게 하였다. 드라마는 드라마일 뿐이지만 임진왜란과 병자호란 이후 조선은 국민의 안전과 보호를 위해 무엇을 하였는가? 일제강점기 이후 대한민국은 국민의 안전과 보호를 위해 무엇을 하였는가? 에 대한 깊은 고민을 하게 된 계기가 되었다. 국가의 통치이념은 안정기를 거쳐 한 세대가 흐르면 그대로 그 나라와 그 사회와 국민들의 머릿속에 은연중에 이식되어, 좋든 나쁘든 그 사회의 윤리나 정의의 개념으로 정리된다. 그래서 나쁜 이념은 나치의 유태인 학살과 국가 간 인종청소가 일어나기도 하는 것이다.
하지만 국가의 통치이념이나 종교, 최근의 AI와 콘텐츠의 홍수 속에 중심을 잡아야 할 게 있다면 인간의 상호 인권 존중이며, 뭇 생명과의 공존이며, 사회적 약자나 사회적 슬픔에 대한 공감력이며, 이것들을 지키기 위한 연대이다. 이것은 어떤 종교나 어떤 이념보다 우선적으로 마음속에 지니고 실천해야 할 덕목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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